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n년 전 엄마 뱃속에 거꾸로 들어있어서 엄마의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잘 태어났다. 임신 중에 연탄가스 중독이 된 적도 있어 기형아가 될까봐 엄청나게 걱정하셨단다. 하지만 다행히, 몸 성하고 아무 장애 없이 잘 태어났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임산부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지지리게도 돈이 없는 놈의 집구석이었다.
그렇지만 기억나는 어린 시절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현재와 대비되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외동딸이라 사랑을 잔뜩 받기도 했고, 매년 친척들이나 아빠 친구들과 계곡으로 바다로 놀러도 다녔다. 돈이 아무리 없어도 여행다니는 걸 빼먹은 적은 없다. 청록색 대문에 빨간 벽돌, 가파른 골목길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구식 단독저택이 우리 집이었다. 화장실은 대문 밖을 나가야 있었는데 수세식이었다. 이게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싫어하는 점이었다. 밤에는 꼬마 전구를 켜고 일을 봐야 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늘 아빠를 깨워서 화장실에 가곤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빠가 자주 했던 말이다. ㅇㅇ이(나)는 아빠는 별로 안 좋아하지? 엄마가 더 좋지?
맞다. 나는 그 때 엄청난 마마걸이었다. 엄마는 옛날사람 같지 않은 화려한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이셨다. 어딜가나 엄마 뒤만 조르르 쫓아다니고, 엄마가 어딜 나가 있기만 하면 마당에 있던 장독대에 올라가 골목길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엄마 안 오나 하루종일 기다리던 아이였다. 그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가족들을 좀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밤에 화장실 갈 때는 꼭 엄마 말고 아빠를 깨웠다고 하니 나도 어려서부터 계산적인 면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내가 열 살 먹던 해 어린이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학교 갔다 와보니 집에 고모가 와 계셨다. 엄마는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숙제를 해야겠다며 엄마와 아빠와 내가 쓰던 작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큰방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시는 방이다.) 그런데 고모가 울면서 날 때리며.
이것아,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아빠를 본 게 몇일 전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일이 많으면 집에 안 들어오실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에 같이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데. 언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 후로 몇 년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얼굴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럴 때면 부산에 놀러갔을 때 바닷가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며 맞다 아빠가 이렇게 생기셨었지, 했다. 난 참 그만치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은 매정한 딸이었던 걸까?
아빠는 일하는 도중 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엄마도 나도 아파트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따뜻한 물 잘 나오고 화장실도 좋은 아파트에서 그렇게 살고 싶어했는데, 아파트에서 꼭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던 아빠가 아파트 만들다 돌아가셨으니까. 나는 사고를 당한 곳인 춘천에서 치렀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새끼와의 관계를 쓰는 것을 잊었다. 그 개1새끼는 우리 아빠의 형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아침마다 들러서 문안인사 올리고, 아침밥 쳐먹고 집에 갔다. 그런 아들을 할머니는 효자라고 늘 추켜세웠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늘 똑같이 말씀하셨다.
나 밥 해주고 빨래해주는 며느리가 최고지, 모시고 살지도 않는 놈이 효자는 뭔 놈의 효자야!
맞다. 그놈은 우리 집에 와서 밥 축낸 거 말고는 나한테 용돈 한 번 준 적도 없고 세금을 대신 내준 것도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지식하긴 해도 아주 상식적인 분이셨다.
아무튼간에 장례식을 치렀을 때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장례식에 가지 않았고 일은 엄마와 그놈이 다 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많이 울고 밥도 못먹고 잠도 못 주무셨다. 회사에서는 위로금과 장례 비용으로 1억 1천만원이 나왔다.
환장하겠는 대목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엄마는 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아빠 없이 살아야 될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하셨다. 우리 엄마도 엄마를 일찍 여의셨다. 사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안다. 돈 따위는 1억 아니라 10억, 100억을 준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 그 시1팔새끼가 할머니를 꼬드겨, 그 돈 중에 600만원을 수고비로 챙겨간 것이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엄마에게, 니 아주버님이 장례 치르느라 고생했으니 회사에서 나온 돈에서 얼마를 떼어 주거라, 그랬단 얘기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고생은 지만 했나? 그리고,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친동생인데, 장례식장에서 손님 맞고 그랬다고 돈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드나? 무슨 상조회산가? 지나가던 다른 사람 장례 치뤄 줬냔 말이다.
어쨌든 엄마는 그래도 자식을 잃으신 분이 하는 말씀이니 군말없이 돈을 내주셨다고 했다. 이후 엄마는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다.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교수한테 특진으로 잡아놔서 약값도 오지게 비쌈.
어쨌든 세월이 흘렀다. 그래. 흐르는 게 세월이지. 사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집에서 나만 데리고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따로 살 생각이셨단다. 계약까지 해놓고 계약금도 300만원이나 이미 주셨는데, 할머니가 정말 갈거냐- 했다고 마음이 짠해서, 그래 아들도 잃고 적적하실텐데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 하는 생각으로 300만원 그냥 날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5년을 더 모셨다.
그 때도 고 개1새끼는 아침마다 꼬박꼬박 찾아왔다. 시1팔, 그놈의 목적은 돈이었다.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눈꼽만큼의 재산, 즉 우리 집 말이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할아버지는 아주 상식적인 분이라, 아빠와 엄마가 할아버지를 모신 지 딱 5년 되던 해에 아빠 앞으로 집을 물려주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증인을 세워 문서로 그것을 남겨 놓았다.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아빠, 엄마, 할머니 뿐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었고, 형제간에 다툼 생길까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을 앞서 보내시고도 5년을 더 사셨던 할아버지는 아픈 곳 없이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엄마 말씀 잘 듣거라, 했던 게 유언이 되셨다.
이번에도 그 놈이 상주를 했다. 이번에도 엄마는 3일 내내 밥도 잘 못먹고 잠을 못자셨다. 울기도 많이 우셨는데, 이 집에서 내게 힘이 되줄 분이 이젠 정말 없구나 하는 생각에 그러셨다고 했다.
3일장이 끝나고 나서 이번에도 그새끼가 돈 얘기를 꺼냈다. 여기서 엄마는 너무 질려 버렸다. 전에도 그러더니, 어쩜 장지까지 갔다 온 그 날에 돈 얘기부터 할 수가 있냐고. 사람이 죽었는데 돈 얘기부터 꺼낸다는 거 너무 천박한 짓 아닌가? 잠도 못 자고 누가 봐도 피골이 상접한데, 피곤하셨을테니 일단 쉬시라고 하는 게 먼저 아닌가? 그래서 엄마가 윗사람인 걸 알면서도 벌컥 화를 내셨다. 그랬더니 이놈의 새끼가, 우울증 겪어서 정신과 다녔던 엄마한테 그러는 거다. 미친년이라고. 난 그 얘기를 다 들었다. 나도 속에 천불이 났다. 우리 엄마더러 미친년이라니. 그 일은 지금도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우리 엄마가 왜 미친년이야! 하고 소리를 있는대로 질렀다. 너무 화가 나서 창문이란 창문은 다 깨부수고 싶었는데 그럴 힘이 안되더라.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새겨진 분노가 이해 가는가? 얼마나 환장할 지경이었는지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계속 읽어 보라.
유산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큰아버지 큰어머니 고모 기타등등이 집에 모였다. 그런데 그 날 엄마가 그러시는거다. 공증 문서가 없다고. 집 문서랑 같이 놔뒀었는데, 집 문서는 그대로 있고 공증 문서만 쏙 사라졌다고 말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냐고, 가족끼리 이렇게 도둑질을 하는 법이 어딨냐고, 엄마가 말하자 그 개호로자식이 엄마 뺨을 때리는거다. 미친년이 없는 말 지어내고 지랄한다고. 시1팔, 거기서 엄마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해줘야 할 할머니는 가만히만 있었다.
15년간 자기 부모를 모셨던 제수씨 뺨을 조카인 내가 보는 앞에서 때렸단 말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혼절할 지경으로 악을 바락바락 썼다. 내 손에 칼이 들려 있었으면 아마 그 날 살인 났을 거다. 엄마는 당장 짐을 싸고 날 데리고 나와 여관에서 하루 잤다. 나도 그새끼 불알이라도 까고 나왔어야 했는데 망할 그 자리에 날 말릴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이가 빠득빠득 갈린다.
외할아버지는 사정을 알고 나시더니 두말할 것 없이 방부터 알아보자고 하셨다.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겨서 후닥닥 이사를 나왔다. 가면서 장독도 다 부수고 대문도 망가뜨리고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갔어야 했는데.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이사 나와서 몇년을 나는 밤마다 그 새끼 죽이는 꿈만 꾸고 눈 뜨면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게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보냈다. 할머니는 그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한때는 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결혼을 그 때 아직 안하고 계셨던 고모,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촌 언니와 오빠까지 같이 살던 집에. 외로워서 그러셨는지 전화도 자주 하셨다. ㅇㅇ이 보고싶다고. 그 때부터는 아마 그놈이 아침 문안인사도 안 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엄마도 나도 빈정이 상할대로 상해서 얼굴을 비춰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병명은 모르겠고, 내 얼굴도 못알아보셨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일찍 와서 얼굴을 보여드릴걸 하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때까지도 빈정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장례식에는 갔지만 장지에는 안 따라갔다. 그 시1팔놈이 장지 안 따라갔다고 우리 엄마를 시골에서 그렇게 욕을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 혓바닥을 쪽 잡아빼 못질을 해줄 새끼같으니. 장례식도 그새끼 꼴보기 싫어서 가기 싫은걸 그래도 인륜이란 걸 생각해서 억지로 간거였는데, 그 먼 시골까지 따라가고 싶겠냐?
엄마의 인생이 너무 가엾었다. 아빠가 없어서 엄마가 이런 꼴을 당한거구나 하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뭐가 안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가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려서 하도 아빠를 섭섭하게 해서 그런건가 했다. 그럴때마다 후회가 되었다. 사실 우리 아빠는 좀 팔불출이었다. 아이를 원래 좋아하기도 했고. 내가 사달라고 떼쓰면 엄마는 안 사줘도 아빠는 꼭 사줬었다. 그래서 늘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일하러 가지 말라고 내가 떼를 쓰고 안 놓아주고 했으면, 어쩌면 아빠는 지금도 내 곁에 계시지 않을까.
시간이 약이라던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슬퍼졌다.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 더, 중학교 때보다 대학교 때 훨씬 더 슬펐다. 흔히 쓰는 어구이지만 다른 사람도 정말로 슬프고 맺히는 일이 있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파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나는 있다. 너무 아파서 술 마시고 쓰러져서 엉엉 운 적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그 개1새끼하고의 인연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끝장이 났느냐하면, 아니다.
할머니까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유산, 즉 그 집을 나눠가질 문제가 남아있었다. 원래는 당연히 아빠 재산이 되어야 하고, 대습상속으로 결국 내 재산이 되어야 되는 집이다. 그런데 아마 그 집을 팔려면 상속을 받아야할 모든 사람이 동의를 해줘야 하는 모양이다. 뭐, 난 그때 법에 대해 잘 몰랐다. 그 집은 너무 낡고 오래되어 가치는 별로 없지만, 그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간다고 해서 집값은 꽤 올라 있었다.
그 때부터 이놈이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장 좀 찍어달라고. 엄마는 당연히 들은 척도 안했다. 시1팔, 지가 아쉬우니 미친년 도장도 필요한가보지.
결국 그 집은 엄마와 내 몫인 2/13 을 떼고 나머지 부분만 팔렸다.
친가 식구중에 가장 엄마와 가까웠던 사람은 나보다도 어릴 적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사촌 언니였다. 그 언니만 우리 집에 종종 찾아와, 나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야기도 전해주고는 했다. 시골에서 엄마가 욕을 먹고 있는 것도 당연히 언니 덕에 알았다. 그래서 집 팔은 돈은 제대로 나눠주더냐 물었다. 언니는 아니라고 했다. 뭐 병원비에 장례비용에 다 썼다면서 지가 다 받아쳐먹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거짓말이다. 할머니는 오래 입원해 계시지도 않았고 상조 회사도 안 불렀으니 그 많은 돈이 다 병원비, 장례비에 쓰였을 리가 없다. 언니는 그 인간이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했다.
아쉬울 땐 전화를 그렇게 걸더니 나 대학 합격했을 땐 전화 한 통 없었다. 엄마가 내가 대학에 붙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니 아빠 장례식에서 그렇게 우니까 그 인간이 그러더라. 자기는 아들만 둘 있고 장가도 보내고 다 키워놨으니, 너(나)를 딸처럼 여기고 대학교까지 책임지고 가르치겠다고.
난 정말 기가 막혔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어딨나 싶었다. 할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면서도 난 그놈한테 용돈으로 십원한장 받은 적이 없다.
씹어먹을 놈.
내 성질이 이만치 비뚤어진것도 다 그놈 때문이다. 공증 문서만 있었어도 아마 지금 우리 집도 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거다. 그런데 엄마랑 나는 정말 너무 힘들게 살아야 했다. 말했다시피 약값이 일단 오지게 비쌌고.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인서울 대학에 합격을 했고 다행히도 4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근데, 졸업했는데도 취직이 안 되네?
졷같아서 술을 존1나 쳐마셨다가 병났다. 요즘도 뻑하면 위가 아프다. 난 공부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요즘 커뮤니티의 특징인가 하는 게 짤방으로 만들어져서 돌아다니더라. 나도 배꼽 잡고 웃었다. 근데 그 중에 네이트판은 세기의 대문호라고 그려놨더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어릴적 꿈이 소설가였다. 그래서 글을 올려 보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유지만, 이 글은 주작이 아니다. 그놈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말종 호-로새1끼라서 같이 욕이나 좀 하자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놈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좀 제보해주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놈이 나한테만 개1새끼가 아닌 이유를 몇 개 더 적겠다.
하나, 일찍 돌아가신 제일 큰아버지의 자녀들(나한텐 사촌 언니, 오빠)은 국가로부터 돈을 지원받았는데, 법적 보호자로서 그 돈을 관리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속닥속닥 해서 땅 사서 돈 불려준다고 그걸 가져가서 입 싹 씻었다. 돈에 눈이 뒤집힌 새끼.
둘, 바람이 나서 결혼을 두 번 했다. 조강지처 패고, 자기 자식들(이 역시 나한텐 사촌 오빠)도 발가벗겨 내보내고 고무호스로 패고 혁대로 두드려 패던 새끼다. 누가 누구더러 미쳤대? 지가 제일 미친놈이다. 자식을 혁대로 패는 새끼가 어딨냐? 인간이 할 짓이냐?
둘 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해준 얘기다. 그런 자식을 끝까지 싸고 도는 할머니도 똑같다. 그러고선 맨날 나한테는 지 엄마 닮아서 못돼쳐먹었다고 그러지. 솔직히 난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안 울었다. 슬프지도 않았고. 아직도 밉다. 우리 엄마 맞을 때 가만 있었거던!
내가 글 쓰는 내내 그놈에게 큰아버지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치채셨는지? 아빠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인 큰아버지한테 씨-발-놈이니 개1새끼니 호로자식이니 한다고, 가치관이 다른 분들은 뭐 저런 년이 다 있나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에이 저런 애비없는 후레자식! 하고 욕이나 하고 지나가시라. 그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욕이다.
인생 최고의 시1발놈
x근이 개1새끼
이 새끼가 왜 개1새끼인지 설명하려면 내 인생 얘기가 어쩔 수 없이 등장해야된다.
나는 2n년 전 엄마 뱃속에 거꾸로 들어있어서 엄마의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잘 태어났다. 임신 중에 연탄가스 중독이 된 적도 있어 기형아가 될까봐 엄청나게 걱정하셨단다. 하지만 다행히, 몸 성하고 아무 장애 없이 잘 태어났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임산부가 연탄가스에 중독되는 일이 일어날 정도로 우리 집은 가난했다! 지지리게도 돈이 없는 놈의 집구석이었다.
그렇지만 기억나는 어린 시절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현재와 대비되어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외동딸이라 사랑을 잔뜩 받기도 했고, 매년 친척들이나 아빠 친구들과 계곡으로 바다로 놀러도 다녔다. 돈이 아무리 없어도 여행다니는 걸 빼먹은 적은 없다.
청록색 대문에 빨간 벽돌, 가파른 골목길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구식 단독저택이 우리 집이었다. 화장실은 대문 밖을 나가야 있었는데 수세식이었다. 이게 내가 우리 집에서 가장 싫어하는 점이었다. 밤에는 꼬마 전구를 켜고 일을 봐야 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늘 아빠를 깨워서 화장실에 가곤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빠가 자주 했던 말이다. ㅇㅇ이(나)는 아빠는 별로 안 좋아하지? 엄마가 더 좋지?
맞다. 나는 그 때 엄청난 마마걸이었다. 엄마는 옛날사람 같지 않은 화려한 이목구비를 갖춘 미인이셨다. 어딜가나 엄마 뒤만 조르르 쫓아다니고, 엄마가 어딜 나가 있기만 하면 마당에 있던 장독대에 올라가 골목길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엄마 안 오나 하루종일 기다리던 아이였다. 그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가족들을 좀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밤에 화장실 갈 때는 꼭 엄마 말고 아빠를 깨웠다고 하니 나도 어려서부터 계산적인 면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내가 열 살 먹던 해 어린이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학교 갔다 와보니 집에 고모가 와 계셨다. 엄마는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숙제를 해야겠다며 엄마와 아빠와 내가 쓰던 작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큰방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쓰시는 방이다.) 그런데 고모가 울면서 날 때리며.
이것아, 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무언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아빠를 본 게 몇일 전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일이 많으면 집에 안 들어오실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날에 같이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데. 언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그 후로 몇 년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은 얼굴도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그럴 때면 부산에 놀러갔을 때 바닷가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며 맞다 아빠가 이렇게 생기셨었지, 했다.
난 참 그만치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은 매정한 딸이었던 걸까?
아빠는 일하는 도중 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엄마도 나도 아파트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따뜻한 물 잘 나오고 화장실도 좋은 아파트에서 그렇게 살고 싶어했는데, 아파트에서 꼭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던 아빠가 아파트 만들다 돌아가셨으니까. 나는 사고를 당한 곳인 춘천에서 치렀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더 실감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새끼와의 관계를 쓰는 것을 잊었다. 그 개1새끼는 우리 아빠의 형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아침마다 들러서 문안인사 올리고, 아침밥 쳐먹고 집에 갔다. 그런 아들을 할머니는 효자라고 늘 추켜세웠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늘 똑같이 말씀하셨다.
나 밥 해주고 빨래해주는 며느리가 최고지, 모시고 살지도 않는 놈이 효자는 뭔 놈의 효자야!
맞다. 그놈은 우리 집에 와서 밥 축낸 거 말고는 나한테 용돈 한 번 준 적도 없고 세금을 대신 내준 것도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고지식하긴 해도 아주 상식적인 분이셨다.
아무튼간에 장례식을 치렀을 때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장례식에 가지 않았고 일은 엄마와 그놈이 다 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많이 울고 밥도 못먹고 잠도 못 주무셨다. 회사에서는 위로금과 장례 비용으로 1억 1천만원이 나왔다.
환장하겠는 대목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엄마는 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아빠 없이 살아야 될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하셨다. 우리 엄마도 엄마를 일찍 여의셨다. 사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안다. 돈 따위는 1억 아니라 10억, 100억을 준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런데 그 시1팔새끼가 할머니를 꼬드겨, 그 돈 중에 600만원을 수고비로 챙겨간 것이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엄마에게, 니 아주버님이 장례 치르느라 고생했으니 회사에서 나온 돈에서 얼마를 떼어 주거라, 그랬단 얘기다.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고생은 지만 했나? 그리고,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친동생인데, 장례식장에서 손님 맞고 그랬다고 돈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드나? 무슨 상조회산가? 지나가던 다른 사람 장례 치뤄 줬냔 말이다.
어쨌든 엄마는 그래도 자식을 잃으신 분이 하는 말씀이니 군말없이 돈을 내주셨다고 했다. 이후 엄마는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다.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교수한테 특진으로 잡아놔서 약값도 오지게 비쌈.
어쨌든 세월이 흘렀다. 그래. 흐르는 게 세월이지.
사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집에서 나만 데리고 나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따로 살 생각이셨단다. 계약까지 해놓고 계약금도 300만원이나 이미 주셨는데, 할머니가 정말 갈거냐- 했다고 마음이 짠해서, 그래 아들도 잃고 적적하실텐데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 하는 생각으로 300만원 그냥 날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5년을 더 모셨다.
그 때도 고 개1새끼는 아침마다 꼬박꼬박 찾아왔다. 시1팔, 그놈의 목적은 돈이었다.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눈꼽만큼의 재산, 즉 우리 집 말이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할아버지는 아주 상식적인 분이라, 아빠와 엄마가 할아버지를 모신 지 딱 5년 되던 해에 아빠 앞으로 집을 물려주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증인을 세워 문서로 그것을 남겨 놓았다.
그걸 알고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아빠, 엄마, 할머니 뿐이었다. 나는 너무 어렸었고, 형제간에 다툼 생길까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을 앞서 보내시고도 5년을 더 사셨던 할아버지는 아픈 곳 없이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엄마 말씀 잘 듣거라, 했던 게 유언이 되셨다.
이번에도 그 놈이 상주를 했다. 이번에도 엄마는 3일 내내 밥도 잘 못먹고 잠을 못자셨다. 울기도 많이 우셨는데, 이 집에서 내게 힘이 되줄 분이 이젠 정말 없구나 하는 생각에 그러셨다고 했다.
3일장이 끝나고 나서 이번에도 그새끼가 돈 얘기를 꺼냈다. 여기서 엄마는 너무 질려 버렸다. 전에도 그러더니, 어쩜 장지까지 갔다 온 그 날에 돈 얘기부터 할 수가 있냐고. 사람이 죽었는데 돈 얘기부터 꺼낸다는 거 너무 천박한 짓 아닌가? 잠도 못 자고 누가 봐도 피골이 상접한데, 피곤하셨을테니 일단 쉬시라고 하는 게 먼저 아닌가?
그래서 엄마가 윗사람인 걸 알면서도 벌컥 화를 내셨다. 그랬더니 이놈의 새끼가, 우울증 겪어서 정신과 다녔던 엄마한테 그러는 거다. 미친년이라고.
난 그 얘기를 다 들었다. 나도 속에 천불이 났다. 우리 엄마더러 미친년이라니. 그 일은 지금도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우리 엄마가 왜 미친년이야! 하고 소리를 있는대로 질렀다. 너무 화가 나서 창문이란 창문은 다 깨부수고 싶었는데 그럴 힘이 안되더라.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새겨진 분노가 이해 가는가? 얼마나 환장할 지경이었는지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계속 읽어 보라.
유산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큰아버지 큰어머니 고모 기타등등이 집에 모였다.
그런데 그 날 엄마가 그러시는거다.
공증 문서가 없다고. 집 문서랑 같이 놔뒀었는데, 집 문서는 그대로 있고 공증 문서만 쏙 사라졌다고 말이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냐고, 가족끼리 이렇게 도둑질을 하는 법이 어딨냐고, 엄마가 말하자 그 개호로자식이 엄마 뺨을 때리는거다. 미친년이 없는 말 지어내고 지랄한다고. 시1팔, 거기서 엄마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증명해줘야 할 할머니는 가만히만 있었다.
15년간 자기 부모를 모셨던 제수씨 뺨을 조카인 내가 보는 앞에서 때렸단 말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혼절할 지경으로 악을 바락바락 썼다. 내 손에 칼이 들려 있었으면 아마 그 날 살인 났을 거다. 엄마는 당장 짐을 싸고 날 데리고 나와 여관에서 하루 잤다. 나도 그새끼 불알이라도 까고 나왔어야 했는데 망할 그 자리에 날 말릴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이가 빠득빠득 갈린다.
외할아버지는 사정을 알고 나시더니 두말할 것 없이 방부터 알아보자고 하셨다.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겨서 후닥닥 이사를 나왔다. 가면서 장독도 다 부수고 대문도 망가뜨리고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갔어야 했는데.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이사 나와서 몇년을 나는 밤마다 그 새끼 죽이는 꿈만 꾸고 눈 뜨면 어떻게 해야 세상에서 제일 잔인하게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보냈다.
할머니는 그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한때는 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결혼을 그 때 아직 안하고 계셨던 고모,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촌 언니와 오빠까지 같이 살던 집에. 외로워서 그러셨는지 전화도 자주 하셨다. ㅇㅇ이 보고싶다고. 그 때부터는 아마 그놈이 아침 문안인사도 안 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엄마도 나도 빈정이 상할대로 상해서 얼굴을 비춰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병명은 모르겠고, 내 얼굴도 못알아보셨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일찍 와서 얼굴을 보여드릴걸 하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때까지도 빈정이 상해 있는 상태였다. 장례식에는 갔지만 장지에는 안 따라갔다. 그 시1팔놈이 장지 안 따라갔다고 우리 엄마를 시골에서 그렇게 욕을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 혓바닥을 쪽 잡아빼 못질을 해줄 새끼같으니. 장례식도 그새끼 꼴보기 싫어서 가기 싫은걸 그래도 인륜이란 걸 생각해서 억지로 간거였는데, 그 먼 시골까지 따라가고 싶겠냐?
엄마의 인생이 너무 가엾었다. 아빠가 없어서 엄마가 이런 꼴을 당한거구나 하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뭐가 안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빠가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려서 하도 아빠를 섭섭하게 해서 그런건가 했다.
그럴때마다 후회가 되었다. 사실 우리 아빠는 좀 팔불출이었다. 아이를 원래 좋아하기도 했고. 내가 사달라고 떼쓰면 엄마는 안 사줘도 아빠는 꼭 사줬었다. 그래서 늘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일하러 가지 말라고 내가 떼를 쓰고 안 놓아주고 했으면, 어쩌면 아빠는 지금도 내 곁에 계시지 않을까.
시간이 약이라던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슬퍼졌다.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 더, 중학교 때보다 대학교 때 훨씬 더 슬펐다. 흔히 쓰는 어구이지만 다른 사람도 정말로 슬프고 맺히는 일이 있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파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적어도 나는 있다. 너무 아파서 술 마시고 쓰러져서 엉엉 운 적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그 개1새끼하고의 인연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끝장이 났느냐하면, 아니다.
할머니까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유산, 즉 그 집을 나눠가질 문제가 남아있었다. 원래는 당연히 아빠 재산이 되어야 하고, 대습상속으로 결국 내 재산이 되어야 되는 집이다.
그런데 아마 그 집을 팔려면 상속을 받아야할 모든 사람이 동의를 해줘야 하는 모양이다. 뭐, 난 그때 법에 대해 잘 몰랐다.
그 집은 너무 낡고 오래되어 가치는 별로 없지만, 그 일대가 재개발에 들어간다고 해서 집값은 꽤 올라 있었다.
그 때부터 이놈이 우리집에 전화를 걸어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장 좀 찍어달라고.
엄마는 당연히 들은 척도 안했다.
시1팔, 지가 아쉬우니 미친년 도장도 필요한가보지.
결국 그 집은 엄마와 내 몫인 2/13 을 떼고 나머지 부분만 팔렸다.
친가 식구중에 가장 엄마와 가까웠던 사람은 나보다도 어릴 적에 부모님을 모두 잃은 사촌 언니였다. 그 언니만 우리 집에 종종 찾아와, 나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야기도 전해주고는 했다. 시골에서 엄마가 욕을 먹고 있는 것도 당연히 언니 덕에 알았다.
그래서 집 팔은 돈은 제대로 나눠주더냐 물었다. 언니는 아니라고 했다. 뭐 병원비에 장례비용에 다 썼다면서 지가 다 받아쳐먹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거짓말이다. 할머니는 오래 입원해 계시지도 않았고 상조 회사도 안 불렀으니 그 많은 돈이 다 병원비, 장례비에 쓰였을 리가 없다. 언니는 그 인간이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했다.
아쉬울 땐 전화를 그렇게 걸더니 나 대학 합격했을 땐 전화 한 통 없었다.
엄마가 내가 대학에 붙고 나서 말하기를,
내가 니 아빠 장례식에서 그렇게 우니까 그 인간이 그러더라. 자기는 아들만 둘 있고 장가도 보내고 다 키워놨으니, 너(나)를 딸처럼 여기고 대학교까지 책임지고 가르치겠다고.
난 정말 기가 막혔다. 이런 인간이 세상에 어딨나 싶었다. 할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으면서도 난 그놈한테 용돈으로 십원한장 받은 적이 없다.
씹어먹을 놈.
내 성질이 이만치 비뚤어진것도 다 그놈 때문이다.
공증 문서만 있었어도 아마 지금 우리 집도 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거다. 그런데 엄마랑 나는 정말 너무 힘들게 살아야 했다. 말했다시피 약값이 일단 오지게 비쌌고.
나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인서울 대학에 합격을 했고 다행히도 4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근데, 졸업했는데도 취직이 안 되네?
졷같아서 술을 존1나 쳐마셨다가 병났다. 요즘도 뻑하면 위가 아프다. 난 공부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요즘 커뮤니티의 특징인가 하는 게 짤방으로 만들어져서 돌아다니더라. 나도 배꼽 잡고 웃었다. 근데 그 중에 네이트판은 세기의 대문호라고 그려놨더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어릴적 꿈이 소설가였다.
그래서 글을 올려 보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유지만, 이 글은 주작이 아니다. 그놈이 너무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 말종 호-로새1끼라서 같이 욕이나 좀 하자는 뜻에서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놈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을 좀 제보해주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그놈이 나한테만 개1새끼가 아닌 이유를 몇 개 더 적겠다.
하나, 일찍 돌아가신 제일 큰아버지의 자녀들(나한텐 사촌 언니, 오빠)은 국가로부터 돈을 지원받았는데, 법적 보호자로서 그 돈을 관리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속닥속닥 해서 땅 사서 돈 불려준다고 그걸 가져가서 입 싹 씻었다. 돈에 눈이 뒤집힌 새끼.
둘, 바람이 나서 결혼을 두 번 했다. 조강지처 패고, 자기 자식들(이 역시 나한텐 사촌 오빠)도 발가벗겨 내보내고 고무호스로 패고 혁대로 두드려 패던 새끼다. 누가 누구더러 미쳤대? 지가 제일 미친놈이다. 자식을 혁대로 패는 새끼가 어딨냐? 인간이 할 짓이냐?
둘 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해준 얘기다. 그런 자식을 끝까지 싸고 도는 할머니도 똑같다.
그러고선 맨날 나한테는 지 엄마 닮아서 못돼쳐먹었다고 그러지. 솔직히 난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안 울었다. 슬프지도 않았고. 아직도 밉다. 우리 엄마 맞을 때 가만 있었거던!
내가 글 쓰는 내내 그놈에게 큰아버지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치채셨는지? 아빠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인 큰아버지한테 씨-발-놈이니 개1새끼니 호로자식이니 한다고, 가치관이 다른 분들은 뭐 저런 년이 다 있나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에이 저런 애비없는 후레자식! 하고 욕이나 하고 지나가시라. 그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욕이다.
길고 불편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