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한국) 대학의 발달 설명. 고구려 태학,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임. 해방후의 성균관대는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윤진한201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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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한국) 대학의 발달 설명. 고구려 태학, 고려 국자감, 조선 성균관임. 해방후의 성균관대는 대통령령에 의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두산백과 및 여러 전문 사전들이 국사에 나오는 조선(대한제국)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에서 이어진 대학이라고 설명.

 

 

1. 우리나라 대학의 발달

기관에 초점을 두면, 우리나라 대학 시작은 고구려 소수림왕 시대 설립된 태학(서력 기원전 372년)이다.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유학의 경전과 무예 등을 가르쳤다. 그 뒤 통일신라의 682년(신문왕 2)에는 국학(國學)을 설립하였고, 992년(고려 성종 11)에 설립된 국자감(國子監)은 신라의 국학과 함께 유교에 의한 관리양성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정치적·문화적 지도자의 주된 공급원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이 있었다.

.출처: 대학 [University, College, 大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일본강점기 이후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와 재산관리를 주 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뀐 과정. 이 왜곡 기간을 겪으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되고  해방후 성균관대로 복구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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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성균관대가 설명하는 성균관대학교 약사. 성균관대 홈페이지에 나타남.

 

성균관대학교

 

...우리나라 국립 최고학부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해 수도에 태학을 설립해서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조시대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본교의 역사는 바로 이 고구려의 태학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본교에서는 건학원년을 서기 1398년으로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성균관이라는 교명과 현 학교 위치를 고려해서이다. 즉 조선조 개국후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중앙의 국립최고학부의 개설을 서둘러 동북방 숭교방(현 명륜캠퍼스위치)에 성균관을 설립했으니, 이가 바로 본 대학교의 개교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해서 국립 최고학부로 설립된 본 대학교는 역사의 변천에 따라 크게 고전대학시대와 근대대학시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고전대학시대는1398년에서 1894년까지를 말하며, 그 시대에는 전통적인 유학교육이 행해졌고, 제도적 운영도 고전적이었다. 그리고 근대대학시대은1895년에서 현재까지를 말하며, 이 시대에는 유교이념에 기본을 두고 학문분야를 확대하여 유학 이외에 근대학문이 요구하는 광범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제도적 운영도 근대적인 것으로 전환 발전하여 왔다.

 

1). 고전대학시대

고전대학시대

다시 고전대학시대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건학기로 1398년에서 1494년까지, 즉 태조때 성균관의 건립로부터 성종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그 시기에는 성균관의 건립과더불어 제도상의 정비, 운영상의 시책이 적극적으로 베풀어져 최고 국립대학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2). 근대 대학시대

근대대학시대

근대대학시대도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개화기, 제2기는 수난기, 제3기는 발전기로 나눌수있다. 그 중에 개화기는 1895년에서 1910년까지, 즉 을미년 성균관이 근대적인 대학으로 발족한 때부터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 때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1895년 칙령으로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를 설치하고 역사학, 지리학, 수학 등 각종 강좌를 개설하는 동시에 교수임명제, 입학시험제, 졸업시험제를 실시하고 학기제, 연간의 수업일수, 주당 강의시간수를 책정하는 등, 제도상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은 고전대학으로 부터 근대대학으로 일대 전환을 보게 되었다.

수난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고,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나마 명륜전문학교는 민족해방 1년전인 1944년 명륜련성소로 개편되어 그 빛을 잃게 되었다.


3). 현대 대학시대

현대대학시대

발전기는 1945년 민족해방으로부터 현재까지이나, 그 중에서 제1 시기로는 성장기, 제2시기로 발전기, 제3시기로 확충기를 들 수 있다.

성장기는 단과대학시대라 할 수 있는데, 1945년에서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 발전하기 직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45년 9월 민족해방과 더불어 명륜전문학교를 부활시켰다. 명륜전문학교는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은 아니었지만 형식상 절차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45년 11월 전국유림대회가 열리고, 뒤이어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표가 되었다.

이러한 성균관대학이 출범하려는 데에 있어서 학봉 李錫九선생이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게 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조직하게 되어,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다.

이렇게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하여 출범한 성균관대학은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였는데 동양철학과,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하고 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하였다....


4. 공자님 제사기관인 성균관이 설명하는 성균관대학교


1). 성균관의 의미
고려말과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禮』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學)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2). 위치와 연혁. 이 부분에서 성균관대학교 설명.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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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학제로의 변천과 오늘의 성균관. 이 부분에서는 일본강점기때의 왜곡과 해방후의 성균관대 설립을 설명.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ㆍ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5. 백과사전이나 사전류등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격
대학교, 사립종합대학교

설립일시
1398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개설

성균관대학교의 연원은 1398년(태조 7) 국립고등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성균관에서 시작된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서 국가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출처: 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
[ Sungkyunkwan University , 成均館大學校 ]

요약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구분:사립

특성:종합대학

개교일:1398년

소재지: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인문사회과학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서부로 2066(자연과학캠퍼스) 지도

교목:은행나무

면적(㎡):627,025

홈페이지:www.skku.ac.kr

 

출처: 성균관대학교 [Sungkyunkwan University, 成均館大學校] (두산백과)

 

3). 종교학 대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명륜전문학교로의 왜곡--->성균관대학교 

 

성균관
[ 成均館 ]

 

우리나라의 옛 대학(大學)으로 그 명칭은 고려 충선왕 때 국학(國學)을 성균관으로 개명한데서 시작되었으며 공민왕 때는 국자감(國子監)이라 부르다가 곧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는데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이조 일대를 걸쳐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이었다. 1398년 이태조는 숭교방(崇敎坊一明儉洞)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으며,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냈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였다. 이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島),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漁場)과 많은 땅이 부속되었다.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향관청(享官聽)과 존경각(尊經閣ㆍ圖書庫)도 이때 증설되었고, 현종 때에 비천당(不闡堂ㆍ과거장), 숙종 때 계성당(啓聖堂)이 세워졌다. 관원으로는 총책임자로 지관사(知館事ㆍ弘文棺, 또는 藝文館 大提學이 겸임)를 두었고 그 밑에 동지관사(同知館事ㆍ겸직) 1명,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ㆍ정3품) 1명, 제주(祭酒ㆍ정3품) 2명, 사성(司成ㆍ정3품) 1명, 사예(司藝ㆍ정4품) 2명, 사업(司業ㆍ정4품) 1명, 직강(直講ㆍ정5품) 4명, 전적(典籍ㆍ정6품) 13명, 박사(博士ㆍ정7품) 3명, 학정(學正ㆍ정8품) 3명, 학록(學錄ㆍ정9품) 3명, 학유(學諭ㆍ종9품) 3명이 있었다. 이 중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한 것이 있었다. 일정(日政) 때는 경학원(經學院)이라 불렀고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세웠으며 8ㆍ15해방 후에 성균관 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출처:성균관 [成均館]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4). 교육학사전에 나타나는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명륜전문학교로의 왜곡--->성균관대학교 

 

성균관
[ 成均館 ]

 

고려·조선조 때 있었던 유학교육의 최고학부. 신라 시대는 국학(國學), 고려 시대는 국자감(國子監)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조 시대에는 태조 7(1398)년에 숭교방(崇敎坊;明倫洞)에 창설되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제사하는 문묘(文廟)와 유학을 가르치는 명륜당(明倫堂), 그리고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 양재(東西兩齋) 및 부속 건물의 총칭이다.
문묘의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의 유학자(94명)와 우리나라 유학자(18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성균관의 관원으로는 지관사(知館事;弘文館·藝文館大提學)을 두고 전임관원으로 대사성(大司成) 1명, 제주(祭酒) 2명, 사성(司成) 1명, 사예(司藝) 2명, 사업(司業) 1명, 직강(直講) 4명, 전적(典籍) 13명, 박사(博士) 3명, 학정(學正) 3명, 학록(學錄) 3명, 학유(學諭) 3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박사 이하는 정원 외에 봉상시(奉常寺)의 관원과 사학(四學)의 훈도(訓導)가 겸직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額〕은 200명으로 생원(生員)·진사(進士)만 들어갈 수 있었으나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생도 가운데서 보충하였다. 뒤에 경비부족으로 120명, 말기에는 100명으로 감축되었다.
구한말인 1895년에는 성균관 경학과(經學科)를 부설하여 근대식 유학교육을 교수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문묘 향사외 기능만이 유지되다가 경학원(經學院)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는 명륜전문학교에서 성균관대학교로 발전되었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교육학용어사전, 1995. 6. 29., 하우동설)

 

6. 성균관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


1).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으로 설명 

 

 

성균관
[ 成均館 ]

 

 

이칭별칭
 태학(太學),  반궁(泮宮),  현관(賢關),  근궁(芹宮),  수선지지(首善之地),  경학원(經學院)

 

정의

 

조선시대에 인재양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

 

내용

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근궁(芹宮)·수선지지(首善之地)라고도 하였다.

인재양성을 위한 최고학부의 기원은 중국 주대(周代)에 천자의 도읍에 설립한 벽옹(辟雍)과 제후(諸侯)의 도읍에 설립한 반궁(泮宮)의 제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그리고 멀리는 고구려의 태학(太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 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成均)’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成均監)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배원정책(排元政策)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국자감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 한편 공민왕 즉위초에는 종래까지 성균관(국자감)에 유교학부(儒敎學部)와 함께 설치되어온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명실공히 유학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학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성균관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그대로 존치되었다. 조선왕조의 한양천도(漢陽遷都)에 따라 새 도읍지의 동북부지역인 숭교방(崇敎坊) 부근(지금의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터가 정해져서 1395년(태조 4)부터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3년 만에 대성전(大聖殿 : 단종 때 大成殿으로 개칭됨.)과 동무(東廡)·서무(西廡)의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정록소(正錄所)·식당·양현고(養賢庫) 등의 건물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의 성균관은 종전의 성균관과 달리 개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우리 나라 근대화에 대처해나갈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새롭게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경학과의 학제도 옛 학제와 달리 3년제 학교로서 학급이 편성되고 학년이 전·후 2학기로 구분되었으며, 입학시험을 통하여 학생을 선발하되 20세 이상 40세까지의 연령제한을 두었고,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만 졸업증명서를 주어 졸업시켰다.

학과목도 많이 달라져서 유학 등의 전통적 학과목 외에 본국역사(本國歷史)가 필수과목으로, 만국역사(萬國歷史)·본국지지(本國地誌)·만국지지(萬國地誌)·산술이 선택과목으로 설치되었는데, 이듬해인 1896년에는 선택과목도 모두 필수과목으로 바뀌었다.

 

그 뒤 1905년(광무 9)에 성균관의 관제가 개정되어 장이 칙임관(勅任官)으로, 교수가 3인으로 늘어나면서 판임관(判任官)으로 바뀌고, 박사(博士 : 판임관) 3인이 신설되었다. 박사는 1907년(융희 1)에 사업(司業)으로 개칭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이 경학 외에 기타 학과, 즉 신학문도 학습하는 곳으로 법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일본에 병탄된 지 1년 만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개혁을 강요당하여 경학원(經學院)으로 개칭되면서, 최고학부로서의 교육기능을 상실당하고 석전향사(釋奠享祀)와 재산관리를 주임무로 하는 기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전국 유림들에 의한 성균관 교육기능의 회복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 1930년에 경학원 부설로 명륜학원(明倫學院)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으로 승격되는 부령(府令)이 공포되었으며, 1942년에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인가를 얻어 신입생을 뽑고 교육에 임하였으나, 그 다음해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광분하느라 폐교 조치되고 말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고, 경학원도 성균관으로 환원되었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 명륜전문학교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그 대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설립되고 현재의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에 나타나는 성균관. 두산백과 설명요약.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성균관[ 成均館 ]        

 

고려말과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한국 최고의 학부기관으로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이다. 그때까지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바꾸면서부터이다. 1308년(충선왕 1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서무(西廡)·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완성되면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으며,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으로 지칭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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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의 갑오개혁은 성균관의 역사에서 중요한 굴절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갑오개혁이 단행되면서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면서 일정한 변모를 겪게 되었다. 성균관은 개화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유학과 도덕을 지켜 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그 전통은 계승되었다. 1785년(정조 9)에 편찬된 《태학지(太學志)》에는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및 성균관 제도의 변천과정, 유생의 활동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성균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된다.

 

.출처: 성균관[成均館] (두산백과)

 

 

2).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의 설명.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1946년 성균관대학 설립으로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성균관
[ 成均館 ]

 

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이다. 고려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성균관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의 것을 가리킨다. 과거 1차 시험 합격자, 즉 생원과 진사가 주로 입학했다. 입학시험을 거치거나 부모의 공덕을 엎고 입학한 자도 있었다. 이들은 동재와 서재(기숙사)에서 생활하며 2차 시험인 대과에 응시했다. 국가는 이들을 위해 토지와 노비를 제공했고, 양현고라는 장학 재단도 설치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주요 사건에 대해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식 교육 기관이 설립되어 그 위상이 흔들렸다. 1946년 성균관 대학이 설립되어 그 전통을 이어 나가고 있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 11. 15., (주)신원문화사)

 

3). 조선시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전국 유림대회에서 1946년 성균관대학을 다시 설립하였다고 설명.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은 교육 기관의 기능과 함께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시는 사묘(祠廟)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고 성균관을 사설전문학원으로 만들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전국 유림대회가 열리고 1946년 성균관대학을 다시 설립하였다. 성균관대학은 1963년 학교법인 성균관으로 재단법인 성균관과 분리되었다.
 

.출처: 유림[儒林]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 필자 주 1). 시사 상식사전의 성균관대학 설명부분은 맞는데, 종교관련 설명은 교과서 교육과 달리 일본강점기이후에 왜곡된 사상이 일부 반영된것 같다고 단서를 달아둠.

 

4). 시사상식사전의 설명. 성균관에 대해 유학을 전수하던 조선시대의 최고 국립종합대학이라고 설명.

 

[ 成均館 ]

 

유학을 전수하던 조선시대의 최고 국립종합대학

고려 충렬왕 때 국학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부흥시켜 순수한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최고 학부기관이 되었다. 입학자격은 생원, 진사와 15세 이상의 양반자제 및 유생(儒生)이 입학할 수 있고 정원은 120명이며, 수업연한은 9년이었다. 여기서 수업한 학생은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었다. 원생은 특권이 부여되어 권당(捲堂), 공재(空齋)와 알성시(謁聖試)의 은전이 있었으며, 교육 내용은 주로 경학(철학, 윤리), 역사, 문학 등이었다.

.출처:성균관[成均館]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5). 21세기 정치학 대사전의 설명.


성균관
[ 成均館 ]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의 뒤를 잇는 조선시대의 유학교육기관으로 인재양성을 위한 국립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다.

성균관에의 입학 자격은 대체로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주자학 정신을 배우며 동시에 성현을 섬김으로써 이론과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성현을 모시는 공간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숙소인 동/서재(東/西齋) 등과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 기단이나 건축양식 등이 이들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유교의 교육과 성현을 모시는 것은 성균관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도 이어져 이러한 교육체계는 조선의 선비를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추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6). 학습용어 개념사전의 성균관 설명

성균관
[ 成均館 ]

 

요약:고려 말과 조선 시대에 유교 교육을 담당하던 최고 교육 기관. 


고려 시대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고려 말에 성균관이라 고쳐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 교육 기관이 생길 때까지 조선 시대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다. 성균관에서는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을 입학시켜 높은 수준의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출처: 성균관 [成均館] (학습용어 개념사전, 2010. 8. 5., (주)북이십일 아울북)


 

 

. 필자 주 2). 을사조약(을사늑약), 한일병합(경술국치)의 일본강점기이후  성균관의 교육기능이 왜곡된후, 대학교육기관으로서의 성균관의 기능은 이전과 달라졌고, 대학이라기보다는 전문학교정도의 교육기관으로 격하되었다가, 일본강점기의 일제가 주도하여, 명륜전문학교를 세우고, 이 왜곡기간을 거친후에 해방이 되어, 전국 유림대회를 거친후 다시 성균관을 복구 설치한 대학이 현재의 사립 성균관대입니다.  이 외에 많은 자료들이 있으나, 위에 열거한 자료들로 마감 정리하였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고 있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 첨부자료


1.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의 무효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1905


2. 역대 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성균관. 개화기.대한제국기, 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대한민국 수립후 1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까지.

http://blog.daum.net/macmaca/1900


3. 한일합방과 을사 5조약이 원천무효라고 결의한 한국 국회결의. 그리고 한일합방건 일본정부 발표에대해 원천무효라고 밝힌 한국 외무부

 

http://blog.daum.net/macmaca/712

 

4. 일본강점기때 폐지.왜곡된 성균관. 해방후에 설립(재건승계)된 성균관대학교가 조선(대한제국) 최고대학 성균관을 승계하였다는 정부출연 연구기관.백과사전.성균관대 학교당국의 현대 한국사적 입장에 대한 학술적 고찰. 그리고 한국사의 성균관대(성균관에서 이어짐)와 세계사를 연계하여 해방이후 합법적으로 설립된 敎皇聖下 윤허대학인 예수회의 서강대와의 Royal.Imperial 특성의 공통점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733       

 

5. 自然人에 대한 공평한 능력우대와 달리 法人體로볼때, 일본 강점기 잔재 경성제대.관립전문학교 후신 서울대등은  한국영토에 주권없고 축출해야 할 강점기 잔재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732

 

6. 교과서적 기득권 대학들의 자격을 바탕으로, 필자가 주관적인 World Class Universities들을 정의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습니다.    

  

 World Class Universities. 

http://blog.daum.net/macmaca/1812    

 

 

7. 종교인구 조사를 어떻게 해도, 응답자가 자기종교를 어떻게 표기해도 한국인은 모두 유교도임.

 

http://blog.daum.net/macmaca/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