병, 하사, 장교를 거친 여고생 이야기(여자도 사병입대를 했다.)

장강호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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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와 여자는 빼놓을 수 없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지금 여자가 부사관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런 분들의 희생에 따른 것이 아닐까요?

판의 논쟁을 보면 누구말이 맞다고 할 수 없고 어느 한쪽의 이야기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부의 문제를 가지고 편견을 가지지 말고 다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최근 재향군인회가 시끄럽습니다. 그 문제는 제외하고 순수한 한명의 여군의 이야기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에 한 재향군인회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기사에 나온 것을 뽑아 넣었습니다.
읽어보시면 이런 분들 때문에 여권신장이 이루어졌고 지금 우리세대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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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재향군인회 김복순 여성회장
 
“‘진짜 사나이들’도 벌벌 떨었죠”
 
“야가 지금 뭐라카노? 가시나가 무슨 군대고? 정신이 나갔나!”
1965년 초겨울, 포항 변두리 작은 단칸방이었다. 한 여고생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딸의 말에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던 아버지는 회초리로 등을 후려갈겼다. 아내를 일찍 잃은 뒤 동생들을 엄마대신 돌보던 큰딸에게 배신감이 들었던 것인지 몰랐다. 거듭되는 매질에 딸이 바닥에 쓰러졌지만 아버지는 회초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
“갈려면 가라. 대신 지금부터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딱지치기를 하다가도 여자라고 무시 당하면 주먹다짐을 해서라도 사과를 받아냈다.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어디 여자가 건방지게 나대냐”는 말이었다. 여자라서 특혜를 받는 것은 더 욱 싫어했다.
한 달 후 여고생은 세면가방 하나를 들고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대구재향군인회 김복순 (70)여성회장의 이야기다.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된 60년대에 남자들의 세계에서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군대에 도전한 그였다.
  

 
#첫 점호는 연병장 구보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구타는 물론 여자 여군들의 내무생활도 만만찮았다. 당시 여자가 장교로 복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 생활을 거쳐야만 했다. 이등병으로 입대해 하사 때 사관시험에 합격해 보병 장교로 임관했다. 장교로 계급장을 달았지만, 순탄치 않았다. 계급이 아무리 높아도 ‘여자’라서 무시당하기 일색이었다.


소대장으로 발령받아 첫 점호를 돌 때였다. 침상에 앉아 있어야 할 남자 소대원들이 전원 누워있었다. 모포를 벗기니 전원이 팬티바람이었다. 보고를 하는 분대장 사병은 씩 웃기까지 했다.
순간 ‘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소대원을 연병장으로 집합시켜 두 시간동안 같이 구보를 했다. 이를 지켜 본 중대장이 ‘이제 됐으니 그만해라’는 말을 듣고 다시 점호를 돌았다. 처음과는 달리 군기가 확실히 들어갔다.

 
 

 


남성적인 병영문화 개선에도 앞장섰다. 사병과 하사관 생활을 거친 소대장 이였기에 소대원들의 내무생활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사역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구타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시간도 훤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야!”
사병들 간에 ‘집단 구타’가 행해질 무렵이면 그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났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 소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에 구타와 집합이 줄어들었다.

 
 

 


점심시간에는 소대원 한 명씩 개인 면담을 했다. 귀찮아 하던 소대원들이 시간이 지나자 마음을 열고 따르기 시작했다. 산악회도 만들어 주말마다 산에 올라 서로간의 고충을 털어놓는 시간을 만들었다. 일 년이 지나자 ‘유별난 소대장’에서 ‘통하는 소대장’으로 바뀌었다. 소대원들도 진심인 것을 알고 따랐던 것이다. 소대원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김 소위가 이끄는 소대가 가장 막강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역대 최고의 여군경쟁률을 만들다
중위진급 후 더 큰 숙제가 주어졌다. 여군 모병관으로 발령이 났다. 해마다 지원자가 없어 애를 먹는 것을 보고 고민 끝에 대구·경북에 있는 영화관을 찾아갔다.
“사장 어디 있소?”
입구를 지키던 건달들은 권총을 찬 여자 중위의 기세에 눌려 사장을 앞으로 데려갔다.
“대한뉴스 시작 전 10분만 올라갑시다. 여군모집 홍보 좀 하게.”
기세에 눌려 군말없이 요구를 들어줬다. 영화 시작 전 수백 명 앞에서 그는 여군모집 홍보를 했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매료된 탓인지 경상북도에서 116명이 여군에 지원했다. 한 해 한 시도에서 평균 30명 미만 지원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결과였다. 당연 역대 최고의 지원율이었다. 그 후 매년 인근 여고에 찾아가 군 홍보 활동을 장려했고 여군 내무생활개선을 위해 여군단장과 여군훈련소 소장에게 제안서를 보내 병영문화개선에 앞장섰다.
   

 

 


 
소령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반대하던 아버지도 장교 계급장을 달고 집으로 가면 뿌듯해 하는 눈치였다. 고향에서는 ‘복순이가 장군까지 진급할 거다’는 말까지 돌았다.
승승장구 하던 그의 군 경력에 제동이 걸린 것은 1976년이었다. 결혼 후 임신을 한 것이었다. 임신사실이 알려지자 전역조치가 순식간에 이뤄졌다. 가슴에는 울분이 솟아올랐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렇게 발버둥쳤지만 혼자 힘으로 무리였다. 인생의 첫 좌절을 겪었다.
   

 
 
#소대원 대신 학생들을 택하다
전역 후 경상여자고등학교(구·경희여상) 교련교사로 면접을 갔다. 하지만 면접에서 단칼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매서운 눈매에 군인 티를 벗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런데 뒤돌아 나오려는 찰나였다.
“위잉~”
민방위 훈련이었다. 면접관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외부로 알려지면 징계감이었다. 그는 재빨리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라디오를 켰다. 훈련이 끝난 후 기획실장이 “잠시만 기다려라”고 한 뒤 교장실로 들어갔다. 불합격에서 합격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 열정이면 교련교사 자질이 충분하다’는 학교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교장은 그에게 군대에서 하던 행동과 말투는 일체 쓰지 않기로 하고 어길 시 퇴사를 하는 조건으로 채용했다. 그는 군에서 쏟은 열정을 학교에 쏟았다. 부임한지 3년 만에 대구지역 고등학교 교련 교육 시범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1990년에는 지적장애인 거주시설을 찾아 매주 토요일 학생들과 봉사활동을 했다. 학생 한 명이 봉사 점수로 건국대학교에 입학했다.
채용 시 군 출신인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교장은 학생부장을 맡겼다. 그에게 진로상담부터 개인적인 고민을 상담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때로는 엄마처럼, 언니처럼 상담을 했다.
학생의 규율 지도는 물론 방과 후에도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역사회에서는 여군출신에 학생들의 가정사까지 꿰뚫고 있는 교사로 유명세를 치렀다. 그를 모토로 여군에 입대 하려는 이가 늘자 여군 지망생들은 특별 과외까지 시켰다. 그때 제자들은 현재 영관장교까지 진급했다.
31년간의 교직 생활 후 교육자로서는 가장 큰 명예인 황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퇴직 후에도 학교법인의 일을 보고 있을 만큼 신임이 두텁다.

진짜 보람을 느낀 적은 졸업생들이 찾아와 감사인사를 할 때였다. 지금도 심심찮게 ‘교련 선생님’을 찾는 전화가 걸려온다.
“저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사회에서 기죽지 않고 남자 중심의 분위기에 맞서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한다는 제자들이 많아요. 그런 전화가 오면 기분이 날아갈 듯하죠. 제 교육 목표가 바로 그것이였거든요.”
최근 들어 전화가 부쩍 늘었다. 드라마 ‘미세스 캅’ 덕분이다.
“여자 형사팀장을 보면서 교련 선생님을 떠올렸단 말을 많이 들어요. 저를 그렇게 기억해 주니 너무 고맙죠.”
퇴직 후에는 학교법인활동, 사회봉사활동과 군 관련 활동을 하고 재향군인회 여성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여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능력만 있다면 여성이라고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사회가 변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에 원하지 않는 제대를 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이상 불이익을 받지 않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데 일조한 것 자체가 장군으로 전역한 것 못지 않은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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