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성병 검사 받는 여자

검객201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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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21년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가난한 집안의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야채 등을 파는 작은 가게를 했다. 가정 상황이 어려워서 학교는 못 다녔다. 

 

만 열여섯살 되던 1937년이었다. 정읍에 사는 김씨가 나에게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면서갈 것인지 물었다. 나는 친한 친구인 옥희와 함께 가기로 마음 먹었다. 
옥희와 함께 김씨를 따라서 정읍역에 가보니 3명의 여자가 있었다. 김씨는 우리를 일본 사람에게 넘기고 사라져버렸다. 
그후에는 일본 사람을 따라서 북만주로 들어갔다. 만주의 끝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지명은 잘 모르겠다. 그곳에 내리니까 날씨가 몹시 추웠고 군인들이 아주 많았다. 

 

우리 5명은 일본군 부대 주변의 천막촌에 들어갔다. 천막집에는 이미 조선 여자들이 30명 정도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군인한테 식사를 날라주는 일을 하면서 일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하루에 5, 6명, 많을 때는 10명 정도의 군인들을 상대했다. 군인을 상대하는 곳은 다다미를 깐 좁은 방이었다. 초기에는 많이 울었다. 일본말을 모른다고 맞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군인의 마음에 안 들면 군인들은 욕하며 때렸다. 나는 군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인들은 콘돔을 사용했다. 위안부들은 1주일에 1번 시내에 있는 병원에서 성병검사를 했다. 성병에 걸리면 약을 많이 먹었고 606호 주사도 맞았다. 같이 간 5명 중에 한 명 외에는 다 죽었다. 매독이 걸려 죽은 여자도 있었다.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니 큰 동생이 누나 온다는 소리를 듣고 지게를 던지고 맨발로 달려왔다. 부모님은 내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 부모님에게는 중국에서 식모살이를 했다고 말했다.  
같이 나온 옥희는 애기도 못 낳고 시집도 못 가니 저나 나나 혼자 살자고 했다. 가끔 놀러와서는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똑같다고 붙잡고 울기도 했다. 내게는 그 당시 일로 자식을 못 낳는 것이 한이다.

 

----------------------------------------위 글은 위안부 피해자인 오오목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충분한 배상을 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고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경덕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일본이 이미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에 충분히 배상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니

전체 일본 국민들의 생각은 어떤지 안 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8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남은 한국인 생존자는 47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