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팔 소재로 한 웹툰, 드라마 긴급 제안 (5)

강가딘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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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2013 남용한의 서재.

 

기억 속 사진에 찍혀 있던 인물들을 확인해야겠다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 집에 와버렸다. 혹시나 했는데 아직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했지만 덕분에 문제없이 빈 집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바로 서재로 직행해서 앨범을 찾아 들자마자 나지막하게 실내화 끄는 소리가 났다.

아차! 집이 비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이 시간에 집에 누군가 있을 줄이야!

그제서야 후회가 됐다. 그깟 호기심 따위 개나 줘버릴 걸!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긴 머리 여자가 서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예상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던 점은 그야말로 다행이었지만, 아버지와 단 둘이 있을 땐 윤비서가 저런 모습일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기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뒤틀리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나는 둘 사이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역시 현실에는 나의 빈곤한 상상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19금 영화를 훔쳐본 사춘기 소녀처럼 야릇한 상상이 날개를 펼치려던 찰나, 윤비서는 아버지가 집에 없다며 같이 스테이크를 먹자고 말했다.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내가 왜 당신과 식사를 해야 하느냐는 말은 내 마음 속에만 울려 퍼졌다.

순응도 습관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윤비서의 말에 따라 앨범을 제자리에 넣고 부엌으로 향했다. 마치 퇴물 엔카 가수의 디너쇼장에 앉아있는 현장감을 누리며 식탁 앞에 앉아 윤비서의 일본 풍 목욕가운의 등 부분에 프린트 된 대나무 사이 호랑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싸구려 취향의 백퍼 made in china 가운이라니! 역시 비서틱한 취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윤비서가 어디 온천 여행이라도 갔다가 그 곳에 비치되어 있던 가운을 챙겨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절대로 어디서 팔거나 할 물건이 아니다.

아무튼 그 키치 취향의 그림 속 호랑이 새끼를 보고 있던 중, 아버지에게 나는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팡지게 반항하는 새끼 호랑이! 하지만, 아버지에게 연약한 고양이의 탈을 쓴 윤비서 쪽이 훨씬 더 위험한 게 아닐까? 위험한 호랑이에게는 거리를 두지만 귀여운 고양이는 안아주다가 그 발톱에 상처를 입게 되거든!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쯤, 윤비서가 와규 스테이크에 하얀색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접시를 식탁에 놓으며 앉는다. 익숙한 2인용의 상차림을 보니 집구석에서까지 연장 근무를 시작한 게 어제 오늘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갑자기 두 사람의 피임 여부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일단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내 빈곤했던 상상력의 포텐이 터져버렸고, 왜 그게 사내 아이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낳은 사내 아이, 그 아이가 엄마 뻘인 나에게 누나! 누나! 부르며 힘차게 뛰어올 것만 같은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나는 그만 식탁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나, 갈게요!

내가 왔다 간 거 아버지에게 말하건 말건 상관없지만, 이 일로 전화 오는 건 사양이에요! 저녁 잘 먹었습니다! 윤비서님!”

 

내 말에 대해 윤비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어떤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 정도로 내게 경황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상황 설명이었다.

 

남용한.

2013 남용한의 집.

 

생각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이번 강마담 건으로 청탁을 넣었던 언론사 데스크들과 방송국의 거물급 몇몇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보험사와 조인한 I.S.U. 조직의 당위성과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 밑밥을 깔아놓는다는 게 메인 목적이긴 했지만, 핫이슈로 떠올랐던 일명 양아들 살해 사건 여론몰이에 대한 답례 차원의 술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윤비서를 배제시켜야만 하는 자리였다.

물론 공적으로 처리되는 접대비 식음료비 영수증을 보면 오늘의 동선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강마담 사건에 내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당장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윤비서가 집에서 혼자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각 매체의 실세들과 나는 석학 노암 촘스키 교수의 이론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있었다.

 

매스미디어의 ‘합의된 조작’으로 우매한 대중에게 방향성을 제시하여 효율적인 국가 경영에 이바지하는 우리의 헌신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결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자는 유력 매체 데스크의 주사에 가까운 발언을 듣자마자 나는 일행들에게 아듀를 고했다.

물론 일행들보다는 업소에서 배정해 준 내 파트너가 훨씬 더 섭섭해 했지만 나는 원래 그런 사람도 아닐 뿐더러 집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윤비서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할 배짱도 없었다.

킬러 한 같은 어둠의 인맥 몇몇 말고는 거의 대부분의 인맥들과 내 스케줄 대부분을 꿰고 있는 윤비서가 기다리다 지쳐 내 운전기사를 압박한다면 오늘 이 모임을 알아내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오늘 저녁, 나는 이 잘난 애국자들의 모임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은 다 하고 나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있어도 그만, 사라져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계산은 미리 끝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일찌감치 기사를 퇴근시킨 탓에 내 파트너의 배웅을 받으며 업소에서 불러준 모범택시에 오른다. 사별한 고위직이니 안방이라도 꿰차고 들어가 보라는 언질을 받았을 이 아이가 아까부터 줄기차게 귓가에 속삭여대는 보랏빛 유혹을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요새는 옛날 같지 않아서 언제 이 천사 같은 얼굴을 한 아이가 인터넷에 나타나 나와의 잠자리에 대한 전지적 시점의 에로 소설을 발표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매정하게 차 문을 닫아버렸다. 물론 팁은 이미 충분히 지불했으니, 이 업계에 내가 쪼잔하다는 소문은 나지 않을 것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잠깐 졸다가 내가 왜 내 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있는 이유를 잠깐 생각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다음, 앞으로 다른 놈들한테는 그냥 돈으로 때워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술자리나 골프 회동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맥을 넓혀가고 꼭 이뤄야 할 미션을 클리어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제는 내 몸도 챙겨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지난달에 위암으로 요단강을 건너간 유의원처럼 모든 것을 다 이루어도 제 몸 하나를 건사 못 하고 죽어버리면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근래 자주 든다.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윤비서가 옷을 차려입고 현관에 나와 서 있다.

오랜만에 제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시 어물쩡거리는 사이 윤비서는 내가 타고 온 택시를 되짚어 타고 휭하니 떠나버렸다.

내가 지금 누구 모친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하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윤비서가 이번 프로젝트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지 않는가?

연좌제도 아닌데 그녀 탓이 아닌 것이다. 이번 일은.

역시 아까 잠깐 졸고 난 덕분에 내 정신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온 것 같다. 집 안에 들어와 물 한잔을 마시는 데 건조대 위에 놓여진 식기들이 왠지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1인용이 아니라 2인용, 그것도 반찬도 각각 담아낸 흔적이었다.

저녁에 나름 소식을 강조하는 윤비서가 저녁을 두 번 먹었을 리도 없고, 목포댁이 윤비서에게 밉보여 쫓겨나듯 그만 둔 뒤부터 가끔 오는 도우미 아줌마가 오는 날이 오늘인가? 만일 그렇다쳐도 도우미 아줌마와 윤비서가 겸상을? 평소 윤비서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어볼 성격의 사건도 아닌 것이 내가 윤비서에게 무슨 의처증이라도 발동시켰다고 의심을 받을 것 같아 말을 꺼내기도 어색하다.

 

어색한 정황이 또 발견되었다.

언제였지? 내가 처음으로 윤비서의 잠자리로 스며들어갔던 그 밤, 윤비서가 입고 있던 유카다가 빨래통과 빨래통 뚜껑 사이에 쑤셔 박혀 있었다.

나름 윤비서가 아끼는 아이템이라고 알고 있어서 내 취향에는 너절해보여도 뭐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저 옷을 저렇게 막 구겨서 던져놓은 것을 보면 뭔가 심경의 변화를 보일 일이 있었던 걸까? 이상하다!

윤비서가 내게 이런 당혹감을 주려고 일부러 저렇게 떡하니 2인 분량의 식기를 올려놓고 저 옷을 막 던져놓고 가버린 걸까?

사실 그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윤비서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 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예전에 윤비서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을 때, 내가 무서운 얼굴로 명령해서 겨우 산부인과에 보냈다. 하루 종일 울다가 수술을 마치고 온 그 날 이후, 오늘 같은 눈빛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래! 그냥 이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잊어야겠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넘쳐나는데, 나 남용한이가 식기 건조대 위에 놓여있는 저 2인 분량 접시나 싸구려 취향의 유카타 따위에 집착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남보라.

2013 남보라의 집.

 

문자가 왔기에 아버지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핸드폰을 열었다.

윤비서가 기어이 아버지한테 일렀구나! 전화는 사양한다는 말을 문자는 받아들이겠다는 말로 해석하고 얼씨구나! 장문의 문자를 보냈을 테지!

안 봐도 비디오, 빤하디 빤한 사람들!

 

그러나 뜻밖에 브레드 박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연락처를 알려줬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그치의 I.S.U.명함이 눈에 들어온 순간 바로 해답이 나왔다. 그리고 내가 그치의 명함을 가지고 있으니, 그치가 내 명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건 아니지!

혹시라도 작업성 문자일 거라는 생각은 백만분의 일 정도밖에 하지 않았지만, 만일 그랬더라면 바로 실망하고 또 절망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업무적인 톤으로 ‘알고 지내는 여중생이 이러한 메일을 보냈으니 한 번 읽어보고 내일 사무실에서 미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퇴근 후에 업무적인 연락은 피해달라는 답 문자를 보내, 내 사생활의 존엄성을 강조해주었다. 지나치게 사무적인 인상을 준 건가 싶어서 답 문자가 오기 전에 재빨리 같잖은 농담을 덧붙였다. 그 여중생과는 원조 교제 중인 거냐고.

 

30초 정도가 지난 후, 원조교제라는 단어를 구글에서 검색한 브레드 박으로부터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냐며 가슴 벅찬 비난 문자가 날아왔다. 시트콤 대사를 다큐로 받다니, 이게 꼭 그 짝이라 그렇게 한마디 하려다가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서둘러 사과한 후 대화를 쫑냈다.

아버지 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 남자와의 문자 전쟁으로 풀어볼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그러기에는 내 불쌍한 지성과 미모가 서울역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대성통곡을 할 것만 같아 참기로 한다.

다만 앞으로 이 인간하고는 농담 따먹기를 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라는 룸훈을 내 원룸 벽면 잘 보이는 곳에 적어놓을 것을 다짐하며 침대로 슬라이딩했다.

 

양이사.

2013 한국보험사.

 

내가 출근하기 전에 내 방, 이사실 책상 위에 5대 일간지와 3대 경제지가 펼쳐져 있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의 관습이다. 이제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나 핸드폰의 액정 화면으로 뉴스를 접하지만 나는 반대다. 이렇게 막 찍어낸 잉크 냄새나는 종이 뭉치들을 한꺼번에 떠들어보고 있노라면 우리 대한민국의 언론이 정한 오늘의 이슈가 내 눈에 그 실체를 보여주곤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보험사는 공적 기관으로서의 공공성이라는 저 끝과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사기업으로서의 이 끝 사이에서 예술적인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오늘의 언론 이슈는 아주 중요하다.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러 3대 인터넷 포털마다 I.S.U. 검색어를 쳐보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고 온 종이 두께를 보면 보기에도 상당량의 기사들이 연달아 출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겹치거나 심지어는 쉼표까지 똑같은 기사들이 각 포털마다 빠지지 않고 I.S.U.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게 묻는다면 우리나라 언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결론이다. 두고 봐야 알겠지만 금감원 정도의 기관, 아니면 그보다 더 위의 권력 기관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대중이, 현명하신 국민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목 놓아 외치면서도, 속마음으로는 대중의, 국민의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어르신들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끄떡없는 매스컴의 프레지던트들이 수사권을 가진 보험범죄조사기관인 I.S.U.가 양지로 나와 활동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미 금감원에서 이 조직의 비용을 대고 안 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I.S.U.라는 언론 총아의 활용도를 어떻게 높이느냐에 따라 우리 한국보험 같은 일개 보험사 한 해 수지를 나타내는 색깔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은송이.

2013 인천.

 

저 은송이예요!

오랜만이네요? 빵 일병님!

 

장일도.

2013 I.S.U.

 

밝은 인사말 두 줄로 시작된 은송이라는 아이의 메일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브레드 박 요원의 펜팔 친구이며 여중생인 은송이는 학교에서 명품 걸로 소문이 나 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심지어는 봄방학을 마친 개학식 날부터 외국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셀프 자랑질로 또래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리고 그 때마다 현지에서 명품 가방, 명품 옷, 하다못해 지우개까지 명품 브랜드 제품으로 준비해서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거짓말이었고 해외에서 직접 구매했다는 명품들은 사실 엄마 손을 잡고 가까운 백화점에서 사 온 물건들이었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사실 된장모녀라고 욕이나 한 사발 뱉어버리면 해결될 수 있을만한 내용이었지만, 은송이는 자신이 몇 년 전부터 방학 때마다 외국에 나간다고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해야만 했던 이면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송이의 엄마는 송이 앞으로 여러 개의 어린이 보험을 들어놓고, 방학 때마다 엄마와 함께 잘 아는 병원에 동반 입원을 해왔던 것이다.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는 엄마의 입원비 일당보다 오히려 송이가 받을 수 있는 보험금 입원비가 더 많다보니 방학이면 방학, 징검다리 휴일이면 휴일마다 송이의 엄마는 송이의 손을 붙잡고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향했던 것이다.

 

송이는 방학 때마다 친구들도 전혀 만나지 못하고 학교에서 주최하는 어떠한 방학 행사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퇴원하자마자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준 명품 선물을 증거로 친구들에게 거짓 해외여행 무용담을 늘어놓아야 했다. 해외여행 스토리는 서점에서 사서 읽은 해외여행 책자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내용을 줄줄이 외워 지어내면 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까지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줬다고 한다.

브레드 박과 펜팔을 시작하게 된 위문편지를 쓸 때에는 거짓 없는 진짜 자기 얼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엄마가 이혼을 한 후 아빠로부터 약속받은 자신의 양육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송이 학생은 입원을 요구하는 엄마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행태는 중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번 방학 동안 잘 아는 사무장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이틀 앞둔 어느 날, 송이는 병원 사무장과 엄마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 것이다. 송이 엄마가 보험금을 노리고 멀쩡한 척추 수술을 받으려 한다는 내용의 대화였다. 송이는 며칠 동안 혼자 고민을 한 끝에 브레드 박에게 이러한 내용을 의논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브레드 박이 보내준 편지를 통해 경찰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무장의 꼬임에 넘어가 엄마 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학교생활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다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나는 송이 엄마가 척추 수술을 받지 않도록 엄마를 좀 말려달라는 어린 송이의 진심어린 메일 내용에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송이 엄마가 오히려 어린 송이보다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브레드 박을 제외한 우리 팀원들이 그동안 이보다 더 끔찍하고 대단한 가족 간 보험 범죄 실제 사건들을 자주 보아왔으니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힘을 합쳐 이번 사건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처리하자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내 두 눈과 귀를 의심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남보라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조대우.

2013 I.S.U.

 

나는 누나가 우는 걸 처음 보았다.

직원들 사이에서 낙하산으로 소문이 나서 왕따를 당할 때도 눈도 깜짝하지 않던 람보라 누나였다. 얼마 전 정비소까지 낀 조직폭력배 서넛과 드잡이질을 했다며 온 몸에 멍투성이였을 때도 오히려 다른 직원들은 걱정하는데 정작 본인은 실실거리며 웃기만 하던 누나였는데 오늘은 왜 울었을까?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도 메일로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은송이 학생의 IP주소와 그 모녀의 관련 계약들에 대한 자료들을 뽑아보겠다는 핑계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누나를 보는 브레드 박의 눈빛이 그 전과는 사뭇 달라지는 것을 봤다. 역시 여자의 눈물은 남자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아침이다.

 

브레드 박.

2013 I.S.U. 회의실.

 

사실 지난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은송이가 그저 밝고 귀여운 친구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예전의 나처럼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외로운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펜팔 초기 내가 별 생각 없이 미국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다가 돌아가시고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써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부쩍 말투가 살가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남보라씨는 내가 근무 시간이 아닌 개인적인 시간에 연락을 하는 실수를 범했음을 감안하더라도 나를 원조교제나 할 만한 파렴치한으로 몰아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모욕감은 내가 쉽게 잠들지 못했던 요인 중 하나이다. 내가 잠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떻게 해야 은송이 모녀를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송이가 걱정되는 이유는 메일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은송이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가는 중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는 게 좀 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이 늦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무튼 통화가 불편한 상황이려니 마음을 가라앉힌 후, 송이에게 안심하고 곧 도와주러 가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놓았지만 지금까지도 메일을 열어본 흔적이 없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팀원들과 함께 메일 내용을 분석한 후, 대응 방안을 결정하려고 아침 회의를 서두른 것이다. 물론 나를 쓰레기 취급한 남보라 씨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수를 쳐도 유분수지 은송이의 메일 내용을 읽고 나더니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팀원들 하나둘 자리를 뜨더니, 어느새 넓디 넓은 회의실에는 남보라 나, 이랗게 둘 만이 남아 있었다.

의리 없는 조대우... 장도일 과장님도 크게 나을 것 없다.

그렇게 나가버릴 거였으면 나한테도 눈치를 줘야 할 거 아닌가!

둘만 남은 상황에선 남보라 혼자만 남겨놓고 나가기도 뭐하게 되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티슈를 두어 장 뽑아다가 남보라의 손에 쥐어줬다. 그랬더니 빨개진 눈으로 나를 보며 고맙다고 말하는 데, 맙소사! O.M.G!

 

나는 애니메이션 속 장화 신은 고양이 실사판을 오늘 아침 회의실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