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득권, 서유럽의 교황.왕의경우, 후발세력이나, 신하가 이겨도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윤진한201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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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득권, 서유럽의 교황.왕의경우, 후발세력이나, 신하가 이겨도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카노사의 굴욕과, 영국 호국경 크롬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봉건 사회와 손잡고 꾸준히 세력을 키워간 결과 서유럽의 정신 세계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교회는 많은 토지와 재물을 헌납받아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봉건 영주가 되었다.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잡아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짐에 따라서 성직자 중 타락하여 성직을 사고파는 일까지 성행하였다.
12, 13세기의 법률책에는 중세 사회의 서열이 기록되어 있다. 사회 신분은 모두 24계층으로서, 영주는 10위, 국왕은 8위, 황제라 하더라도 7위였다. 1위에서 6위까지의 상위권의 경우 1위는 하나님, 다음이 교황, 이하 주교, 수도원장, 수녀, 사제 등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 권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 것은 1077년의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 선출에 부정이 행해지고, 교회 재산이 횡령되는 등 못된 짓이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패를 척결하고, 올바른 신앙을 되찾으며, 교회의 쇄신을 도모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 10세기에 창건된 클뤼니 수도원은 교회 쇄신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정신을 이어 개혁에 나선 것이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옛날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봉직한 바 있는 유서있는 도시 밀라노에서 보란 듯이 주교를 임명하여, 교황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였다. 교황은 즉시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황제를 교회로부터 추방했고, 모든 기독교인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에는 서로 두 번에 걸쳐 상대방을 폐위 · 파문하는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황제측이 그레고리우스의 파면을 결의하면,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파문하여 황제권의 행사를 금지하였다.
이 사태에 대해 독일 제후는 1년 이내에 황제의 파문이 해제되지 않을 경우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세우기로 결의했고 일반 민중도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인리히는 교황과 맞서서는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하나의 희망은 교회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용서를 빌기 위해 교황이 있는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이미 연말이라 라인 강도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하인리히는 12월에 가족과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었다.
하인리히가 로마에 당도해보니 그레고리우스 7세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에 도착한 뒤였다. 하인리히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뒤따라가 카노사에 도착하였다. 1077년 1월의 일이었다.
하인리히는 죄를 뉘우치는 자를 뜻하는 흰옷을 입고, 맨발로 성문 앞에 하루종일 서 있었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틀째도 맨발로 눈 속에 서 있었다. 사흘째도 처분만 기다리며 서 있었다. 저녁 늦게야 비로소 성문이 열렸다.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인 황제는 교황 앞에 서서 애원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서약을 받아들여 사면하였다.
파문이 해제되고 다시금 독일 제후의 충성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에 대한 설욕에 나섰다. 교황은 다시금 황제를 파문하고 그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독일 제후들에게 이 조치가 교황의 월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세웠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에 진군하였다. 1083년의 일이었다.
교황은 다급하여 로마 시내에 있는 카스테로 안젤로 요새로 피신하여 농성하다가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군대에 의해 구출되어, 노르만 군과 함께 남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도주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곳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085년에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랑 중에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죽음이 황제에 대한 원한 때문에 "분해서 죽었다"고 말하였다.
.출처: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가람기획)
. 필자 주 1). 위에서 하나님이라고 표기한것은 틀린표현. 가톨릭의 경우 한국어 번역은 하느님임.
. 필자 주 2). 위 본문에 나타난 중세사회의 서열.
12, 13세기의 법률책에는 중세 사회의 서열이 기록되어 있다. 사회 신분은 모두 24계층으로서, 영주는 10위, 국왕은 8위, 황제라 하더라도 7위였다. 1위에서 6위까지의 상위권의 경우 1위는 하나님, 다음이 교황, 이하 주교, 수도원장, 수녀, 사제 등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 권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 것은 1077년의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 필자 주 2-1).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로마제국중심의 법률책으로도 보여지는데, 로마제국의 기득권세력들이 서로마제국의 붕괴이후 정해놓은 서열같기도 합니다.
. 필자 주 2-2). 종교적으로 중국 天子라는 개념을 대입해보면, 이해가 가는 서열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天子(최고 제사장)와 황제(정치적의미가 강한 지배자)가 겸직이었습니다. 祭政일치의 사회였었지요. 서로마제국이 붕괴한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의 기득권인 로마 교황이 세속의 황제나 왕보다 아주 높았군요. 이렇게 보면 서유럽의 황제나 왕들은 역사적으로 로마 황제나 로마 교황을 극복해올수 없던 신분으로 보여집니다. 중국 천자나 중국 황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아시아 국가들처럼...
@ 한국 고려시대 무신란에서 왕을 죽였어도 고려왕조는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영국도 왕을 이긴 크롬웰이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통치하다가, 나중에 크롬웰이 죽고나서,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가 즉위하여, 오늘날까지 王政이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영국 크롬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는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 1642~1651)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시작되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53년에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초대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1658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전권(專權)을 행사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영국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헌팅던(Huntingdon)에서 젠트리(Gentry)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크롬웰(Robert Cromwell, 1560~1617)은 지주(地主)로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때에 하원의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6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크롬웰은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케임브리지(Cambridge)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월 에지힐(Edgehill)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워 군사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켰으며, 그의 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1643년 7월 게인즈버러(Gainsborough) 전투, 1644년 마스턴무어(Marston Moor) 전투 등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기병대는 철기대(鐵騎隊, Ironsides)라는 명성을 얻었다. 1645년 의회파는 그의 부대를 본떠 신형군(New Model Army)을 편성했으며, 크롬웰은 이를 이끌고 네이즈비(Naseby)와 랭포트(Langport)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646년 찰스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Oxford)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1654년 9월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655년 1월 해산하였고, 1656년 9월에 소집된 의회도 1658년 2월에 다시 해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법률 개혁과 교육 진흥 등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라틴어 교육을 담당하는 중등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655년 왕당파의 반란이 다시 일어나자, 전국을 10여개의 군사구역으로 나누어 군정장관을 배치하는 등 군정(軍政)을 강화하였다. 크롬웰은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1608~1670)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내걸려졌다.
.출처: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두산백과)
@ 중국은 역사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유교 天子(국지적으로 한국이나 일본 및 기타 여러나라가 황제나 천황용어를 써도,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사개념의 Emperor 개념이 아니라 국지적 용어에 머물게 됩니다)의 나라며, 황하문명, 유교의 종주국, 대학의 원천인 漢나라 太學.國子監의 나라입니다.
Emperor개념의 황제는 중국황제, 로마황제,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서유럽의 새로운 황제나 왕보다 서열이 높던 로마 교황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유럽개념의 황제는 로마 교황보다 낮은 프랑스황제, 신성 로마제국 황제, 독일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러시아 황제등이 가장 적절해왔던 것 같습니다. 여러 국가를 통치하고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Emperor개념의 황제가 되는것이며, 한국의 경우는 대한제국황제가 제천의식을 행하고, 밑에 자기 아들들에 부여한 왕의 칭호(영친왕, 의친왕)로 황제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제의 지위를 승계할 경우에는 Emperor개념의 황제아닌, 局地的으로 한국에서 제천의식을 행사하거나, 밑에 왕을 두는 한국만의 국지적 황제로 인식하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황제나 독일황제처럼 중세시대 로마 교황밑에 있던 후발 황제들이 프랑스 황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러시아황제, 독일황제, 기타 황제 같습니다.
근대에 형성된 대한제국 황제나 일본 천황도 이정도 개념입니다. 중국 천자밑의 새로운 황제나 천황. 기타 아시아의 황제칭호 쓰던 나라들도 이정도 개념입니다.
@ 이에 따라, 필자(성균관대 출신 윤진한, 宮 儒)는 다음의 한국 公敎育전통을 반영하여 교과서적 정설을 중심으로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한국은 공교육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는 세계사나, 한국사, 기타 여러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전문학술서적.논문의 저자가 아니므로, 교과서나 참고서, 학교 公敎育, 백과사전, 정부방침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에 따라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학이나 종교, 왕의지위, 역사등에 관련하여서는 대중언론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적 기득권, 서유럽의 교황.왕의경우, 후발세력이나, 신하가 이겨도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역사적 기득권, 서유럽의 교황.왕의경우, 후발세력이나, 신하가 이겨도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세계사에서 가르치는 카노사의 굴욕과, 영국 호국경 크롬웰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봉건 사회와 손잡고 꾸준히 세력을 키워간 결과 서유럽의 정신 세계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교회는 많은 토지와 재물을 헌납받아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봉건 영주가 되었다.
교회가 세속의 권력과 손잡아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짐에 따라서 성직자 중 타락하여 성직을 사고파는 일까지 성행하였다.
12, 13세기의 법률책에는 중세 사회의 서열이 기록되어 있다. 사회 신분은 모두 24계층으로서, 영주는 10위, 국왕은 8위, 황제라 하더라도 7위였다. 1위에서 6위까지의 상위권의 경우 1위는 하나님, 다음이 교황, 이하 주교, 수도원장, 수녀, 사제 등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 권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 것은 1077년의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 선출에 부정이 행해지고, 교회 재산이 횡령되는 등 못된 짓이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패를 척결하고, 올바른 신앙을 되찾으며, 교회의 쇄신을 도모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중 10세기에 창건된 클뤼니 수도원은 교회 쇄신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정신을 이어 개혁에 나선 것이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옛날 성 암브로시우스가 주교로 봉직한 바 있는 유서있는 도시 밀라노에서 보란 듯이 주교를 임명하여, 교황의 명령을 정면으로 무시하였다. 교황은 즉시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황제를 교회로부터 추방했고, 모든 기독교인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사이에는 서로 두 번에 걸쳐 상대방을 폐위 · 파문하는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황제측이 그레고리우스의 파면을 결의하면,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를 파문하여 황제권의 행사를 금지하였다.
이 사태에 대해 독일 제후는 1년 이내에 황제의 파문이 해제되지 않을 경우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황제를 세우기로 결의했고 일반 민중도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인리히는 교황과 맞서서는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하나의 희망은 교회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용서를 빌기 위해 교황이 있는 로마를 향해 길을 떠났다. 때는 이미 연말이라 라인 강도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하인리히는 12월에 가족과 소수의 추종자를 데리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었다.
하인리히가 로마에 당도해보니 그레고리우스 7세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에 도착한 뒤였다. 하인리히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뒤따라가 카노사에 도착하였다. 1077년 1월의 일이었다.
하인리히는 죄를 뉘우치는 자를 뜻하는 흰옷을 입고, 맨발로 성문 앞에 하루종일 서 있었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틀째도 맨발로 눈 속에 서 있었다. 사흘째도 처분만 기다리며 서 있었다. 저녁 늦게야 비로소 성문이 열렸다.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인 황제는 교황 앞에 서서 애원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서약을 받아들여 사면하였다.
파문이 해제되고 다시금 독일 제후의 충성을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에 대한 설욕에 나섰다. 교황은 다시금 황제를 파문하고 그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독일 제후들에게 이 조치가 교황의 월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라벤나의 대주교 클레멘스 3세를 교황으로 세웠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로마에 진군하였다. 1083년의 일이었다.
교황은 다급하여 로마 시내에 있는 카스테로 안젤로 요새로 피신하여 농성하다가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군대에 의해 구출되어, 노르만 군과 함께 남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도주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곳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085년에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랑 중에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죽음이 황제에 대한 원한 때문에 "분해서 죽었다"고 말하였다.
.출처: 눈 속에 맨발로 서서 애원한 황제- 카노사의 굴욕(1077년) (세계사 다이제스트 100, 2010. 8. 13., 가람기획)
. 필자 주 1). 위에서 하나님이라고 표기한것은 틀린표현. 가톨릭의 경우 한국어 번역은 하느님임.
. 필자 주 2). 위 본문에 나타난 중세사회의 서열.
12, 13세기의 법률책에는 중세 사회의 서열이 기록되어 있다. 사회 신분은 모두 24계층으로서, 영주는 10위, 국왕은 8위, 황제라 하더라도 7위였다. 1위에서 6위까지의 상위권의 경우 1위는 하나님, 다음이 교황, 이하 주교, 수도원장, 수녀, 사제 등 성직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 권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된 것은 1077년의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다.
. 필자 주 2-1).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이 남아있던 로마제국중심의 법률책으로도 보여지는데, 로마제국의 기득권세력들이 서로마제국의 붕괴이후 정해놓은 서열같기도 합니다.
. 필자 주 2-2). 종교적으로 중국 天子라는 개념을 대입해보면, 이해가 가는 서열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天子(최고 제사장)와 황제(정치적의미가 강한 지배자)가 겸직이었습니다. 祭政일치의 사회였었지요. 서로마제국이 붕괴한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의 기득권인 로마 교황이 세속의 황제나 왕보다 아주 높았군요. 이렇게 보면 서유럽의 황제나 왕들은 역사적으로 로마 황제나 로마 교황을 극복해올수 없던 신분으로 보여집니다. 중국 천자나 중국 황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아시아 국가들처럼...
@ 한국 고려시대 무신란에서 왕을 죽였어도 고려왕조는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영국도 왕을 이긴 크롬웰이 호국경의 자리에 올라, 통치하다가, 나중에 크롬웰이 죽고나서,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가 즉위하여, 오늘날까지 王政이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영국 크롬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고도 불리는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 1642~1651)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시작되자, 혁명군을 지휘하여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Commonwealth)을 수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653년에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하여 초대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1658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전권(專權)을 행사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영국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의 헌팅던(Huntingdon)에서 젠트리(Gentry)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크롬웰(Robert Cromwell, 1560~1617)은 지주(地主)로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 때에 하원의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6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하자, 크롬웰은 단기의회(Short Parliament),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케임브리지(Cambridge)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다. 1642년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영국내전(English Civil Wars)이 일어나자, 크롬웰은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10월 에지힐(Edgehill) 전투에 참여해 전공을 세워 군사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켰으며, 그의 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戰果)를 거두었다. 1643년 7월 게인즈버러(Gainsborough) 전투, 1644년 마스턴무어(Marston Moor) 전투 등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기병대는 철기대(鐵騎隊, Ironsides)라는 명성을 얻었다. 1645년 의회파는 그의 부대를 본떠 신형군(New Model Army)을 편성했으며, 크롬웰은 이를 이끌고 네이즈비(Naseby)와 랭포트(Langport)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646년 찰스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Oxford)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648년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찰스 1세가 아일오브와이트(Isle of Wight)로 탈주하면서 제2차 내전이 일어났다. 크롬웰은 웨일스(Wales)로 원정하여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였고, 잉글랜드로 침입해 오던 스코틀랜드(Scotland)군을 프레스턴(Preston)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1월 30일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세웠다....
1653년 12월 16일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랐다.
호국경이 된 크롬웰은 1654년 9월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1655년 1월 해산하였고, 1656년 9월에 소집된 의회도 1658년 2월에 다시 해산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법률 개혁과 교육 진흥 등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라틴어 교육을 담당하는 중등학교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655년 왕당파의 반란이 다시 일어나자, 전국을 10여개의 군사구역으로 나누어 군정장관을 배치하는 등 군정(軍政)을 강화하였다. 크롬웰은 1658년 병으로 런던(London)의 화이트홀(Whitehall)에서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에 묻혔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으나, 멍크(George Monck, 1608~1670)에 의해 1660년 왕정이 복고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다. 왕정 복고 후에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도 내걸려졌다.
.출처: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두산백과)
@ 중국은 역사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유교 天子(국지적으로 한국이나 일본 및 기타 여러나라가 황제나 천황용어를 써도, 장기적으로 보면 세계사개념의 Emperor 개념이 아니라 국지적 용어에 머물게 됩니다)의 나라며, 황하문명, 유교의 종주국, 대학의 원천인 漢나라 太學.國子監의 나라입니다.
Emperor개념의 황제는 중국황제, 로마황제, 서로마제국 멸망이후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서유럽의 새로운 황제나 왕보다 서열이 높던 로마 교황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유럽개념의 황제는 로마 교황보다 낮은 프랑스황제, 신성 로마제국 황제, 독일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러시아 황제등이 가장 적절해왔던 것 같습니다. 여러 국가를 통치하고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Emperor개념의 황제가 되는것이며, 한국의 경우는 대한제국황제가 제천의식을 행하고, 밑에 자기 아들들에 부여한 왕의 칭호(영친왕, 의친왕)로 황제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제의 지위를 승계할 경우에는 Emperor개념의 황제아닌, 局地的으로 한국에서 제천의식을 행사하거나, 밑에 왕을 두는 한국만의 국지적 황제로 인식하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황제나 독일황제처럼 중세시대 로마 교황밑에 있던 후발 황제들이 프랑스 황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러시아황제, 독일황제, 기타 황제 같습니다.
근대에 형성된 대한제국 황제나 일본 천황도 이정도 개념입니다. 중국 천자밑의 새로운 황제나 천황. 기타 아시아의 황제칭호 쓰던 나라들도 이정도 개념입니다.
@ 이에 따라, 필자(성균관대 출신 윤진한, 宮 儒)는 다음의 한국 公敎育전통을 반영하여 교과서적 정설을 중심으로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한국은 공교육에서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 다 음 -
1. 한국사 성균관(해방후에 성균관대로 계승되어 600년 역사를 인정받고 있음),
2. 윤리나 한문(또는 국어의 고전)수업에서 가르치는 유교교육 삼강오륜(공자님과 맹자님의 가르침).
3. 세계사 교육:세계사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판단됨. 그리고 학술적으로 중국의 황하문명이나 한나라 태학. 유교등도 기득권을 중요하게 인정해온 경향
1). 황하문명, 유교, 중국 한나라 태학(그 이후의 국자감. 국자감은 청나라때 경사대학당이 되고 이후 북경대로 계승됨)
2). 에게문명, 로마 가톨릭, 중세유럽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 파리대학등
. 구한말 國外에서 외국세력의 힘과, 한국내에서 유교와의 마찰에 놀란 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펴고,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 수용까지 거부하면서 유교를 지킨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시대가 되었으므로, 근대 중국의 침체기 및 한국의 수난기에, 세계사의 주도세력으로 여러 학자들 이름이 거론되는 서유럽과 교황청의 전통과 자격을 감안하여, 유교나 한국에 필요한 가톨릭 예수회(서강대)임을 강하게 느껴, 宮 성균관대=御 서강대임은 변하지 않습니다.
@ 필자는 세계사나, 한국사, 기타 여러 교과서(참고서 포함).백과사전.전문학술서적.논문의 저자가 아니므로, 교과서나 참고서, 학교 公敎育, 백과사전, 정부방침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에 따라 의견을 제시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대학이나 종교, 왕의지위, 역사등에 관련하여서는 대중언론의견은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일본 강점기로 파괴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패전국에 항복국가가 된 戰犯國(UN敵國) 일본이 왜곡시키고 단절시켰던, 한국의 유교와 교육등을 되돌아보고, 주권수호.상실주권 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