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아직 W랑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 만납니다.
제 이야기가 즐거운 얘기는 없고 참 어두운 이야기뿐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죄송스럽고 고마워서, 한 자라도 적고 가보려 합니다. 연휴랍시고 약속이 꽤나 있어서, 약속시간까지 한두 시간 남짓 남았으니 평소만큼 지루하지는 않게,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처음에는 그저 하소연하듯이, W를 잊어보고자 글을 썼던 건데, 많은 분들이 진심을 담아 위로를 해주셔서 정말이지 힘을 많이 얻고 갑니다. 여전히 표현이 서툴러 제 마음을 온전히 전해드리지는 못하지만 정말이지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용기를 내서 고백하고 잡으라는 말, 잡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감정선을 마무리하라는 말, W를 그저 바라보는 이런 비겁함도 용기라는 말, 어느 말도 해주지 못하지만 그저 응원한다는 말 모두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이 저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어느 누가 힘든 여건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겠습니까. 고백하라는 말이 단지 이상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저는 부럽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이런 비관적인 현실세계를 이해해주시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는 바입니다.
그저 말 한마디뿐일지라도, 댓글들이 저에게 얼마나 따뜻하고 격려가 되었는지 다 표현할 길이 없네요. 마음같아서는 일일이 대댓글을 달아 드리고 싶은데, 그게 또 좀 부끄럽고 남사스러워서,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실 W를 만나고 나서 글을 적으려고 했기에 무슨 말을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즐거운 날이니만큼 오늘은 의외의 W를 회상해볼까 합니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날.
나란히 W와 벤치에 앉아 한 시간을 고민다가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만 W는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악연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싶지만.
자신을 원망하느냐는 말에 제가 했던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원망하지는 않지만 니가 밉긴 밉다. 니가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가 너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을 알고 있어서 널 탓하고 싶지는 않다. 여자친구를 뺏긴 내가 그냥 등신인 것 같다. 여자친구도 모자라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여자친구와는 끝냈지만 너와는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사랑보다는 우정이라는 십대의 어설픈 허세같은 거였겠지요. 여자는 순간이지만 친구는 평생지기다. 뭐 그런거요.
제가 한 시간을 고민하며 앉아있는 동안 W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꺼낼지 조금 두려워하긴 했을까요. 아니면, 우리도 그냥 모른 척 지내자, 라고 말했어도 충분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을까요. 어쨌거나 W는 그저 담담해보이긴 했죠.
지금 드는 생각은, 지금 와서 해보는 회상속의 W는,
우리는 계속 친구로 지내자, 라는 저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띠었던 것만 같습니다. W의 속내를 누가 알 수 있겠냐만은.
한동안은 W와 어색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학년 반 배정을 받던 날, W와 함께 같은 2학년 교실로 향하면서, W와는 오래 보겠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친구들 중에, 분명히 친하기는 한데 조금 어려운 친구 있으신가요? 제게는 W가 그런 친구였습니다. 저에게뿐 아니라 같이 다니는 무리에게도 W는 분명 친하고 마음도 잘 맞고 함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마냥 친구같지는 않은, 조금 어렵고 거리감 느껴지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풍기는 느낌 자체가 좀 서늘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들끼리는 평소 대화할 때, 욕을 적지 않게 쓰거든요. 화나서가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이새끼 저새끼 하고, 뭐 ㅈㄴ라는 말도 달고 살고 그러는데, W는 일절 욕을 안했죠. 거기에서 오는 간극이랄까. W가 일절 욕을 안 하니 저희도 덩달아 W에게는 욕을 쓰기가 꺼려지고, 그러다보니 친구긴 한데 조금 어려운 친구, 조심스러운 친구 그런 거였죠.
욕을 안 하는 남자애들이야 종종 있기는 한데, 그런 애들은 보통 상냥하고 다정하거나 전형적인 모범생 이미지가 보통인데(모범생도 욕은 다 하긴 합니다만은) W는 그런 이미지도 아니었죠. 무뚝뚝하고 말도 성의 없게 하고, 표정도 차갑고.
제 글속에서 여러분이 상상하셨던 W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실제의 W를 잘 묘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W가 풍기는 느낌을 참 잘 설명해드리고 싶은데 표현력이 딸리네요.
왜냐면, 제가 W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이땐 순수한 의미로) 평소의 W와 나에게 보여주는 W의 상이함 때문이었다고 해아 할까요. 우연히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살짝 미소를 짓는다던지, 타인에겐 관심이라고는 없는 애가 내 일에 관심을 가져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언젠가부터 나에게만 한정된 것들인 걸 알고 나니까 우쭐해지더군요. 뭐 선생님한테 더 예쁨 받는 학생의 우쭐함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고요. 다른 친구들과 난 다르다, 그런 거?
그러면서 서로 집에도 놀러가게 되고, 죽마고우 마냥 친해진 것은 확실한데 그 감정이 확연히 우정이라기엔 조금 미묘하게 다른 것이었죠. 이게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만약 여고, 남고를 나왔다면 한 번씩 그런 감정을 겪어보지 않나, 싶은데 어떠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W가 약간 결벽성 비슷한 게 있다고 말했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랑은 다르게 친구들끼리 손잡거나 그런 거 전혀 없거든요. 스킨십이라 해봤자 때리고 치고, 아니면 어깨동무하는 정도죠. 그 중에서도 W는 조금의 스킨십도 정말 질색했거든요. 친구들이 어깨동무를 하면, W는 팔을 딱 걷어내는 그런 애였죠. 좀 유난스럽고 지랄 맞다 싶었지만, 뭐 그런 애도 있고 유난히 스킨십 좋아하면서 장난스럽게 뽀뽀하자느니 하는 친구도 있으니까, 우린 다 그런가보다 했어요.
1학기의 언젠가 체육대회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학교에서 체육대회나, 수련회, 수학여행 이런 건 거의 썸의 향연이라고 할까. 그 땐 선생님들도 남녀 붙어있어도 별 소리 안하고 그랬거든요. 여자애들 반이랑 남자애들 반이랑 같이 합쳐서 경기하는 그런 것도 있었고요.
뭐 반 대항 줄다리기며 릴레이며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것보다도 중간에 장기자랑은 아닌데 공연? 같은 시간이 있었어요. 댄스부 여자애들이 아이돌 춤을 추거나 외국노래에 맞춰 섹시한 춤을 추거나 그랬거든요. 그럼 다들 우르르 몰려서 넋 놓고 춤추는 거 보고 소리지르고 그랬죠. 우리도 남자는 남자인지라, 관중(?) 무리에 끼여서 보곤 했는데 워낙에 질서도 없고 엉망진창이라 좁고 서로 부대끼고 그랬었죠.
저랑 친구들도 댄스부 공연을 보다가 뒷사람들에게 떠밀려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공간도 좁아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저도 중심을 잡으려 그랬는지 왜인지 무의식중에 W 어깨에 팔을 올렸는데 어깨 전체를 감다시피 둘렀죠. W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목을 떨어뜨리고? (다정하게 기댄 그런 건 아닙니다) 보고 있었죠.
음. 그러다가 문득 W를 쳐다봤는데 저도 모르게 좀 빤히 쳐다봤나봐요. 시선을 느꼈는지 W가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근데 W는 시선이 마주치면 피하질 않습니다. 같이 빤히 쳐다보죠. 훔쳐본 건 아니지만 제 시선을 W에게 들켜버리니까 순간 몸이 굳더라고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순간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와중에 우리 둘에게만 음향이 나간 느낌이었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조용해진 느낌.
그러다가 제가 먼저 어색하게 웃어버렸죠. 그제서야 제가 W에게 팔을 두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쳐다 본건가, 싶어서
아, 미안.
하고 감았던 팔을 풀려는데
별로. 상관없는데.
라고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더라고요. 얘가 워낙 스킨십을 싫어하는 걸 아는데, 상관없다고 하니까 나름의 호의를 베풀어 준 것 같아서 못 떼겠더라고요. 그대로 팔을 두른 채로 공연을 봤는데, 좀 장난을 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제 얼굴은 여전히 W 어깨에 걸터 놓은 채 뒤에서 두 팔로 W 몸을 안았죠. 제 팔에 W 팔이 갇혀있었는데, 전 당연히 뭐하냐고 제 팔을 탁 칠 줄 알았는데, 가만 있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W 반응에, 장난치려던 제가 오히려 당황하긴 했지만, 아닌 척 태연하게 공연을 봤죠.
그 자세로 좀 있다 보니 어이없게도 제 심장이 뛰더라고요. W도 느껴질까 싶어서, 저도 놀래서 W에게서 떨어졌죠.
그 날 이후로 제가 은연중에 슬쩍슬쩍 W에게 터치를 좀 하곤 했었죠. 그 땐 진짜, 이성에게 갖는 그런 감정이라곤 생각도 못 했었죠. 다만 내가 터치할 때만 가만히 있는 W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 걸 제외하면 딱히 저에게 더 친절했던 것도 아니었고.
한번은,
괜히, 이 시계 뭐냐 멋있네, 하면서 W 손목을 잡고 시계를 구경하는 척을 한 적이 있죠. 사실 1학년 때부터 쭉 차오던 시계였는데.
그러자 W가 웃으면서 한 소리 하더라고요. 진짜 시계가 궁금한거냐고.
괜히 제 불순한 의도가 들킨 것 같아서 W 팔을 확 놓으면서, 뭐가. 하면서 전 정색을 했죠.
그렇게 장난치는 척 하면서 W를 좀 귀찮게 굴고, 조금 특별한? 이상한? 우정과는 약간 다른?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지냈던 게 키스하기 전까지였어요. 그 시기가 전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좋아하는 감정 따위인 줄은 전혀 모르고, 친구인데 치대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런 친구. 차갑고 냉정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른 친구. 뭐 그 정도.
지금에서보면, 우정으로 포장한 애정의 감정이었던 거죠.
그 당시의 그런 일화는 더 많은데, 저에게만 좋은 기억인 것 같아서 읽으시는 분들은 아무 감흥도 없으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는 조금 덜 무겁지 않나 싶은데.
약속한 시각이 다가와서, 이제 나가봐야겠네요. 본의 아니게 또 길어진 것 같습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면서 즐거운 한가위 보내길 바랍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
추석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신가요?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아직 W랑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 만납니다.
제 이야기가 즐거운 얘기는 없고 참 어두운 이야기뿐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더라고요. 죄송스럽고 고마워서, 한 자라도 적고 가보려 합니다. 연휴랍시고 약속이 꽤나 있어서, 약속시간까지 한두 시간 남짓 남았으니 평소만큼 지루하지는 않게, 간략하게 적어봅니다.
처음에는 그저 하소연하듯이, W를 잊어보고자 글을 썼던 건데, 많은 분들이 진심을 담아 위로를 해주셔서 정말이지 힘을 많이 얻고 갑니다. 여전히 표현이 서툴러 제 마음을 온전히 전해드리지는 못하지만 정말이지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용기를 내서 고백하고 잡으라는 말, 잡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감정선을 마무리하라는 말, W를 그저 바라보는 이런 비겁함도 용기라는 말, 어느 말도 해주지 못하지만 그저 응원한다는 말 모두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이 저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어느 누가 힘든 여건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겠습니까. 고백하라는 말이 단지 이상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저는 부럽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이런 비관적인 현실세계를 이해해주시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는 바입니다.
그저 말 한마디뿐일지라도, 댓글들이 저에게 얼마나 따뜻하고 격려가 되었는지 다 표현할 길이 없네요. 마음같아서는 일일이 대댓글을 달아 드리고 싶은데, 그게 또 좀 부끄럽고 남사스러워서,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실 W를 만나고 나서 글을 적으려고 했기에 무슨 말을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즐거운 날이니만큼 오늘은 의외의 W를 회상해볼까 합니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날.
나란히 W와 벤치에 앉아 한 시간을 고민다가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지만 W는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악연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싶지만.
자신을 원망하느냐는 말에 제가 했던 대답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러했던 것 같습니다. 원망하지는 않지만 니가 밉긴 밉다. 니가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가 너에게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을 알고 있어서 널 탓하고 싶지는 않다. 여자친구를 뺏긴 내가 그냥 등신인 것 같다. 여자친구도 모자라 너까지 잃고 싶지는 않다. 여자친구와는 끝냈지만 너와는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
이것은 어쩌면 사랑보다는 우정이라는 십대의 어설픈 허세같은 거였겠지요. 여자는 순간이지만 친구는 평생지기다. 뭐 그런거요.
제가 한 시간을 고민하며 앉아있는 동안 W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꺼낼지 조금 두려워하긴 했을까요. 아니면, 우리도 그냥 모른 척 지내자, 라고 말했어도 충분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을까요. 어쨌거나 W는 그저 담담해보이긴 했죠.
지금 드는 생각은, 지금 와서 해보는 회상속의 W는,
우리는 계속 친구로 지내자, 라는 저의 말에 옅은 미소를 띠었던 것만 같습니다. W의 속내를 누가 알 수 있겠냐만은.
한동안은 W와 어색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학년 반 배정을 받던 날, W와 함께 같은 2학년 교실로 향하면서, W와는 오래 보겠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친구들 중에, 분명히 친하기는 한데 조금 어려운 친구 있으신가요? 제게는 W가 그런 친구였습니다. 저에게뿐 아니라 같이 다니는 무리에게도 W는 분명 친하고 마음도 잘 맞고 함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마냥 친구같지는 않은, 조금 어렵고 거리감 느껴지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풍기는 느낌 자체가 좀 서늘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들끼리는 평소 대화할 때, 욕을 적지 않게 쓰거든요. 화나서가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이새끼 저새끼 하고, 뭐 ㅈㄴ라는 말도 달고 살고 그러는데, W는 일절 욕을 안했죠. 거기에서 오는 간극이랄까. W가 일절 욕을 안 하니 저희도 덩달아 W에게는 욕을 쓰기가 꺼려지고, 그러다보니 친구긴 한데 조금 어려운 친구, 조심스러운 친구 그런 거였죠.
욕을 안 하는 남자애들이야 종종 있기는 한데, 그런 애들은 보통 상냥하고 다정하거나 전형적인 모범생 이미지가 보통인데(모범생도 욕은 다 하긴 합니다만은) W는 그런 이미지도 아니었죠. 무뚝뚝하고 말도 성의 없게 하고, 표정도 차갑고.
제 글속에서 여러분이 상상하셨던 W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가 실제의 W를 잘 묘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W가 풍기는 느낌을 참 잘 설명해드리고 싶은데 표현력이 딸리네요.
왜냐면, 제가 W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이땐 순수한 의미로) 평소의 W와 나에게 보여주는 W의 상이함 때문이었다고 해아 할까요. 우연히 수업시간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살짝 미소를 짓는다던지, 타인에겐 관심이라고는 없는 애가 내 일에 관심을 가져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언젠가부터 나에게만 한정된 것들인 걸 알고 나니까 우쭐해지더군요. 뭐 선생님한테 더 예쁨 받는 학생의 우쭐함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고요. 다른 친구들과 난 다르다, 그런 거?
그러면서 서로 집에도 놀러가게 되고, 죽마고우 마냥 친해진 것은 확실한데 그 감정이 확연히 우정이라기엔 조금 미묘하게 다른 것이었죠. 이게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만약 여고, 남고를 나왔다면 한 번씩 그런 감정을 겪어보지 않나, 싶은데 어떠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W가 약간 결벽성 비슷한 게 있다고 말했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랑은 다르게 친구들끼리 손잡거나 그런 거 전혀 없거든요. 스킨십이라 해봤자 때리고 치고, 아니면 어깨동무하는 정도죠. 그 중에서도 W는 조금의 스킨십도 정말 질색했거든요. 친구들이 어깨동무를 하면, W는 팔을 딱 걷어내는 그런 애였죠. 좀 유난스럽고 지랄 맞다 싶었지만, 뭐 그런 애도 있고 유난히 스킨십 좋아하면서 장난스럽게 뽀뽀하자느니 하는 친구도 있으니까, 우린 다 그런가보다 했어요.
1학기의 언젠가 체육대회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학교에서 체육대회나, 수련회, 수학여행 이런 건 거의 썸의 향연이라고 할까. 그 땐 선생님들도 남녀 붙어있어도 별 소리 안하고 그랬거든요. 여자애들 반이랑 남자애들 반이랑 같이 합쳐서 경기하는 그런 것도 있었고요.
뭐 반 대항 줄다리기며 릴레이며 했던 것 같은데 그런 것보다도 중간에 장기자랑은 아닌데 공연? 같은 시간이 있었어요. 댄스부 여자애들이 아이돌 춤을 추거나 외국노래에 맞춰 섹시한 춤을 추거나 그랬거든요. 그럼 다들 우르르 몰려서 넋 놓고 춤추는 거 보고 소리지르고 그랬죠. 우리도 남자는 남자인지라, 관중(?) 무리에 끼여서 보곤 했는데 워낙에 질서도 없고 엉망진창이라 좁고 서로 부대끼고 그랬었죠.
저랑 친구들도 댄스부 공연을 보다가 뒷사람들에게 떠밀려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공간도 좁아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저도 중심을 잡으려 그랬는지 왜인지 무의식중에 W 어깨에 팔을 올렸는데 어깨 전체를 감다시피 둘렀죠. W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목을 떨어뜨리고? (다정하게 기댄 그런 건 아닙니다) 보고 있었죠.
음. 그러다가 문득 W를 쳐다봤는데 저도 모르게 좀 빤히 쳐다봤나봐요. 시선을 느꼈는지 W가 저를 쳐다보더라고요. 근데 W는 시선이 마주치면 피하질 않습니다. 같이 빤히 쳐다보죠. 훔쳐본 건 아니지만 제 시선을 W에게 들켜버리니까 순간 몸이 굳더라고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순간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와중에 우리 둘에게만 음향이 나간 느낌이었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조용해진 느낌.
그러다가 제가 먼저 어색하게 웃어버렸죠. 그제서야 제가 W에게 팔을 두르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쳐다 본건가, 싶어서
아, 미안.
하고 감았던 팔을 풀려는데
별로. 상관없는데.
라고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보더라고요. 얘가 워낙 스킨십을 싫어하는 걸 아는데, 상관없다고 하니까 나름의 호의를 베풀어 준 것 같아서 못 떼겠더라고요. 그대로 팔을 두른 채로 공연을 봤는데, 좀 장난을 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제 얼굴은 여전히 W 어깨에 걸터 놓은 채 뒤에서 두 팔로 W 몸을 안았죠. 제 팔에 W 팔이 갇혀있었는데, 전 당연히 뭐하냐고 제 팔을 탁 칠 줄 알았는데, 가만 있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W 반응에, 장난치려던 제가 오히려 당황하긴 했지만, 아닌 척 태연하게 공연을 봤죠.
그 자세로 좀 있다 보니 어이없게도 제 심장이 뛰더라고요. W도 느껴질까 싶어서, 저도 놀래서 W에게서 떨어졌죠.
그 날 이후로 제가 은연중에 슬쩍슬쩍 W에게 터치를 좀 하곤 했었죠. 그 땐 진짜, 이성에게 갖는 그런 감정이라곤 생각도 못 했었죠. 다만 내가 터치할 때만 가만히 있는 W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 걸 제외하면 딱히 저에게 더 친절했던 것도 아니었고.
한번은,
괜히, 이 시계 뭐냐 멋있네, 하면서 W 손목을 잡고 시계를 구경하는 척을 한 적이 있죠. 사실 1학년 때부터 쭉 차오던 시계였는데.
그러자 W가 웃으면서 한 소리 하더라고요. 진짜 시계가 궁금한거냐고.
괜히 제 불순한 의도가 들킨 것 같아서 W 팔을 확 놓으면서, 뭐가. 하면서 전 정색을 했죠.
그렇게 장난치는 척 하면서 W를 좀 귀찮게 굴고, 조금 특별한? 이상한? 우정과는 약간 다른?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지냈던 게 키스하기 전까지였어요. 그 시기가 전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좋아하는 감정 따위인 줄은 전혀 모르고, 친구인데 치대고 싶고 만지고 싶은 그런 친구. 차갑고 냉정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른 친구. 뭐 그 정도.
지금에서보면, 우정으로 포장한 애정의 감정이었던 거죠.
그 당시의 그런 일화는 더 많은데, 저에게만 좋은 기억인 것 같아서 읽으시는 분들은 아무 감흥도 없으실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는 조금 덜 무겁지 않나 싶은데.
약속한 시각이 다가와서, 이제 나가봐야겠네요. 본의 아니게 또 길어진 것 같습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면서 즐거운 한가위 보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