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의 형(神獸之形) 11

Wagi200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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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재형과 민혁, 봉황은 각기 햄버거를 물고 어제밤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제밤 갑자기 깨어난 봉황은 '귀신'과 대화를 했고
그대로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때리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던 녀석은 정오가 지나서야 깼다.
학교에도 못 가고 봉황을 지키고 있던 재형과 민혁은 죽을 맛이었지만
봉황은 산뜻하게 일어나 밥을 찾았다.

 

패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채근해 들은 이야기는 실로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민혁은 새하얗게 질려서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너네 선조라니까."
"그럴 리가 없어!"

 

경악을 한 민혁이 가게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 눈총을 받건말건
봉황은 시큰둥한 어조로 귀신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고 있었다.

 

"조용히 좀 해봐. 이야기 끊지 말고."

 

재형이 찌릿 노려보자 민혁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은 어제 봉황이 귀신과 이야기하는 광경을 본 이후로는
아예 재형에게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귀신뿐 아니라 봉황까지 무서운 모양이어서
재형은 조금 죄책감을 느끼고 봉황의 눈치를 살폈지만
마이페이스인 봉황은 그저 무심히 보아넘겼다.

 

"그러니까 그 귀신은 민혁이 선조인데, 지금 여자를 찾고 있단 말이지?"
"응."
"그 여자가 누군데?"
"몰라. 그냥 혼자 온갖 주접을 떨면서 그 여자에 대한 것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더라.
무슨, 처음에 봤을 때 월궁의 항아인줄 알았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옥구슬같았네, 등등.
지 애인 자랑은 엄청나게 하더군."

 

흐음, 재형은 가늘게 눈을 뜨고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봤다.

 

"근데 왜 갑자기 민혁이한테 나타난건데?"
"그러니까, 이 녀석 선조라니까."
"아니, 그거 말고,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깬 거냐고."
"그냥 어느날 눈떠보니까 허공을 떠다니고 있더래.
그냥 익숙한 기운에 끌려 온 데가 민혁이 방이더라는데."
"자기가 귀신인 건 알아?"
"응, 여자가 죽을때 맹세했대. 다시 태어나도 그 여자옆에 있겠노라고.
그럴려고 자살했다더라. "
"끄응."

 

재형은 들으면 들을수록 알쏭달쏭한 이야기에 머리를 감쌌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거란 말인가.
그러니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 남자가 여자가 죽게 되니까 따라죽었다는 거 아냐.
그럼 그 여자도 귀신이란 말이야?

 

자기 목숨으로 여자 곁에 태어나겠다고 맹세를 했고.
그럼 여자가 환생한 건가? 그런데 남자는 귀신으로 깨어나?

 

"그럼 왜 나한테 나타나는 건데."
"뭐, 몸을 뺐겠다던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했던 재형은 민혁의 괴성에 얼른 입을 막았다.
거의 발광의 수준이 된 민혁은 재형에게 입을 틀어막히자 이번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뭐, 귀신이 들러붙는 경우는 대개가 들어갈 몸이 필요해서긴 하지."

 

저 새끼, 저거!

아무렇지도 않게 맞장구를 치는 봉황을 한번 찌릿 노려봐주고 재형은 다시 민혁을 달랬다.

 

"진정해, 진정."
"너같으면 진정하겠냐? 귀, 읍."

 

재형은 눈이 돌아간 민혁의 입을 틀어막고 급하게 가게에서 끌고 나왔다.

아무래도 이 녀석 완전히 맛이 간 거 같다.

하긴, 귀신한테 몸을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제정신인 쪽이 더 이상하다.

 

봉황은 사람들이 처다보건말건
트레이에 놓인 쓰레기를 처리하는 여유까지 부리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근처에 있는 공원까지 와서야 손을 놔주었다.
예상보다 더 심하게 민혁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더니 벤치에 축 늘어졌다.

 

"야, 확실한 것도 아닌데 너무 힘빼지 마. 좀 정리를 해보자."

 

살쌀한 날씨에 절로 입김이 날아오른다.
절망과 공포로 쳐진 민혁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무섭기도 하겠지.

 

재형은 안스러운 눈으로 민혁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최소한 우는 것만은 못 본 척 해줄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걸 어떻게든 해결해야한다.
눈뜨고 멍하니 당할 수는 없다.
더구나 아직 확실하게 몸을 빼앗길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재형은 잠깐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들은 다 아마추어다.
자신과 별다를게 없는 수준으로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짜도 이렇다할 방법이 없었다.

 

"가자."
"어디를 가?"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으로 입술을 깨문 재형이 날카롭게 쏘아붙이는데도
봉황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휘적휘적 걸었다.

 

"근처에 선생님 댁이 있어."
"선생님?"

 

눈섭을 치켜올리던 재형은 억지로 민혁을 일으켰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일어나지 않으려는 민혁이 놈을 질질 끌고 봉황의 보조를 맞추려니 너무 힘이 든다.

 

재형은 곧 죽을 놈처럼 흐물거리는 민혁이 보기 싫어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니가 지금 당장 죽냐? 뭐든 해봐야 할 거 아냐?
이대로 정신놓고 고이 몸 상납할래?"

 

재형의 호통에 민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니가 뭘 알아? 너야 지금 재밌어 죽을지 몰라도 난, 난!"
"새꺄, 재밌어? 넌 지금 내가 재밌어서 이러는거 같냐?
아무리 정신없는 처지라도 할말 있고 안할말 있어."
"무서워…무섭다고… 재형아, 나 어쩌냐…"
"미친놈. 하늘이 무너졌냐, 왜 울고 지랄이야. 입닥쳐."

 

민혁이에게 쏘아붙인 재형은 저만큼 가는 봉황을 불러세웠다.

 

"같이 가, 새끼야."

 

의외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던 봉황은 민혁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런 약한 정신으론 귀신밥 되기 딱 좋지."
"너도 입 다물어. 염장지르냐. 이 새끼 이러는 거 당연해.
나라도 이 입장이면 제정신 못 차려.
너, 제발 말좀 함부로 하지 마라.
너 그러는거 무슨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닌건 아는데 상태 봐가면서 해.
니 눈엔 지금 이놈이 제정신인거 같냐."
"거기 가서도 그러면 뒷일 책임 못 져.
그 영감, 엄청나게 괄괄해서 울고 들어오는 놈들은 마구 두들겨 팬다."

 

그러니까, 지금… 아까 그말이 나름대로 충고였던 거냐.

 

재형은 기가 막혀서 하늘을 봤다.

 

그게 시비거는 거지,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냐. 아무튼 저 새낀.

 

"근데 어떤 선생님이야?"

 

재형의 말에 봉황이 잔뜩 인상을 구겼다.

 

"어렸을때 그 영감한테 다녔어. 너도 알지? 나, 이상한거 봤던거."
"아, 그, 유명한 퇴마사(退魔師)라는?"
"퇴마사는 무슨. 그 영감, 영매(靈媒)야."

 

그말을 끝으로 봉황은 입을 다물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재형은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끌어들이길 잘했다고 중얼거렸다.
정말로 봉황이 없었다면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잠깐, 그러면 봉황 녀석 아직도 그런 것들을 보는 건가?

 

재형은 묵묵히 앞서 걷는 봉황의 단정한 옆얼굴을 훔쳐보며
그 서늘한 눈이 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아주 잠깐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