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고, 믿고 싶었고, 지금도 믿고 싶지만

2015.12.19
조회1,962

2013년,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사람. 이 급작스러운 만남은 의외로 1년 반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졌다. 그렇다 나는 오늘 헤어졌다. 상대방은 지금 헤어진 줄도 모르고 헬렐레 술을 먹고 있겠지, 이별은 자기가 고해놓고 말이다. 난 기억력이 정말 나빠서 1년 반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억력이 나쁜 나에게 남은 기억과 잔재는, 그만큼 나에게 소중했고, 뜻 깊었으며, 상처였고, 지울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이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잔재들이, 그리고 오늘 그의 행동이 우리 관계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의 첫 인상은 헤퍼보임,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믿음이 가지 않음이였다. 친하지도 않은 나에게 계속 소개팅을 해달라고 접근하고, 어떤 여자가 좋냐는 말에 ‘자취하는 여자’라고 했을 때 철들긴 글러먹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철들지 못한 그와 철들지 못했던 나는 며칠 뒤 주량을 조절하지 못하고 키스를 했고, 우리답게 철없는 관계를 시작해버렸다. 


그렇다 우리 관계의 시작에는 조금의 의무감도, 진지함도 없었다. 이것은 한 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철없는 여자와 남자 둘 다에게 해당되므로 어느 한 쪽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아무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조금의 신체적 접촉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전에 느끼지 못했던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고, 소개팅을 애타게 찾고 있던 외로운 남자와 전 남친을 1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고 있던 여자의 욕구 충족에 딱 걸맞는 선택이였을 뿐이다. 그렇게 철없고 외로운 남자와 철없고 아팠던 여자는 감정도, 의무감도 없는 상태에서 철없는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된 관계가 어떻게 1년 반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었을까. 여자는 이전에 이별에 크게 받은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헤어짐을 두려워했고, 이별을 다시 맞이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씨씨였던 만큼 (여자도 참 생각이 없고 멍청하다) 이별 후 돌아다닐 소문과 그 후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이전 이별에 대한 상처가 커 보였고, 친한 형을 배신하고 그의 전 여친을 만나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도 둘은 헤어질 용기가 없어서 헤어짐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붙곤 했다. 


외로움도 크게 한 몫했다. 여자는 친구가 원래 많이 없다. 고등학교때도, 대학때도 항상 그래왔다. 그리고 특히 남자와 만남을 시작할 무렵 제일 친했던 친구와 절교를 하고, 몇 달 이후에 다른 친구와도 같은 일이 일어나는 등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을 당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못 주게 되었고, 모든 친구들을 ‘언젠간 떠나갈’ 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껴주는 척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언제나 그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여자를 떠나갈 때, 옆에 있어주겠다고 한 건 남자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해도, 그런 잘못들은 고쳐질 수 있는 반면 내곁에 남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라고 생각하여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고, 그가 정말 남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생겨버렸다. 


남자도 외로웠다. 그는 항상 같이 붙어다니던 친구들이 군대를 가고, 반 단체활동이 줄어들면서 여자들과도 멀리하게 됐다. 아마 여자가 반 여자애들하고 친하지 않은데 혼자 나가기도 그랬을 것이고, 무엇보다 반 여자학우들이 더 꺼렸을 것이다. 친구가 없는 남자는 여자마저 잃으면 학교생활이 더욱 외로워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쉽사리 여자 곁은 떠나지 못했다. 리쌍의 노래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가 딱 걸맞는 관계였다. 


남자는 흠이 많았다. 첫 째,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여느 명문대생과 다름없이 스스로에 대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남들에게 비춰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는 과에서 ‘수석’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내가 실수로 본 그의 성적은 나와는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남들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스스로 정말 믿고 한 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며 그의 버릇이 되어갔다. 


그는 가족에게도 매우 소홀했으며, 뱉는 말마다 거짓말이였다. 부모님이 전화를 하면 항상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받고, 어디냐는 부모님의 질문에는 항상 도서관이라는 거짓말이 돌아갔다. 카페 책상을 도서관인 듯 꾸며놓고 사진을 찍어 보내는 그의 치밀함에, 그의 거짓말의 대상이 나일 때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라는 의심과 불신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그가 그의 엄마한테 막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미래에 그의 아내로서 옆에 있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는 욕을 즐겼고 폭력적이였다. 여자와는 다르게 한 번도 소리를 지른적은 없었다. 그는 조용히, 그리고 날카롭게 비꼬고 욕을 할 뿐이였다. 카톡으로 다툼이 날 때면 카톡방은 ‘ㅋㅋㅋㅋㅋㅋ’와 ‘;;체’, ‘~시지’의 어투로 물들었다. 주위사람들에게 쉽게 동화되어버리는 여자는 안타깝게도 이 어체를 쓰기 시작했고, 여자와 남자가 싸울때면 그 대화는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유치한, 서로를 상처주기위한 말 뿐이였다. 문제를 직시한 여자가 이런 말투를 금기시켜보려고 해도, 그는 끝까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속에는 분노가 내제되어있다. 그래서 술을 먹고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때면 항상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술을 먹고 여자를 때리고 여자의 집을 부순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럴때마다 여자에게 ‘미친년’ ‘시발년’ 등의 폭언을 서슴치않게 내뱉었고, 여자의 목을 조르기도 했으며, 그녀의 집에 남아나는 것이 없도록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은 ‘미안해, 다신 안그럴게’. 텔레비전에서 이 말을 믿는 여자들을 보면서 비웃었었는데, 막상 들으니까 여자는 그 말을 믿고 싶어진다. 그래, 내가 지금 기회를 주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몰라. 정말 뉘우치면 다신 안그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믿고싶었다. 


그는 여자의 믿음을 반드시 회복하도록 몇 가지 약속을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 술을 일체 마시지 않을 것, 마시면 맥주 한 잔만 마실 것. 싸울 때 비꼬지 않고 나쁜 말을 쓰지 않을 것. 일반인의 보편적인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어떻게 보면 연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를 갖추기 위한 약속이였다. 남자의 속에 분노가 내제되어있고, 그는 분노를 조절할 수 없으며, 그 분노가 무의식이 작동할때만 표출된다면 술을 조절하고 고쳐진 모습을 보여주어 여자의 신뢰를 되찾으면 될 것. 여자가 바란건 그들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신뢰를 회복하는 것, 그 뿐이었다. 그가 여자의 집을 부수고 목을 조르며 위협하는 모습을 고치고 행복하게 같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술을 먹을 기회가 올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여자는, ‘그래, 남자가 어떻게 술을 안 먹고 살아.’ 라고 자기 위안을 하며, 군인인 친구들과 술을 먹을 기회가 드물으니 먹으려면 최소한 양해를 구했으면 좋겠다. 그게 너의 폭력에 상처를 받은 나를, 너가 술을 먹을때도 안심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남자는 매번 술을 먹을 기회가 오면 절대 안취한다는 약속을 하고, 1시가 되면 어김없이 꽐톡을 보냈다. 그리고 그 꽐톡은 매번 욕과 여자에 대한 분노를 포함했다. 그 다음날이면 남자는 사과를 했다. 여자는 멍청하게도 그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뉘우치기를 바라며 그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그의 군인 친구들이 외박을 나온 날이다. 당연이 술을 먹는다. 여자는 이미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만, 이제는 안 그러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카톡으로 ‘취할예정이니!’ 라고 묻는 여자에게 남자는 ‘절대 안 취할거다, 맥주 한 잔만 마실거다’라고 답했다. 여자는 맥주 한 잔이 아니여도 좋으니 취하지만 않도록, 우리 약속을 깨지만 않도록, 지금 달아오르는 내 마음을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만 않기를 바랬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즐겨도 좋으니 마실거면 여자에게 양해를 구했으면 하고 바라지만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남자는 11시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얘기하느라 바빠서 그런거겠지, 여자는 애써 마지막까지 그를 믿어보려고 했다. 이는 이미 수십번도 넘게 되풀이한 장면이었다. 여자는 속고 속고 속아도, 희망을 가지고 싶다. 하지만 이미 취할대로 취해버린 그는 1시에 말도 안되는 꽐톡을 보냈다. 여자는 침착하게 끝까지 이해하고 싶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그의 꽐톡을 이해해보고 싶지만,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실망한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조심히 들어가 걱정되니까’ 라고 보내지면, 그는 또다시 ‘내가 개호구로 보이냐, 병신같이 보이냐, 잘지내라’라는 폭언과 함께 그 다운 이별을 통보했다. 


여자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서 눈물을 훔친다. 그의 이별통보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다만 여자가 운 이유는, 그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실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한다. 특히 최근에 와서 더더욱 좋아져버렸다. 그가 최근에 많이 변하기도 했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희망을 꽃 피우며, 지금까지의 우리 고난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시행착오였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데에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얼마나 허무맹랑한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 그리고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가여워 눈물을 흘린다.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신뢰와 희망이 몇 번이고 부서진 관계는 다시 붙일 수 없다. 기회를 줄수록 실망만 커져간다. 헤어져야한다. 헤어지는 게 맞다. 여자와 남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뢰가 없어졌을 때부터,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사라졌을 때부터, 이미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실 여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의 관계가 이렇게 끝이 날 것을 알고 있었다. 꼭 다시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2015년의 크리스마스 1주일 전 부서져버린 희망이,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져버린 우리가 너무 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