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사건사고들..2편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콜로라도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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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항공기 최악의 인명 참사이자 비행기 탑승 사망자수 역대 2위...

 

 

1985년은 민간 항공업계에서는 흑역사로 꼽는 해이다.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대형 항공 사고가 4 터졌다. 이 해 8월 12일 오후 6시 57분 경 JAL 소속의 도쿄오사카747-SR46/ 항공기 식별번호 JA8119가 도쿄에서 100km 떨어진 군마 현 부근의 다카마가하라 산 능선(오스타카노오네,御巣鷹の尾根)에 추락하여 탑승객 509명과 승무원 15명, 총 524명중 단 4명만이 생존한 참사로 단일 항공기 사고로는 항공 사상 최악의 인명사고이다. 항공기 탑승객 총사망 순위로도 2위.(사망순위 1위는 테네리페 참사로 이쪽은 583명이 사망했다.)

 사고1년4개월전에찍힌사진.

 기체 맨 뒷부분을 확대한 사진

 

당시 승객들은 일본의 추석인 오봉을 쇠러 가는 귀향객이나 여행객들이 많았다 .

 

당일 JAL123편은 하네다 공항을 출발. 예정 대로의 비행을 하고 있었으나 이륙한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에 고도 24000ft 상공에서 큰 폭발음이 들리고 후쿠다 히로시(福田 博) 항공기관사(FE)의 계기판엔 R5(오른쪽 5번째)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된다. FE는 이 도어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고 조종사에게 알린 것이며 경고 50초후에 조종사는 긴급 사태(EMERGENCY)인 '스쿼크 77'을 발신.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면서 하네다 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때 벌크헤드가 날아가고 수직 꼬리날개가 찢겨 날아가면서, 조종타면을 움직이는 유압액이 새어나가 조종 불능에 빠진다. 물론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보통 다중 계통으로 구성하며 747의 유압계통 역시 4개의 채널로 구성. 하지만 JAL123은 불행하게도 4계통 모두 찢겨나가고 말았다.

 

조종불능에 빠진 직후 위와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여 어떻게든 기체를 제어하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자동차 운전에 비유하면 핸들이 고장나서 엑셀러레이터브레이크만으로 운전하는 상황. 그러나 13500 ft(4114.8m)로 강하한 직후, 조종사는 결국 관제소에 조종 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약 30분 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이는 조종이 불가능한 기체의 기수가 위로 들리게 되면 고도는 상승하고 속력은 감소/ 어느정도 속력이 감소하면 기수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고도는 다시 하강, 속력은 상승/ 속력이 붙은 기체의 기수는 다시 위로 향하는 'Phugoid,dutch roll,stoll' 사이클 현상 때문이다

이상 발생 약 30분 뒤 오른쪽 주날개가 지면에 닿으면서(나무에 부딪혔다는 설도 있다.) 기체 후부가 떨어져갔다. 여기서 떨어져나간 후부는 꼬리를 따라 떨어져 충격을 약화시켰기때문에 기적적으로 생존자를 만들 수 있었다. 이 시점에 하네다 공항과 요코타 미군기지 활주로에서는 비상착륙을 준비하였으나 방향타 조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체는 몇 차례 선회하면서 후지산 방향으로 향한다. 계속해서 기수가 오르내리는 가운데 플랩이 상승하면서 결국 양력을 완전히 잃고 기체가 급강하하며 6시 56분 산에 수직으로 추락. 기체는 형체도 없이 파괴되었다. 낙하 직전 상승 하기위해 엔진 출력을 엄청나게 올린 상태로 지면으로 돌파했기때문에 추락 시 속도는 약 350kt(시속 650~700km/h)였으며 그 충격은 수백 G(중력 가속도)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충돌 현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일례로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기장의 시신은 거의 완전히 불타버려 확인가능한 치열 5개만 남은 아래 턱뼈로 신원을 겨우 확인했다.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을 당시 찍은 기내 사진.
아직까지는 기내의 분위기가 침착해보인다.
카메라필름은 무사히 보전됐으나 촬영자는 사망했다.
참고로 사진속 왼쪽 흰 와이셔츠가 요시자키 유우조(향년 38세)
작은딸 유카리(향년 6세) 오른쪽 건너편 아들 미츠요시(향년 9세)는 사망했지만
부인인 히로코씨(당시35세)와 장녀 미키코양(당시8세)은 생존했다.

 

18시 24분경, 기내에선 "펑"하는 충격음이 들린 직후 각 좌석에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으며 "현재 긴급 하강중. 마스크를 착용해주세요"라는 프리 레코더 아나운스가 일본어영어로 방송되었다. 승객들은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 산소 마스크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담배를 끄는 등의 비상 대응을 행했고 일부 좌석에선 수면에 충돌함을 대비해 구명조끼 착용도 이루어졌다. 생존자인 승무원의 증언에 따르면 사태의 심각성은 느끼고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인지할 수 없었으며, 이상 발생 직후부터 낙하할 때까지도 혼란스러운 기색은 거의 없이 승객 전원이 침착히 행동했다고 한다. 18시 30분경, 승객들은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불안정한 상태의 기체 내에서 필사적으로 종이에 유서를 쓰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낙하 사고에선 이상 발생에서 수초~수분의 여유도 없이 바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으나 현 사고에선 30분동안은 비행을 계속 했기때문에 유서를 남길 시간이 생긴 케이스이다.

그 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자세'를 취하였다. 기내 방송으로 유아 동반의 부모에게 아이를 감싸는 방법, 신변물을 확인하고 예고 없이 착륙할 상황도 있음을 알리는 방송 등이 흘러나왔다.

조종실에선 도쿄 항공 교통 관리부를 통해 몇번이나 "조종 불능" 신호를 전했다. 하네다 공항 관제에서 123편의 주파수 변경을 지시하나 조종 불능으로 비행기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네다 관제는 '쿠마가야(熊谷, 사이타마현) 서쪽 25마일'임을 알렸다. 사이타마현의 오타키촌 부근을 비행하고 있던 상태였다. 나가노현 카와가미촌에 진입할 때즈음 오른쪽으로 선회하여 오스타카산 방면으로 향하는데 이 부근에서 농사를 하고있던 사람이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하는 123편을 목격하였다. 목격자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고 비행 상황에 대해 증언하였다.

조종석의 상황은 승무원 사이의 대화로 산소 마스크를 착용할지 말지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마스크를 쓰지않은 채 마지막까지 조종을 하기로 한다. 산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이유는 마스크를 쓰고있으면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기체는 속도와 동시에 엔진의 추진력도 크게 변동하였다. 이미 조종사에 의한 조작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서쪽 570m 떨어진 계곡 너머 다카마가하라의 산등성이에 동체 후부가 꺾인 채 뒤집힌 상태로 돌격한다. 4명의 생존자는 이 동체 후부의 좌석에 앉아있었기에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낙하시 속도는 265노트(시속 490km), 사고 시각은 18시 56분경으로 "이제 안된다!(もーだめだ!)"라는 기장의 마지막 음성과 충격음이 들린 후 CVR가 종료되었다.

 

이후 일본 운수성은 비공개 자료였던 본 기체 조종실의 음성녹음자료를 1999년 11월에 모두 폐기처분하였다고 발표했는데, 누군가가 이를 녹음하여 2000년 8월에 방송국에 공개하여 큰 파장이 일었다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8563967&rtes=y&startDuration=0.64

(조만간 비행기 탈 사람은 절대 듣지말것)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사건사고들..2편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123편의 좌석표. 분홍색이 생존자들의 좌석

 

 

 

당시 주간 아사히의 표지. 주인공은 당시 생존자 4명 중 한 명인 카와카미 케이코.
생존자 4인방중 언론에 가장 집중이 되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30년이 지난 지금 외부 언론과 일절 취재를 거부하며 그 대신 사고당시
야구부 연습때문에 가족들이랑 홋카이도여행을 못간 케이코의 오빠인 카와카미 치하루(2015년 시점 44세) 가 30주년을 맞이하여 겨우 취재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26일 결혼해서 2004년 6월 첫 출산하고 어머니 카와카미 카즈코(사고당시 향년 39세)의 뒤를 이어 간호사를 했지만 언론때문에 육아에도 어려울 뿐더러
당시 기레기들 때문에 등교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생존자는 JAL 스튜디어스 오치아이 유미(당시 26세), 요시자키 히로코(35세)와 장녀 미키코(8세), 카와카미 케이코(12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상태로 발견된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기체에 맨 끝 좌석에 있었기때문에 큰 부상없이 생존할 수 있었다

 

 

마리코, 쯔요시, 치요코. 부디 사이좋게 힘내서 엄마를 잘 도와주거라. 아빠는 유감스럽지만 확실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원인을 알 수 없어. 이제 5분이 지났다. 이제 비행기는 타고 싶지 않아. 제발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공백)
어제 모두 모여 한 식사가 마지막이라니.. 뭔가 기내에서 폭발한 듯 연기가 나고 강하하고 있어. 어디로 어찌되는 건지.
쯔요시 확실히 부탁한 거다. (공백) (아이)엄마 이렇게 될 줄이야 유감이다. 안녕 아이들을 잘 부탁해. 지금 6시 반이다.
비행기는 회전하면서 급속히 강하 중이다. 정말 지금까지는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감사하고 있어.

카와구치 히로츠구(당시 52세), 시체 겉옷의 안 주머니에 있는 메모장에 7페이지 걸쳐 쓰여진 유서.

 

 운항승무원중 사무장보조 쓰시마유미코(対馬 祐三子 당시 29세)가 불시착에 대비해 남겼던 메모.
미친듯이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에서도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도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도와줘. 기분이 안좋아. 죽고싶지 않아. 마리코.

시라이 마리코(당시 26세), 비행 시각표의 여백에

 

사망자들의 일화

 

당시 9세였던 미야지마 켄(美谷島 健) 군은 고시엔이 보고 싶어서 오사카의 친척집을 방문하려 혼자 비행기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일본항공에서는 당시 어린이 VIP라고 해서 승무원이 현지 공항에서 보호자에게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켄 군의 어머니 미야지마 쿠니코(美谷島 邦子 당시 38세) 씨는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친척들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준다는 이야기에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아이를 혼자 보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고. 이에 혼자 아이를 보냈다는 죄책감,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아이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지에 대한 자책 등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이 여성은 몇 번이나 죽으리라 결심했으나 분명 자신처럼 자책감에 살 희망을 잃어버린 유족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유족들에게 위로 전화를 돌렸고 이것이 후일 812연락회라는 유족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이 여성은 30년이 지난 2015년에도 생존 중이며 군마현의 산 속에 있는 아들의 위령비 앞에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과 과자를 사서 놓아둔다 한다.

 

 

'위를 보며 걷자'로 아시아인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사카모토 큐도 이 사고에 휘말려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더욱 안타까운 건 지인의 선거유세차 오사카로 향한 것인데 늘 이용했던 전일본공수의 여객기에 탑승하려했지만 하필 만석이라 할 수 없이 123편에 탔다가 변을 당했다.

 

이 사고로 당시 한신 타이거즈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도 목숨을 잃었는데, 때문에 한신 선수들이 우승 의지를 불태워 그 해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창단 50년만의 첫 우승이자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사망한 나카노 사장의 영전에 바친 선물인 셈(나카노 사장은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후 사망하기 하루 전날까지 경기를 마치고 로커로 돌아오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했었고,그의 사고 소식을 접한 선수들의 충격은 아주 컸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 사고 이후로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들은 일본 3대 도시권에서 이동 거리가 너무 먼 홋카이도/큐슈/도호쿠/오키나와 경기 및 해외 전지훈련 이외에는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으며, 오키나와와 해외 훈련을 제외한 세 지역은 선수 자율로 신칸센 등을 이용하여 이동하고 합류하는 것도 허용한다.

 

한국인 희생자는 3명이다. 故안시오(安時燠 당시 52세) 故정순덕(鄭順德 당시 47세) 밑에 기타항목에 故이혜경(李惠慶 당시 21세) 이며 안시오씨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계속 살다 사고 발생 10년전부터 계속 한국을 왔다갔다하며 송이버섯 수출상을 하였다.이후 사고발생 5년전인 1980년 부인 오공순씨(사고당시 나이 32세)와 결혼하여 슬하에 장녀 안희경양(당시 4세) 차녀 안연정양(당시 3세) 아들안도영군(1세)를 두고 있었으며 송이버섯수출민 지문날인문제로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고 오봉을 지내기 위해 오사카의 친척집으로 가던도중 변을 당했다. 그리고 정순덕씨는 당시 큰딸인 정화양(당시28세)과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서 의류상을 했었다. 실제로 故정순덕씨는 전 영화배우 최지희씨의 친척인데 일본 도쿄 아카사카에 터를 잡은 최지희씨의 초청으로 큰딸과 의류상을 했었으며 작은딸 영화씨(당시 24세)는 한국에서 유치원교사를 했었다. 정순덕씨의 여동생 정영순씨(당시38세)는 일본에 있는 조카 정화씨로 부터 정순덕씨가 오사카에 수금하러 지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이같은 변을 당했다고 들으면서 울먹였다고 한다.

 

이후 사고원인을 분석한 결과  추락한 항공기는 사고 7년 전 1978년 6월 2일 이타미 공항에 착륙중 테일 스트라이크(착륙이나 이륙중 과도하게 기수를 들어올려 꼬리부분이 활주로에 부딪히는 사고)로 후미에 손상을 입어 제작사인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벌크헤드라고 부르는 비행기의 기압을 유지하는 격벽이 손상을 입어 일본 항공에서 수리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런데 보잉의 기술자(정비 총담당자)는 이를 수리하면서 규정상 두 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하도록 한 것을 한 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만으로 고정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태도가 나중에 대참사를 부르게 된다. 이후 계속된 비행에 따른 기압 변화로 인한 금속피로를 이기지 못해, 이 벌크헤드가 터져나가버리면서,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를 날려버렸고, 이 때 방향타면을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의 분배기인 토크 박스를 터트려 유압이 새어나가게 되었고 결국 유압과 조종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사실 78년 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한 동체의 변형이 수리 후에도 남아 사고 직전까지 캐빈 뒤쪽의 화장실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든다든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등의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당연히 정상 기체가 아니며 벌크헤드가 터지지 않았더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고가 날 기체였다. 이를 폐기처분하지 않은 일본 항공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뒤늦게 일본 측은 사고 원인 조사 후 보잉을 형사고발하였으나 기각당했다. 일본 항공은 피해자 측에게 총 7억 8천만엔을 배상하였으며 회장은 퇴임하였다.

그리고 자만한 태도로 520명의 목숨을 떠나가게 한 정비 총담당자는 죄책감을 못 이기고 자살하였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