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팔 소재로 한 웹툰, 드라마 긴급 제안 (6)

강가딘201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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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2013 복도.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장일도 과장님을 만났다.

아까 눈물을 흘린 일이 창피해서 묵례만 하고 지나치려는데 굳이 또 불러 세우는 건 또 뭘까? 설마 오늘 내가 마법에 걸린 걸 아시는 걸까? 직장 생활을 워낙 오래 하신 분이니 내가 한 일과 내 호르몬이 시킨 일을 구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화장실에 CCTV를 설치해놓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화장실에 좀 오래 있었다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아채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파우치 속에 날개 달린 그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나 막상 내가 들은 말은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장일도 과장님은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잘 계시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평소에 신봉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아버지는 잘 계시다고 대답했다. 뭔가 또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 것일까? 장일도 과장님도 별 수 없이 금감원을 갑으로서 숭배하는 분들 중의 한 분이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는 차에 연이어 말씀이 들렸다.

 

“흠... 내가 아버님하곤 안면이 좀 있지! 그럼!”

 

역시 그랬구나! 그 안면을 강조하기 위해 그 사진틀을 책상 위에 재배치하셨을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아 들어갔어!

 

“내가 남보라씨 아버님하고 안면도 있고 나잇대도 엇비슷하고 그러니까... 흠!”

 

어쩌라고?

 

“어려운 일, 곤란한 일 있으면 나한테 의논하고 그래도 돼!

오늘 컨디션 안 좋으면 하루 휴가 처리해도 되고!”

 

맙소사! 역시 눈치 채고 있었어!

여우같은 과장님!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은송이 메일 건도 처리해야 하구요!

조대우 씨가 주소하고 위치 파악해 주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과장님은 끝까지 매너 있게 오늘은 운전 안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져갔어. 사실 오늘이 내 생리예정일은 아니었지만 이게 다 사실 윤비서 때문이다. 어릴 때 내 첫 번 째 생리 후에도 목포댁 아줌마가 아닌 윤비서가 씻겨줬고, 장미와 향수를 곁들인 성교육 초심자용이라고 할 만한 내용의 이야기도 윤비서의 입을 통해서 처음 들었지. 자기가 내 보모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내 새엄마가 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늘 그런 식이었고 그런 윤비서에게 내 정신은 늘 거세게 반항했지만, 내 몸은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곤 해서 나를 곤혹스럽게 하곤 했어.

윤비서의 케어를 받는 동안 윤비서의 생리 주기를 내가 따라가곤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달이 지구를 돌며 지구의 공전을 따라 돌듯 내 달걸이도 윤비서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후 나는 내 몸에게 아주 많이 실망했었지.

 

어제도 내 몸은 윤비서의 마법 체취를 간파해냈고 그 때문에 예정되었던 내 주기가 며칠 더 빨라졌으니 오늘의 이 유혈 사태는 다 윤비서 때문이오! 이것이 오늘 아침의 중요한 내 뽀인트야!

 

브레드 박.

2013 엘리베이터 안.

 

조대우씨가 은송이의 주소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이름과 위치, 마지막으로 연결되었던 핸드폰 위치를 알아내는 데에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고, 남보라와 나는 곧바로 은송이의 집과 학교를 1,2차 목표로 하여 인천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과장님께는 전화 보고를 드리기로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마주 보고 선 남보라와 내 사이에는 전과 다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남보라의 얼굴에 장화신은 고양이가 출현한 다음부터 쭉 계속된 긴장감이다. 어떻게 하면 좁은 차 안에서 은송이의 학교가 위치한 인천까지 어색하지 않게 갈 수 있을 것인가?

정 어색해지면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라도 따라 부르며 가야겠다.

 

남보라.

2013 주차장.

 

마침 과장님 지시도 있었겠다, 당연히 후배가 운전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조수석 문을 열려는데 막상 브레드 박도 운전석 쪽이 아닌 조수석 쪽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 키를 넘겨주려했지만, 내 손이 무안하게도 이놈은 키는 받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바로 운전을 할 수 없다며 내 말을 잘라먹는다,

시간도 없는데 실랑이하기도 귀찮고, 그냥 내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천하에 왕재수, 뺀질이 같으니라고!

아까 그나마 경황이 없을 때 눈물 닦으라고 티슈를 챙겨주기에 매너 있는 후배구나 싶었는데, 선배보고 인천까지 운전하라는 걸 보면 싸가지가 바가지인 것 같다. 운전을 왜 못하겠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시답잖은 이유 같으면 올 때 운전을 시키던가 아니면 지 혼자 지하철 급행을 타고 오라고 해야겠다.

I.S.U. 차량의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은송이와 관련된 목표 지역 근방의 CCTV와 연동시켜 놓은 조대우의 컴퓨터와의 연결을 확인하자마자 주차장을 나섰다.

 

2013 도로.

 

좁은 차 안에 브레드 박과 단 둘이만 있는 상황이 좀 어색해서 운전 중에 짬짬이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어제의 원조 교제 참사를 감안하여, 최대한 가벼운 분위기는 자제하고 업무적이고 지적인 소재로 상사답게 과감히 부하 직원과의 벽을 허물어 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브레드 박에게 물은 첫 질문은 무난하게 업무적으로 “은송이와는 펜팔 친구라고 했는데 그럼 처음엔 어떻게 편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였다. 해병대에 있을 때 처음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로 시작했단다.

위문편지? 요즘도 그런 게 있느냐고 했더니 그냥 멀뚱히 쳐다본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백치미 폭발이다. 한국말 잘 모르냐고 핀잔을 줬더니 냉큼 그렇단다.

역시 빠다 냄새가 좀 난다했더니 유학파인가 보다. 설마 어학연수로 몇 달 필리핀 다녀와 놓고 저 한국말 잘 못해요!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지금 은송이 나이 때 쯤 도미해서 10년 넘게 살았단다. 시민권자냐고 물었더니 포기했단다.

해병대 입대하고 경찰이 되기 위해 미국 시민권도 포기했다고 한다.

해병대 출신의 미국 유학파 남자라...

흥! 다른 여자들 같으면 혹하고 넘어갔을만한 조건이지만 나는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뭐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는 일단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조건들보다 나는 남자가 박력 있게 운전하는 모습이라던가, 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불도저 같은 모습에 끌린다고나 할까?

차 키를 줬을 때 물러서는 남자는 완전 별로다.

더구나 앞으로 이렇게 같이 차를 타고 드라이브... 아니 출동을 나가게 될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그때마다 매번 상사인 내가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부하직원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운전을 못한다고 하냐고. 진짜 운전 못하는 거 맞느냐고. 미국에선 다들 고등학교 때 라이센스 따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속사포 랩처럼 묻고 났더니 왠지 좀 쪽 팔린다.

운전을 좀 하긴 하는데 뉴욕에서 자라서 그 주의 운전면허증만 있단다.

그래? 그러면 한국에서도 면허증을 딸 생각은 왜 안한 건데?

아니면 국제 면허증 신청을 하던가! 그게 말이 돼?

가만! 뉴욕? 뉴욕이라고?

그럼 그 비슷하게 생긴 큐트 보이가 바로 이 놈이었다는 말인가?

설마! 분명히 큐트 보이는 중국계나 베트남계였지 한국계가 아니었다고!

한국계였다면 내가 그렇게 한국말로 말을 걸어줬는데 모른 체 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일행들 다 꼬드겨서 티셔츠랑 우산을 몇 개나 팔아줬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로 혹시 뉴욕에서 무슨 장사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길거리에서 우산 파는 노점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는 브레드 박의 대답은 한 조각 남은 내 자제력을 도로 위로 날려 보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서 땀이 나고 눈앞에 불이 나는 게 도저히 운전을 계속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도움을 고대하고 있을 은송이를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듣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뉴욕에서 있었던 일은 이제 모두 추억 속에 묻어버리고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다는 따위의 같잖은 멘트를 연달아 몇 개 날린 구여운 후배 놈은 입을 닫고 고개까지 돌려버린다.

힐끗 보았더니 먼 하늘만 보는 척하면서 조는 것 같기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음악 볼륨을 조금 높여줬다.

 

다시 냉정하게 업무적인 부분으로 돌아가서 은송이와 은송이 엄마에 대한 건을 묻기로 했다.

지금 우리가 인천에 가서 은송이와 송이엄마 사건을 보험범죄로 처리하게 되면, 수술을 권유한 병원도 문제이지만 송이 모녀도 그동안 받았던 보험금 대부분을 반환해야 하는 것은 물론, 보험사기로 처벌받게 될 것이 확실한데 펜팔 친구로서 괜찮겠냐고 물었다.

의외로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늦게나마 바로잡아야 이번처럼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멀쩡한 척추를 수술하는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그 쪽이 송이에게도 더 낫다는 대답이었다. 거기에 계속 송이엄마가 송이를 이런 방식으로 키운다면 아동학대에 해당될 수 있고, 그 경우 법원 판결에 따라 슬프지만 송이 엄마의 친권과 양육권을 제한하거나 박탈시킬 수 있다고 덧붙이는 브레드 박, 뉴욕의 큐트 남!

 

잊고 있었다. 이 남자, 대한민국 경찰에서 I.S.U.에 파견 나온 형사라는 사실을! 뉴욕에서 나를 봤던 일은 꿈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심한 브레드 박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꽤 오래된 트로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구성진 노래가 끝나고 잠깐의 정적에 그가 하는 말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내 귀에 꽂혀왔다.

 

“돌아가신 엄마가 참 좋아하시던 노래였는데...”

 

이제야 말이지만 내가 아까 은송이 사연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건 사실 호르몬 탓이기도 했지만 은송이의 편지 내용이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꽤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지내셨던 엄마 모습에 송이 모녀의 모습이 상상으로 오버 랩 되며 주변 시선도 상관없이 눈물샘이 폭발했던 거였는데, 이 인간이 또 왜 내 눈물샘을 저격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가볍게 짜증이 났다.

하지만, 솔직히 브레드 박과 나와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솔직히 그에 대한 어색했던 마음도 조금은 풀리고 용서와 화해심이 샘솟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부터 목적지까지는 나도 대화 자제를 결심하고 막히는 도로만 바라보며, 우리가 뉴욕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밝혀야 내가 좀 더 쿨한 여자로 보일 수 있을 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건 처리하고 돌아올 때도 별 수 없이 내가 이 인간을 옆 자리에 고이 모신 채 기사 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미래지향적인 생각에 휩싸였다. 나의 마법은 언제쯤이나 되어야 이 인간한테 통할 것인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 것인가?

내 질문에 맞던 틀리던 누가 좀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브레드 박.

2013 도로.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내고 막 인천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차 안에 흐르던 정적을 깨고 조대우의 목소리가 남보라와 내 사이를 날카롭게 갈랐다.

실제 상황! 실제 상황!

곧바로 네비게이션 화면이 조대우가 모니터하고 있는 CCTV 화면으로 바뀌며, 한 여중 앞을 비추고 있었다. 화면 안에서는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한 여학생을 두 명의 건장한 남성이 잡아끌며 등교를 막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톨게이트만 나가면 5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긴 한데, 그 때까지 저 여학생 혼자 남자 둘을 상대로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때, 조대우가 모니터상의 여학생의 얼굴을 확대, 캡쳐하여 은송이의 사진과 함께 비교 시스템에 넣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바로 그 여학생이 내 펜팔 친구 은송이였던 것이다.

 

운전석을 보니 남보라는 이미 람보로 변신하여 이 차에는 왜 사이렌과 경광등도 없느냐고 난리치며 엑셀을 냅다 밟고는 있지만 그래도 시간을 맞추기엔 어림없어 보였다.

나는 최대한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깔며 남보라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했다.

 

남보라.

2013 도로.

 

생각보다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은 모니터 화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조대우가 실시간으로 최대한 빠른 길안내를 해주고 있었고, 나 남보라가 진짜 람보가 되어 밟고 있는데 브레드 박이 글쎄 차를 세우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귓등으로나 듣고 엑셀을 쌔려 밟고 있는데, 이 미친놈이 핸드 브레이크까지 올려가며 난동을 부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모니터를 보니 여전히 은송이는 두 명의 남자에게 납치를 당하고 말 것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브레드 박이 운전석으로 오기에, 이제서야 이 힘든 선배 대신 직접 운전대를 잡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으로 알고 조수석으로 피해주었다.

바로 그때, CCTV 화면에는 은송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출현, 조금은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그 여자까지 두 남자와 합세하여 주차시켜 둔 병원차 쪽으로 은송이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브레드 박은 운전대를 잡더니 내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운전의 달인이 되어, 달리는 차들을 뒤로 제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근처의 순찰차가 접근하여 주행속도위반이라며 차를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브레드 박은 사이렌마냥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찰 신분증을 좌우로 흔들어대는 것이 아닌가?

와! 갑자기 브레드 박의 옆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가 겁나게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

순찰차는 우리 차를 세우는 대신 I.S.U. 로고가 박힌 우리 차 앞에서 사이렌을 울려가며 길을 터주었고 송이가 곤경에 처해있는 학교까지의 소요시간은 대폭 줄어들었다. 그러는 동안, 모니터 속에는 체육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중생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우르르 밀려나와 은송이를 납치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은송이로 확정되는 소녀를 끌어당겼고, 삼선의 체육복을 입은 이가 앞장서서 세 사람에게 뭐라고 호통을 치며 은송이를 구해냈다.

천만다행으로 우리의 은송이가 납치를 면한 순간, 차는 모퉁이를 돌았고 CCTV 화면에 보이던 학교 앞 도로가 저만치에 보이기 시작했다.

 

체육교사.

2013 운동장.

 

나는 여자중학교의 체육교사다.

아무래도 여학교인데다가 젊은 남자 선생이다 보니,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나름 인기도 실감하고 있다. 가끔은 괜히 결혼을 일찍 했나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보야! 사랑해! 미안해!

 

여기까진 사실 쓸데없는 얘기고 진짜는 지금부터다.

오늘 2교시에 운동장에서 뜀틀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저만치서 살짝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한 녀석이 아직까지 등교하지 않은 은송이가 교문 앞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왔으면 냉큼 들어올 것이지 뭐하고 있나 싶어 나가보려는데, 같은 반 아이들이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교문에 가까워질수록 실랑이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저만치 여학생 하나를 성인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이 차량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 꼭 영화에 보았던 납치 장면을 연상시켰다.

그 모습에 놀란 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얼른 그 손 놓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 다음에는 반 아이들이 내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뛰어가서 그 어른들로부터 송이를 떼어놓았다. 내가 제일 먼저 뛰어가서 그들을 제압하고 싶었지만, 올 초에 작심했던 금연에 실패해서인지 깨끗한 폐를 자랑하는 내 제자들보다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잘못하면 다른 아이들까지 그 어른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앞으로 나섰다.

나는 민망한 트레이닝 복 차림임에도 불구하고, 태극 3장 자세를 취하며 1대 3이지만 납치범들에게 절대 꿇리지 않는 결연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 여자 납치범이 나를 보고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송이 엄마예요!”

 

제기랄! 이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더 깜짝 놀란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마치 TV나 영화에서처럼 경찰차 두 대와 형사가 탄 것으로 보이는 차량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학교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아이들과 어른 셋 주위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마치 미국 드라마에서 범인 체포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젠장 할!

 

병원 사무장.

2013 학교 앞.

 

나는 병원 사무장이다.

사실 명함에는 사무장이라고 박혀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병원 오너이다.

최근 몇 년 전까지 국가 면허를 취득한 의사들만이 병원을 소유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명 페이 닥터, 즉 병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페이, 월급만 받는 의사를 법적인 병원 오너로 내세우고 병원 영업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요즘에는 병원도 글로벌 시대다, 대형화 추세다 해서 경쟁도 무지 치열하고 한 마디로 병원 장사도 이제 한 물 간 상황이다. 고정비는 어마무시하고 병원 수익을 올려주는 환자들은 점점 다른 병원이 빼앗아가고 해서 결국 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보험사기 전문 병원으로 거듭나기로 말이다!

방학 때마다 우리 병원을 찾아주는 송이 엄마 같은 우수 환자들에게 특별 조건으로 아무도 모르게 별 이상이 없는 척추 부위에 칼을 대서 후유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그 대신 우리 병원, 아니 나 병원 오너가 수술비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환자와 국민의료공단으로부터 받아내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도랑 치우고 가재 잡는 어메이징한 시스템인 것이다.

환자는 환자대로, 가입한 보험에서 거액의 후유 장애 보험금을 받아 좋고 우리 병원은 병원대로 매출을 올려서 좋고!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한참 잘 나가던 상황에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 아침 출근도 하기 전에 받은 송이 엄마의 전화에 의하면 어리다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송이가 우리끼리 비공식적으로 맺어두었던 비밀유지협약을 깨버렸다는 것이다.

지네 엄마와 내가 수술할 필요도 없는 허리뼈를 수술할 거라는 말을 듣고는 아 글쎄! 경찰인지 해병대인지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에게 메일을 보내 시시콜콜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은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우리 병원에서 가장 힘이 세고 무섭게 생긴 최 간과 내가 송이를 찾아가 달래고 얼러서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 수밖에.

그 핑계로 등교 거부 투쟁을 하던 송이가 웬일인지 학교에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는 송이 엄마의 연락을 받은 우리는 송이가 다닌다는 여학교 정문 앞에서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 다음 벌어진 일들은 진술서에도 다 나와 있으니 정 궁금하신 분들은 그 쪽 서류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은송이모.

2013 경찰서.

 

나는 은송이의 엄마다. 은송이모라고 썼지만 이모가 아니라 엄마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지만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진리를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도 엄마인 나를 걱정해서 보험사기 신고메일을 보낸 거라니까, 그 갸륵한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다.

경찰서에 왔다.

송이, 병원 사무장, 나 거기다가 최 간호사까지.

나란히 앉아 조사를 받았다.

우리 송이가 요즘 맨날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I.S.U.인가 하는 보험범죄전담반 소속 경찰과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애다, 우리 송이가!

 

암튼 그 핫라인 경찰한테 조사를 받는데, 처음엔 무조건 아니라고 우겼다. 예전에 병원 치료 받은 것도 다 보험사기 아니라고 우기고, 앞으로 수술 일정도 없다고 우겼다. 그랬더니 그 핫라인 경찰이 계속 우기면, 송이 친권과 양육권을 다 뺏길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생긴 건 트릿하게 생겨가지고 겁주는 스킬은 험상궂은 형사님들 찜쪄먹겠는구나.

이쯤 되면 대응 매뉴얼 버전을 바꿔야만 한다. 최대한 납작 기면서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불어야 내가 살 수 있다. 송이랑 나랑 세트로 불쌍하게 보여야 봐 줘도 좀 봐 줄 것이 아닌가?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바보였나 보다.

결국 나는 다 털리고, 진술서에는 그동안 사무장과 내가 저질렀던 사기 행각이 모두 드러나 버렸다.

요즘 애들 말로 우리 모녀, 폭망한 것이다.

 

남보라.

2013 경찰서.

 

이 남자!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한다.

 

그동안 나도 꽤 많은 경찰들과 협업을 해봤지만 브레드 박이 확실히 현장 장악력이 있는 편이다.

예전엔 경찰에 가서 보험범죄사실을 신고하면 담당 형사가 정해지는데도 한 세월, 수사 진척 상황은 오리무중, 결과가 나오려면 해가 바뀌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이번 건은 I.S.U.의 이름을 걸고 해결하는 첫 번째 케이스라서 그런지 아주 스피디하게 논스톱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나는 오늘 여러 가지 일로 놀랐을 은송이를 다독이고 안심시키는 후방 업무로 물러나줬다.

어제 메일을 보냈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말하자마자, 핸드폰이고 뭐고 다 압수당하고 오늘은 늦게나마 겨우 등교하려는 데 저 되먹지 못한 어른들이 나타나서 밀고 당기고 난장판을 벌여놨으니, 이제 겨우 중학생인 어린애가 얼마나 놀랐을까?

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생각하면 이번 일이 이 아이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브레드 박에게 ‘신고’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두 모녀가 그동안 써버린 보험금 수천만 원을 보험사에게 반환하고, 게다가 벌금까지 물게 되어 생활고에라도 시달리게 되면 언제라도 그 생각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브레드 박을 원망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브레드 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송이의 눈빛을 보면, 앞으로 영원히 송이가 브레드 박을 원망하는 그런 일은 안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브레드 박이 무슨 아이돌이라도 되는 듯이 뚫어지게 보고 있는 송이의 초롱초롱한 눈빛 광선을 보면 말이다.

 

장일도.

2013 I.S.U.

 

인천에 간 팀에게서 은송이양 모녀 보험사기 사건과 관련하여 병원 사무장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의 진술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현지 경찰의 협조를 얻어, 사건 해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고 한다.

이게 모두 그동안 I.S.U.의 탄생과 그 필요성을 알리는 데 불철주야 힘을 쓴 내 덕이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 할 뿐이다. 그래도 고생한 브레드 박과 남보라에게 늦더라도 귀사할 것을 지시하고, 조대우에게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마누라! 나 좀 멋져 보이지 않나?

 

조대우가 잔뜩 부은 얼굴로 금감원에서 온 공문 하나를 갖다 준다. 계속 입이 그렇게 댓 발 나와 있으면, 파견 근무를 취소하고 보험사로 돌려보내겠다고 하니, 불만에 가득 찼던 얼굴이 대번에 존경심 가득한 얼굴로 바뀐다. 순진스럽게도 내가 자기를 뽑아왔다는 뻥을 아직 믿고 있는 눈치다. 공문은 보험사들의 협찬을 받아 TV에 내보낼 I.S.U. 홍보 캠페인 영상을 제작하라는 내용이었고, 홍보 모델 건은 우리 I.S.U.에 일임하겠다고 한다.

 

아침 내내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생긴 듯 싶다.

 

남용한.

2013 서울.

 

지난 번 술자리에서 내가 언론사 중진들에게 I.S.U.의 필요성을 어필해 놓은 덕에 관련 기사들이 좋은 방향으로 나오고 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던가? 내친 김에 TV용 홍보 영상까지 제작해서 돌리라고 했다. 물론 경비는 각 보험사 갹출이다.

전자 결제 시스템으로 올라온 보고서를 보니, 벌써 우리 보라가 속한 팀이 인천 쪽에서 제보를 받아 사건을 해결하고 이미 진술서 자백까지 마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I.S.U.가 생각보다 빨리 궤도에 오르는 것 같아 뿌듯하다.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권에 뛰어들겠다는 내 복안이 현실화되는 것 같아서 더더욱 마음에 든다.

지금 현재로서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 바로 윤비서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화가 났는지, 간단한 옷과 화장품 등속을 챙겨서 자기 집으로 가버리더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돌아와 달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난감하다.

오늘 오후에는 생리 휴가를 냈던데, 설마 정말로 생리통 때문에 생리 휴가를 낸 것은 아니겠지?

 

I.S.U. 장일도에게서 생각보다 빨리 홍보 캠페인 제작 플랜이 돌아왔다. 벌써 홍보 모델까지 확정해서 올려놓았다. 나는 당연히 내 의중을 짐작해서 우리 보라를 홍보 모델로 올리면 못 이기는 척 사인해주려고 했더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은송이라고 하는 여중생이다.

어디 요새 드라마에 나오는 아역 이름인건가, 그런 자잘한 건 윤비서가 알겠지. 그런데 중요한 건 수백만 원 대의 홍보 모델비를 받는 I.S.U. 모델 일을 이 어린 친구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역 탤런트라면 더 인지도를 높여서 좋은 배역을 따낼 수도 있을 테고, 아무튼 좀 더 자세히 따져 묻고 싶지만, 장일도와의 대화는 피하고 싶다. 그 인간과 엮이는 일은 아주 격렬하게 피하고 싶다. 그래서 그냥 대충 결제해주기로 했다.

잘났다! 장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