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으로 위협당하며 성폭행당한 여자

검객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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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6년 6월 2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7살 때 일본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1943년 5월 2일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르니 15~17살 미만의 처녀들이 50명정도 타고 있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자 모두 여관에 집결시켰다. 고모네 집으로 가겠다고 울면서 조르니 데려다준다고 회유하고는 자동차로 시모노세키부두로 다시 실어갔다. 
거기서 약 20여명의 처녀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길에 올랐다. 며칠후에 도착한 곳이 대만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20명을 선발하여 차를 태워 항공군병영으로 연행하였다. 거기에는 "기꾸사이로유곽"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단층집이었는데 방안크기는 8평방미터 정도였다. 침대 1개, 모포 1장, 베개 2개와 물컵이 있었다. 

 

나는 8호실에 끌리어갔다. 하루평균 5~6명, 때로는 10명까지의 일본비행사를 상대하여야 했다. 
"위안소"는 일본인이 책임지고 운영하였으며 그밑에 5명의 관리인이 있었다. 관리인들이 시간당 2원 (일본돈)씩을 받아 책임자에게 넘기는 것을 보았는데 "위안부"들이 돈을 받은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고통과 수치감으로 하여 내가 응하지 않자 그들은 사정없이 때리고 "조선놈은 황군에게 몸을 주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요구에 응할것을 강요하였다. 
그러고도 내가 응하지 않자 나의 목에 물뱀까지 감아놓아 실신 시킨 다음 저들의 수욕을 채웠다. 

 

도망치는 여성들은 예외없이 잡아죽였다. 같이 있던 장순이라는 조선처녀가 견디기 어려워 도망을 쳤으나 일본군에게 붙들려 무참하게 매맞아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러한 지긋지긋한 생활을 매일 계속 강요당하다가 일제가 패망한 후 1년이 지난 1946년 5월에야 친척의 방조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960년에 17차 귀국선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그 때로부터 50여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의 가슴속에 생긴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있으며 죽어서도 이 원한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날 일제의 만행과 오늘 날 그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에서 나는 오늘의 일본정부가 과거의 일본군부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생각하며 격분을 금치 못하겠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박복이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한국인 생존자는 47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