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7. ‘바람’으로 탄생한 최초의 ‘시민’ 대통령 ⑶
대모달2015.10.17
조회55
● 정권 초기의 시련, 개혁의 발목을 잡는 내우외환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받았다. 취임 첫날부터 한나라당이 국회 특검법안을 의결하여 압박하는가 하면 김영진 농림부 장관, 김두관 행자부 장관,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등 4명의 장관이 집권 초기에 물러나야 하는 등 야당의 파상공세가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노무현은 새삼 정치개혁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3월 7일 참여정부 국정토론회에서 ‘개혁정부’를 천명한 노무현은 정치·행정·권력기관·언론 등 각 분야의 개혁구상을 표명했다.
정국은 거대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족벌신문들의 악의적인 딴죽으로 초장부터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여기에 여당인 민주당은 ‘개혁정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복잡한 당내 사정으로 난맥상으로 보였다. 대통령 중심제는 본질적으로 행정부와 국회가 모두 국민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는 ‘2중 정통성(dual legitimacy)’의 구조로서 양대 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하여 마련된 정치체제다. 선진국처럼 국회의원들의 성숙한 모습이라면 별 탈이 없지만, 의원들이 지역주의와 파당주의에 매몰되면 국회가 행정부의 견제를 넘어 위협을 가하게 된다. 그 반대로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국회가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거대 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취임 첫날부터 ‘가시 돋힌 꽃다발(특검법안)’을 선물로 보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 이에 족벌신문들이 가세하여 개혁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민주당은 여소야대의 취약성과 리더십, 개혁의지의 부족으로 야당에 끌려다니는 형국이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개혁세력 일각에서 신당 창당이라는 비상의 카드마저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취임 초부터 정치개혁에 관심을 보였다. 지역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가장 우선순위를 국회의원 선거구제의 개혁에 두었다. 박정희 정권의 호남차별과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야합 이후 더욱 심화된 국회의원 선거의 지역별 독과점 현상은 지역주의의 진앙이 되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것을 시정하자는 것이 노무현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노무현은 4월 2일 임시국회 시정연설에서 “2004년 총선부터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17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 내각의 구성권한을 양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정치발전과 동서화합을 위해 선거법을 고치면 과반의석 정당에 내각 구성권을 주겠다는 것은 대통령의 핵심권한을 내놓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갓 대통령에 취임한 자신의 권한을 크게 축소하더라도 정치발전의 토양이 되는 지역갈등의 벽을 허물겠다는 신념에서 이같은 제안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야당 분열책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배격했다.
노무현은 이어서 12월 17일에는 국회의원 전원에게 서한을 보내 중대선거구제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 제안 역시 국회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한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정치권은 정치발전과 지역적 갈등 해소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대통령의 ‘헌신적인 제안’마저 거부한 것이다.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영남과 호남 지역기반 정치인들은 지역주의 구조에서 말뚝만 박아도 당선이 보장되는 제도를 굳이 바꿀 생각이 없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자신의 임기 연장이나 권력의 강화를 위해 헌법에 ‘손질’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수차례씩 변칙적 개헌파동을 일으키고 전두환은 ‘상왕제 개헌’을 시도하려다가 6월 민중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이명박까지 임기 후반에 개헌론의 불씨를 지폈으나 여당에서조차 호응을 얻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임기 초에 자신의 권한을 대폭 넘겨서 권력을 분점하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물론 노무현의 파격적인 제안은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힘든 여소야대의 구도에도 말미암은 바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취임하고 보니 국회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장악한 여소야대 국회였다. 그래도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부지런히 만났지만 쉽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한나라당은 대북송금특검법을 단독 처리했고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윤성식 감사원장 인준을 부결시켰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만 열리면 차례로 나서서 대통령을 인신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의원 총선은 다가오는데, 여소야대에서 벗어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연속 패배하고서도 확고한 지지율 1위를 유지했다. 총선에서 지고 나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야 할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선될 경우 야당이 과반수를 가진 국회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식 동거정부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했다. 여소야대 국회의 연장을 예고하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이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4쪽.
그래서 집권 초기에 내놓은 그의 선거구 개편을 전제로 한 ‘동거정부’ 제안은 변변한 토론조차 거쳐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한참 지난 2005년 7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토론만이라도 해보자고 했다. 이 제안은 정계를 뒤흔든 폭풍이 되었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집권 초기의 제안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내용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 제안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족벌언론들이 이번 제안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아귀처럼 물어뜯고 나섰다.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과 일부 진보언론들마저 ‘정략적’ 인식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우리 나라 정치의 고질 자체를 치유하고자 하는 노무현의 큰 뜻을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무현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면 총리를 국회의 다수연합이 추천하게 하고 내각을 지휘할 실질적 권한을 주는 것이다. 거저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도 또는 중대선거구제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하려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정치를 지역구도가 아닌 정책구도로 재편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는 덤으로 따라올 것이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5쪽~286쪽.
노무현은 실천적 이상주의자 성향이 강한 편이다. 현실 정치인이면서 그의 뇌리에는 이상적인 정치개혁의 꿈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초법적인 변칙이 아니고는 다수 국민이 바라는 방향으로 정치구도를 바꾸기 어려웠다. 현역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줄여서라도 이를 성사시켜보고자 했으나 정치인들은 콧방귀만 뀌고, 자신은 실없는 사람, 경망한 지도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정치인이 대권을 장악하면, ‘권력의 화신’이 되기 마련인데, 노무현은 거꾸로 권력을 내놓으면서까지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노심초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었다.
● 열린우리당 창당 막전막후
2003년 5월 16일, 민주당 신주류는 워크숍을 갖고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가칭)’을 발족하는 등 신당 창당에 착수했다. 이에 맞서 구주류는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이를 매도하면서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신당 창당을 주도하는 신주류와 이에 반대하는 구주류, 당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는 중도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6월 16일에는 신·구주류가 당무회의에서 폭력사태까지 빚게 되고, 이를 계기로 신주류의 신당 추진 핵심인사 28명은 7월 3일 전체 회의를 열어 김원기 고문을 의장으로 하고 국회의원 60명이 포함된 신당 추진 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신당 추진과 때를 같이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이우재·김부겸·안영근·김영춘 의원이 합세하고, 재야인사들이 속속 참여함으로써 신당파는 적잖은 세를 이루게 되었다. 신당 창당에 대한 전당대회 소집 안을 놓고 다시 신·구주류 사이에 거친 욕설과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등 폭력사태가 연출되었다. 민주당은 신·구세력의 감정대립으로 더 이상 한솥밥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민주당의 신당파는 9월 4일 당무회의에서 전당대회 소집 안 의결이 무산됨에 따라 김원기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민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민주당을 집단 탈당해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선관위에 등록하는 등 본격적인 창당 절차를 밟았다.
이 무렵 노무현은 언론사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갈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개혁되기를 바라는데 개혁을 찬성하는 사람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것”이라며 신당 추진을 사실상 추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구주류의 한화갑·박상천·조순형·추미애 의원 등은 “민주당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민주당의 신당파는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로 김근태 의원을 선출했다. 신당파 의원 40여명은 9월 20일 민주당 탈당계를 내고, 한나라당 탈당파 5명과 함께 ‘국민참여통합신당(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를 공식등록했다. 이어서 10월 22일에는 통합신당 주비위원회가 원외 신당세력인 개혁신당창당추진위원회와 공동회의를 갖고 범여권 신당의 당명을 ‘열린우리당(약칭 우리당)’으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은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대의원과 참관인 및 각계 인사 1만 5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벌인 창당대회에서 김원기·이태일·이경숙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위원 150명으로 구성되는 임시지도부를 발족시켰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1년여 만에 잔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부터 당적 문제를 조속히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아온 노무현은 ‘우리당’이 창당되기 전인 9월 29일 민주당을 전격 탈당했다. 이날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회의에서 “나의 당적 문제가 소모적인 정치공세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주당 당적을 포기하겠다”며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주요 국정과제 및 경제·민생문제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으로 한동안 ‘여당 실종’ 상태가 되었다. 이와 관련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은 “앞으로 노 대통령은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국정책임자로서, 국회의 권한을 존중하면서 정부와 국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나갈 것”이며 “국회의원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통령중심제의 정당체제에서 대통령의 무당적 상태는 대통령과 야 3당 간의 대립이 심화될 경우 자칫 정부 제출 법안의 처리 표류 가능성 등 부작용이 예상되었다. 노무현으로서는 한동안 정치적으로 여당이 없는 ‘정치적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했다.
노무현은 비주류 정치인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까닭에 대선 뒤에도 당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정치적 리더십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민주당의 분당으로 인해 호남과 수도권의 지지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배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잔류 민주당의 김성순 대변인은 “대선 당시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한 민주당원 및 지지해 준 국민과 아무런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탈당한 것은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민주당의 분당사태에 대해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어 알려진 부분이 있다고 진술했다.
˝2003년 민주당이 분당되었다. 당 개혁안을 놓고 대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회의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져 40여 명의 개혁파 국회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다. 나는 민주당의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개혁당과 한나라당 탈당파, 시민사회 세력을 통합한 전국정당으로 거듭나주기를 원했다. 대통령이 영남 출신인만큼 국민들이 보기에 만족할 만한 혁신을 하면 지역구도를 조금은 무너뜨릴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민주당을 분당시키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민주당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나와서 신당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것을 수용했을 뿐이다. 지역주의 타파, 깨끗한 정치, 정당민주주의 실현을 내건 열린우리당의 가치와 지향이 옳다고 보아서 그 신당을 지지했을 뿐이다. 내가 그런 정당을 원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이 대통령의 지시나 배후 조종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 것은 인정할 수 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5쪽.
대통령 노무현에게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 등은 그의 역할이나 본의와는 상관없이 집권 초장부터 지지층의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지지기반이 비좁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盧武鉉) 평전(評傳)』7. ‘바람’으로 탄생한 최초의 ‘시민’ 대통령 ⑶
● 정권 초기의 시련, 개혁의 발목을 잡는 내우외환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받았다. 취임 첫날부터 한나라당이 국회 특검법안을 의결하여 압박하는가 하면 김영진 농림부 장관, 김두관 행자부 장관, 최낙정 해양수산부 장관, 윤진식 산업자원부 장관 등 4명의 장관이 집권 초기에 물러나야 하는 등 야당의 파상공세가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노무현은 새삼 정치개혁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3월 7일 참여정부 국정토론회에서 ‘개혁정부’를 천명한 노무현은 정치·행정·권력기관·언론 등 각 분야의 개혁구상을 표명했다.
정국은 거대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족벌신문들의 악의적인 딴죽으로 초장부터 안정을 찾기 어려웠다. 여기에 여당인 민주당은 ‘개혁정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복잡한 당내 사정으로 난맥상으로 보였다. 대통령 중심제는 본질적으로 행정부와 국회가 모두 국민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는 ‘2중 정통성(dual legitimacy)’의 구조로서 양대 기관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하여 마련된 정치체제다. 선진국처럼 국회의원들의 성숙한 모습이라면 별 탈이 없지만, 의원들이 지역주의와 파당주의에 매몰되면 국회가 행정부의 견제를 넘어 위협을 가하게 된다. 그 반대로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국회가 행정부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거대 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취임 첫날부터 ‘가시 돋힌 꽃다발(특검법안)’을 선물로 보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고, 이에 족벌신문들이 가세하여 개혁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민주당은 여소야대의 취약성과 리더십, 개혁의지의 부족으로 야당에 끌려다니는 형국이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개혁세력 일각에서 신당 창당이라는 비상의 카드마저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취임 초부터 정치개혁에 관심을 보였다. 지역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가장 우선순위를 국회의원 선거구제의 개혁에 두었다. 박정희 정권의 호남차별과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야합 이후 더욱 심화된 국회의원 선거의 지역별 독과점 현상은 지역주의의 진앙이 되고 있었다. 한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것을 시정하자는 것이 노무현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노무현은 4월 2일 임시국회 시정연설에서 “2004년 총선부터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면 17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 내각의 구성권한을 양보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정치발전과 동서화합을 위해 선거법을 고치면 과반의석 정당에 내각 구성권을 주겠다는 것은 대통령의 핵심권한을 내놓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갓 대통령에 취임한 자신의 권한을 크게 축소하더라도 정치발전의 토양이 되는 지역갈등의 벽을 허물겠다는 신념에서 이같은 제안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야당 분열책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배격했다.
노무현은 이어서 12월 17일에는 국회의원 전원에게 서한을 보내 중대선거구제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을 촉구했다. 하지만 이 제안 역시 국회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장악한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정치권은 정치발전과 지역적 갈등 해소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대통령의 ‘헌신적인 제안’마저 거부한 것이다.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영남과 호남 지역기반 정치인들은 지역주의 구조에서 말뚝만 박아도 당선이 보장되는 제도를 굳이 바꿀 생각이 없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자신의 임기 연장이나 권력의 강화를 위해 헌법에 ‘손질’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수차례씩 변칙적 개헌파동을 일으키고 전두환은 ‘상왕제 개헌’을 시도하려다가 6월 민중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이명박까지 임기 후반에 개헌론의 불씨를 지폈으나 여당에서조차 호응을 얻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임기 초에 자신의 권한을 대폭 넘겨서 권력을 분점하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물론 노무현의 파격적인 제안은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힘든 여소야대의 구도에도 말미암은 바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취임하고 보니 국회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장악한 여소야대 국회였다. 그래도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부지런히 만났지만 쉽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나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한나라당은 대북송금특검법을 단독 처리했고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윤성식 감사원장 인준을 부결시켰다.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만 열리면 차례로 나서서 대통령을 인신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의원 총선은 다가오는데, 여소야대에서 벗어날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두 번 연속 패배하고서도 확고한 지지율 1위를 유지했다. 총선에서 지고 나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해야 할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선될 경우 야당이 과반수를 가진 국회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식 동거정부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했다. 여소야대 국회의 연장을 예고하는 17대 총선을 앞두고 이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4쪽.
그래서 집권 초기에 내놓은 그의 선거구 개편을 전제로 한 ‘동거정부’ 제안은 변변한 토론조차 거쳐보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한참 지난 2005년 7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토론만이라도 해보자고 했다. 이 제안은 정계를 뒤흔든 폭풍이 되었지만 사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집권 초기의 제안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내용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 제안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던 족벌언론들이 이번 제안에는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아귀처럼 물어뜯고 나섰다. 한나라당과 족벌신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과 일부 진보언론들마저 ‘정략적’ 인식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우리 나라 정치의 고질 자체를 치유하고자 하는 노무현의 큰 뜻을 헤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무현에게는 권력을 잡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지면 총리를 국회의 다수연합이 추천하게 하고 내각을 지휘할 실질적 권한을 주는 것이다. 거저 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도 또는 중대선거구제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하려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정치를 지역구도가 아닌 정책구도로 재편하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적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는 덤으로 따라올 것이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5쪽~286쪽.
노무현은 실천적 이상주의자 성향이 강한 편이다. 현실 정치인이면서 그의 뇌리에는 이상적인 정치개혁의 꿈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초법적인 변칙이 아니고는 다수 국민이 바라는 방향으로 정치구도를 바꾸기 어려웠다. 현역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줄여서라도 이를 성사시켜보고자 했으나 정치인들은 콧방귀만 뀌고, 자신은 실없는 사람, 경망한 지도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정치인이 대권을 장악하면, ‘권력의 화신’이 되기 마련인데, 노무현은 거꾸로 권력을 내놓으면서까지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노심초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면목이 여기에 있었다.
● 열린우리당 창당 막전막후
2003년 5월 16일, 민주당 신주류는 워크숍을 갖고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추진모임(가칭)’을 발족하는 등 신당 창당에 착수했다. 이에 맞서 구주류는 ‘쿠데타적 발상’이라고 이를 매도하면서 신당 창당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신당 창당을 주도하는 신주류와 이에 반대하는 구주류, 당의 분열은 막아야 한다는 중도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6월 16일에는 신·구주류가 당무회의에서 폭력사태까지 빚게 되고, 이를 계기로 신주류의 신당 추진 핵심인사 28명은 7월 3일 전체 회의를 열어 김원기 고문을 의장으로 하고 국회의원 60명이 포함된 신당 추진 기구를 공식 출범시켰다.
신당 추진과 때를 같이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부영·이우재·김부겸·안영근·김영춘 의원이 합세하고, 재야인사들이 속속 참여함으로써 신당파는 적잖은 세를 이루게 되었다. 신당 창당에 대한 전당대회 소집 안을 놓고 다시 신·구주류 사이에 거친 욕설과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등 폭력사태가 연출되었다. 민주당은 신·구세력의 감정대립으로 더 이상 한솥밥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민주당의 신당파는 9월 4일 당무회의에서 전당대회 소집 안 의결이 무산됨에 따라 김원기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민통합신당 창당주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민주당을 집단 탈당해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선관위에 등록하는 등 본격적인 창당 절차를 밟았다.
이 무렵 노무현은 언론사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갈라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개혁되기를 바라는데 개혁을 찬성하는 사람과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것”이라며 신당 추진을 사실상 추인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구주류의 한화갑·박상천·조순형·추미애 의원 등은 “민주당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격렬하게 비판했다.
민주당의 신당파는 9월 19일 ‘국민참여통합신당’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원내대표로 김근태 의원을 선출했다. 신당파 의원 40여명은 9월 20일 민주당 탈당계를 내고, 한나라당 탈당파 5명과 함께 ‘국민참여통합신당(통합신당)’으로 국회에 교섭단체를 공식등록했다. 이어서 10월 22일에는 통합신당 주비위원회가 원외 신당세력인 개혁신당창당추진위원회와 공동회의를 갖고 범여권 신당의 당명을 ‘열린우리당(약칭 우리당)’으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은 11월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대의원과 참관인 및 각계 인사 1만 5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벌인 창당대회에서 김원기·이태일·이경숙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하고 중앙위원 150명으로 구성되는 임시지도부를 발족시켰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1년여 만에 잔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부터 당적 문제를 조속히 정리하라는 요구를 받아온 노무현은 ‘우리당’이 창당되기 전인 9월 29일 민주당을 전격 탈당했다. 이날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회의에서 “나의 당적 문제가 소모적인 정치공세의 원인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민주당 당적을 포기하겠다”며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주요 국정과제 및 경제·민생문제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으로 한동안 ‘여당 실종’ 상태가 되었다. 이와 관련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실은 “앞으로 노 대통령은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국정책임자로서, 국회의 권한을 존중하면서 정부와 국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나갈 것”이며 “국회의원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통령중심제의 정당체제에서 대통령의 무당적 상태는 대통령과 야 3당 간의 대립이 심화될 경우 자칫 정부 제출 법안의 처리 표류 가능성 등 부작용이 예상되었다. 노무현으로서는 한동안 정치적으로 여당이 없는 ‘정치적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국정을 이끌어야 했다.
노무현은 비주류 정치인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까닭에 대선 뒤에도 당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 정치적 리더십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민주당의 분당으로 인해 호남과 수도권의 지지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배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잔류 민주당의 김성순 대변인은 “대선 당시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한 민주당원 및 지지해 준 국민과 아무런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탈당한 것은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민주당의 분당사태에 대해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되어 알려진 부분이 있다고 진술했다.
˝2003년 민주당이 분당되었다. 당 개혁안을 놓고 대립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회의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져 40여 명의 개혁파 국회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다. 나는 민주당의 개혁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개혁당과 한나라당 탈당파, 시민사회 세력을 통합한 전국정당으로 거듭나주기를 원했다. 대통령이 영남 출신인만큼 국민들이 보기에 만족할 만한 혁신을 하면 지역구도를 조금은 무너뜨릴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민주당을 분당시키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민주당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나와서 신당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것을 수용했을 뿐이다. 지역주의 타파, 깨끗한 정치, 정당민주주의 실현을 내건 열린우리당의 가치와 지향이 옳다고 보아서 그 신당을 지지했을 뿐이다. 내가 그런 정당을 원한 것은 분명하지만,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이 대통령의 지시나 배후 조종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이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 것은 인정할 수 있다.˝ - 노무현,〈운명이다〉, 돌배개, 2010년, 285쪽.
대통령 노무현에게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 등은 그의 역할이나 본의와는 상관없이 집권 초장부터 지지층의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만큼 정치적으로 지지기반이 비좁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