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이러저러 좋은 글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10대-30대 여성 위주의 사이트인 만큼 아이돌이나 결혼, 가정사에 대한 글들이 많아진 것 같네요.
입사 대기 중에 학창 시절부터 존경하던 여러 여성들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카테고리를 어디로 설정할까 하다가 그래도 학생 여러분들의 직업 선택이나 롤모델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10대 이야기로 정했습니다. 위인들은 많고 제 시간은 짧아 유달리 좋아하던 분들만 올리는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컴맹이라 사진 올리는 법을 모르는 바 글로만 소개합니다. 순서에 대한 기준은 없으니 재미 삼아 읽어주세요.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 기억, 각종 백과사전, 네이버캐스트에 기인합니다. 막말로 짜깁기임.
Fortune 출신의 사진 작가이자 한국 전쟁 당시 종군 기자로도 활동했다. 뉴욕 태생의 폴란드 유대인의 핏줄이며 사진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코넬대학에서 수학하던 때로 알려져 있다. 이후 컬럼비아대학의 클라렌스 화이트로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에 관해 사사 받았으며 특히 건축 시설이나 산업 시설의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9년 버크 화이트는 헨리 루스가 창간한 <포춘(Fortune)>지에 새롭게 합류하면서 이 잡지의 전속 사진가 겸 편집차장이 된다. 1930년에는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촬영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다. <포춘/Fortune>지에 연재된 그녀의 소련의 산업 현장 사진들은 산업 사진을 다룬 이 분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 결과물을 따로 엮어 '러시아 견문(Eyes on Russia)'을 1931년 출판하였다.
세계 경제 대공황 이후 정치학에 뜻을 두게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에 관한 이슈를 접하기 시작했고 1937년 그녀의 남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어스킨 콜드웰과 함께 '당신은 그들을 보았다'를 발표한다. 이 책은 미국 남부 지역의 지독한 레이시즘(racism)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항거이자 비난이었다.
스스로 커리어를 이어 나가며 사진에 대한 경험과 불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을 꿈꾸며 종군 기자 혹은 종군 사진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거나 미국내 흑인 예술가들에 대한 차별 대우에 대한 항의, 유럽에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외국인 저널리스트로는 유일하게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그곳에 있었고, 독일군의 모스크바 최초 공습 광경과 스탈린을 촬영하는 등 특종을 기록하며 명성을 더욱 높였다.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공군을 위해 종군 기자로 활동하고 여성 저널리스트 최초로 전투기에 탑승, 폭격 작전에 동행했다. 애초 여성이라는 선천적 지위에 무관하게 물불 안 가리는 성격 때문에 한동안 버크 화이트는 필자의 이상형이 되었다.♡
한국 전쟁의 취재는 버크 화이트 생애 최고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대립 속에서 그녀가 주목한 것은 이념의 종착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과 3세계의 강자 타산적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 전쟁 중 신촌의 한 숙소에서 그날의 작업들을 정리하던 중 뇌염에 걸렸던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켜 파킨슨씨을 앓게 되었다. 그녀는 1959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뇌 절개수술을 받는 등 병마와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1971년 미국의 코네티컷에서 사망한다.
2. Marie Curie(마리 퀴리/ 폴란드 이민자 가정 출신의 마리 퀴리, 결혼 전 남편 피에르 퀴리의 성을 따르기 전의 본명은 Maria Salomea Sklodowska 마리아 살로메 스클로도브스카)
1867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통제 하에 문화, 언어, 주권에 대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마리 퀴리가 열 살 되던 해인 1878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 퀴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마리는 언니와 다짐했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은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벌어 학업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다음 언니가 학업을 마치면, 이번에는 언니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따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 퀴리는 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1891년 그녀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소르본 대학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파리 제4 대학을 지칭하지만 실제로는 1-3-4 대학을 총칭하는 개념이며 그녀의 전공이었던 물리학은 현재 파리 제6, 11대학에서 교육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파리 6 대학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귀중한 업적을 받들고자 그들의 이름으로 상찬되어 현재 퀴리 대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에서 그녀는 후일 남편이 될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되고 1895년 결혼한다. 프랑스 내에서는 이들이 주고 받은 편지의 한 구절이 아직까지도 회자된다고 하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생각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프랑스에서 인광 방출 현상(우라늄을 포함한 광석이 특징)이 발견됨에 따라 마리 퀴리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한다. 이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마리 퀴리는 우라늄보다 더 강한 빛을 내뿜는 원소를 발견하고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 명명한다. 방사능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도 마리 퀴리이다. 방사능을 강하게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03년 인광 방출 현상의 발견자인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때 연설문에서 훗날 원자 폭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아인슈타인의 심정으로 라듐의 위험성 또한 함께 알렸다. 아인슈타인과 마리 퀴리는 엮이는 점이 꽤 많다. 여하간 노벨상 수상 3년 후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소천하면서 슬럼프에 빠지는데 그의 죽음 이후 불륜에 대한 심각한 추문이 돌아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되는데 시발 지금이나 예전이나 입 함부로 놀려서 사람 몰아가는 년놈들은 철저하게 단죄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날 가져요 마리찡. 그녀는 남편의 자리를 이어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된다.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 화학상을 모두 받았는데 1903년 물리학 수상은 방사성 원소의 발견과 방사성 물질에 대한 공헌으로 1911년의 화학 수상은 라듐의 원자량 측정에 대한 연구의 연장선인 금속 라듐의 분리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은 것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마리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마리는 세상을 떴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폴란드 출신 유대계 프랑스인 여성 과학자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동료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마리 퀴리를 이렇게 애도했다. “퀴리 부인은……과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시대 최고의 여성 연구자로 인정받았다……라듐의 발견과 분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듐은)……일반적으로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늘리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더욱이 라듐은……암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순수한 성격과 개성을 지닌 그녀를 존경하는 전세계의 많은 동료들은 지식의 성장과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 복지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 퀴리 자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었다. “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고, 두 딸을 두었지요. 연구는 프랑스에서 했어요.”
1995년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유해는 판테온 묘지(프랑스의 위인으로 인정 받는 자들 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로 이장되는데 마리 퀴리는 최초로 남편의 업적이 아닌 자신의 성과로써 판테온에 하관되는 영광을 얻었고 이는 여성 최초에서 나아가 이민자 출신의 과학자가 숱한 프랑스 꼰대들의 눈총을 밀어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도 판테온은 남성의 전유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오늘은 폴란드인들이 유난히 많은데 내가 러시아랑 동유럽 쪽을 많이 좋아하긴 함.
마거렛 미드도 쓰려다가 친구가 술 먹자고 전화 와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음. 치킨이 날 기다린다 시발.
심심해서 쓰는 존경하는 여성 롤모델들 1편
판은 경상여고 탈출기 이후로 굉장히 오랜만에 접속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러저러 좋은 글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10대-30대 여성 위주의 사이트인 만큼 아이돌이나 결혼, 가정사에 대한 글들이 많아진 것 같네요.
입사 대기 중에 학창 시절부터 존경하던 여러 여성들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카테고리를 어디로 설정할까 하다가 그래도 학생 여러분들의 직업 선택이나 롤모델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10대 이야기로 정했습니다. 위인들은 많고 제 시간은 짧아 유달리 좋아하던 분들만 올리는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컴맹이라 사진 올리는 법을 모르는 바 글로만 소개합니다. 순서에 대한 기준은 없으니 재미 삼아 읽어주세요.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제 기억, 각종 백과사전, 네이버캐스트에 기인합니다. 막말로 짜깁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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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garet Bourke-White(마가렛 버크 화이트)
Fortune 출신의 사진 작가이자 한국 전쟁 당시 종군 기자로도 활동했다. 뉴욕 태생의 폴란드 유대인의 핏줄이며 사진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코넬대학에서 수학하던 때로 알려져 있다. 이후 컬럼비아대학의 클라렌스 화이트로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에 관해 사사 받았으며 특히 건축 시설이나 산업 시설의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9년 버크 화이트는 헨리 루스가 창간한 <포춘(Fortune)>지에 새롭게 합류하면서 이 잡지의 전속 사진가 겸 편집차장이 된다. 1930년에는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을 촬영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다. <포춘/Fortune>지에 연재된 그녀의 소련의 산업 현장 사진들은 산업 사진을 다룬 이 분야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호평을 받았고 그 결과물을 따로 엮어 '러시아 견문(Eyes on Russia)'을 1931년 출판하였다.
세계 경제 대공황 이후 정치학에 뜻을 두게 되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에 관한 이슈를 접하기 시작했고 1937년 그녀의 남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어스킨 콜드웰과 함께 '당신은 그들을 보았다'를 발표한다. 이 책은 미국 남부 지역의 지독한 레이시즘(racism)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항거이자 비난이었다.
스스로 커리어를 이어 나가며 사진에 대한 경험과 불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을 꿈꾸며 종군 기자 혹은 종군 사진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녀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거나 미국내 흑인 예술가들에 대한 차별 대우에 대한 항의, 유럽에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외국인 저널리스트로는 유일하게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그곳에 있었고, 독일군의 모스크바 최초 공습 광경과 스탈린을 촬영하는 등 특종을 기록하며 명성을 더욱 높였다.
세계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미국 공군을 위해 종군 기자로 활동하고 여성 저널리스트 최초로 전투기에 탑승, 폭격 작전에 동행했다. 애초 여성이라는 선천적 지위에 무관하게 물불 안 가리는 성격 때문에 한동안 버크 화이트는 필자의 이상형이 되었다.♡
한국 전쟁의 취재는 버크 화이트 생애 최고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대립 속에서 그녀가 주목한 것은 이념의 종착이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과 3세계의 강자 타산적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 전쟁 중 신촌의 한 숙소에서 그날의 작업들을 정리하던 중 뇌염에 걸렸던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 일으켜 파킨슨씨을 앓게 되었다. 그녀는 1959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뇌 절개수술을 받는 등 병마와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1971년 미국의 코네티컷에서 사망한다.
2. Marie Curie(마리 퀴리/ 폴란드 이민자 가정 출신의 마리 퀴리, 결혼 전 남편 피에르 퀴리의 성을 따르기 전의 본명은 Maria Salomea Sklodowska 마리아 살로메 스클로도브스카)
1867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통제 하에 문화, 언어, 주권에 대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마리 퀴리가 열 살 되던 해인 1878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 퀴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마리는 언니와 다짐했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은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벌어 학업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다음 언니가 학업을 마치면, 이번에는 언니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따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 퀴리는 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1891년 그녀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소르본 대학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파리 제4 대학을 지칭하지만 실제로는 1-3-4 대학을 총칭하는 개념이며 그녀의 전공이었던 물리학은 현재 파리 제6, 11대학에서 교육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파리 6 대학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귀중한 업적을 받들고자 그들의 이름으로 상찬되어 현재 퀴리 대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에서 그녀는 후일 남편이 될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되고 1895년 결혼한다. 프랑스 내에서는 이들이 주고 받은 편지의 한 구절이 아직까지도 회자된다고 하는데 대강의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생각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고 프랑스에서 인광 방출 현상(우라늄을 포함한 광석이 특징)이 발견됨에 따라 마리 퀴리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한다. 이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마리 퀴리는 우라늄보다 더 강한 빛을 내뿜는 원소를 발견하고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 '폴로늄'이라 명명한다. 방사능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도 마리 퀴리이다. 방사능을 강하게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03년 인광 방출 현상의 발견자인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때 연설문에서 훗날 원자 폭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아인슈타인의 심정으로 라듐의 위험성 또한 함께 알렸다. 아인슈타인과 마리 퀴리는 엮이는 점이 꽤 많다. 여하간 노벨상 수상 3년 후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소천하면서 슬럼프에 빠지는데 그의 죽음 이후 불륜에 대한 심각한 추문이 돌아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되는데 시발 지금이나 예전이나 입 함부로 놀려서 사람 몰아가는 년놈들은 철저하게 단죄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날 가져요 마리찡. 그녀는 남편의 자리를 이어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된다.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 화학상을 모두 받았는데 1903년 물리학 수상은 방사성 원소의 발견과 방사성 물질에 대한 공헌으로 1911년의 화학 수상은 라듐의 원자량 측정에 대한 연구의 연장선인 금속 라듐의 분리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은 것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마리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마리는 세상을 떴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폴란드 출신 유대계 프랑스인 여성 과학자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동료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마리 퀴리를 이렇게 애도했다. “퀴리 부인은……과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시대 최고의 여성 연구자로 인정받았다……라듐의 발견과 분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듐은)……일반적으로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늘리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더욱이 라듐은……암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순수한 성격과 개성을 지닌 그녀를 존경하는 전세계의 많은 동료들은 지식의 성장과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 복지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 퀴리 자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었다. “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고, 두 딸을 두었지요. 연구는 프랑스에서 했어요.”
1995년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유해는 판테온 묘지(프랑스의 위인으로 인정 받는 자들 만이 묻힐 수 있는 묘지)로 이장되는데 마리 퀴리는 최초로 남편의 업적이 아닌 자신의 성과로써 판테온에 하관되는 영광을 얻었고 이는 여성 최초에서 나아가 이민자 출신의 과학자가 숱한 프랑스 꼰대들의 눈총을 밀어냈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도 판테온은 남성의 전유지라는 느낌이 강하다.
오늘은 폴란드인들이 유난히 많은데 내가 러시아랑 동유럽 쪽을 많이 좋아하긴 함.
마거렛 미드도 쓰려다가 친구가 술 먹자고 전화 와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음. 치킨이 날 기다린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