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았던 나의 첫사랑

사랑하는은동아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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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기 나보다 나이 많고 현명하신 분들 수두룩한 거 잘 알지만 편하게 반말로 할게. 이 글은 내 고백 같은 거라서 그게 편할 것 같아.

나는 어제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닌,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은 상태의 스무 살이야. 가뜩이나 할 일 없는 밤도 길고 이런저런 생각도 들어서 잠을 설치는데, 머리나 정리할 겸 내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꺼내보려고 해.

‘처음’이란 것은 그게 무슨 경험이었던 간에 누구에게나 오래 기억으로 남는 것 같아. 내가 처음 초등학교에 가던 날이었어. 엄마 손을 잡고 검게 깔린 아스팔트길과 그 길 위로 길게 칠해진 흰 점선을 따라 밟으면서 처음 보는 길을 걸었던 게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의 기억이야. 나와 비슷한 키, 비슷한 설렘을 가지고 교실에 앉아 있던 친구들의 모습이 약간 흐릿하게 남아있어. 그리고 바로 그 날이 그 후의 10년을 크게 바꾸는 날이었지.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어떤 여자애 옆에 서있던 아줌마에게 엄마가 다가가서 반갑게 아는 척을 했던 게 기억이 나. 나중에 엄마가 말해줬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여자애니까 친하게 지내라고 했어.

그 애의 이름을 사랑의 순우리말인 다솜이로 할게. 다솜이의 첫인상은… 생각해 본 적이야 없었지만, 결코 나쁘지 않았어.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밝은 표정을 품은 모습은 생기가 넘쳤었어. 엄청 활달하고 장난기가 많아서 그렇게까지 빨리 친해진 여자애는 그 이후로도 없었던 것 같아. 요새는 잘 안 쓰는 단어지만 ‘왈가닥’이라는 표현이 정말 딱 인, 그런 애였어.

다솜이랑 놀고 싶다. 학교가 끝나고 매일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왜인지 이유는 몰랐어. 나는 정신적으로 성장이 느린 남자아이였고,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만큼 크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본능에 충실해서 행동했었지. 나는 매일 동네 놀이터에서 다솜이를 포함해 많은 친구들과 놀았어. 그냥 같이 있으면 즐거웠고 없으면 또 보고 싶었어. 엄마에게 그렇다고 말했더니 그건 다솜이와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이라고 대답해 주셨었어. 어린 나는 ‘아, 나는 다솜이와 친구 하고 싶은 거구나.’하고 받아들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단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 애를 이성으로 볼 수 있을 만큼만 머리가 컸더라면 내 인생의 그래프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꺾여갔을 거라고 생각을 하곤 해.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일찍 해봐야 늦은 거라고 하니, 그냥 지금의 상황에 만족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언제나 그렇지만 ‘대중’이란 때에 따라서 참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 같아. 여러 사람의 목소리는 진실도 왜곡하고 없는 사실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 사실을 어느 사건을 통해서 깨달았어.

워낙 예전 일이라서 정확한 시기는 기억하질 못해. 하지만 1학년 때였던 건 맞는 것 같아. 그 애와 아직 같은 반일 수 있었던 순간이었거든. 우리 반의 어떤 남자애가 한 여자애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사건이 있었어. 그 여자애는 평소에 짓궂은 장난이 심했던 그 아이를 싫어했고, 단박에 거절했지. 그리고 그 사실을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어. 소문은 곧 여자애들 사이로 퍼졌고, 반 전체가 그 사실을 알게 됐지. 그 다음 날부터 그 남자애의 수난시대가 시작 됐던 거야.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다음날 학교에 와서 알게 됐어. 칠판 가득 두 친구의 이름이 써져 있고, 하나같이 이름들 사이에 ♡가 껴있었지. 칠판은 물론 벽에도 연필로 쓴 글씨가 곳곳에 있었고, 책상에도 비슷한 글씨체로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어. 소문의 그 남자애는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말리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지. 장난기 심한 남자애들은 심지어 고백을 받았던 여자애에도 얼레리꼴레리 하며 놀려댔었어. 사귀느니 어쩌느니, 이미 뽀뽀까지 했다느니 하면서 이 반 저 반 말하고 다녔지. 그런 일이 터진 게 우리들 사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였어서 그 소문을 모두 진실로 믿는 애들도 꽤 많았던 것 같아. 결국 여자애는 놀림을 받다 못해 울었고 그 남자애는 그 애와의 사이가 완전히 벌어졌지. 결국 주먹다툼도 생겼고 부모님도 학교로 불려왔었어. 그리고 그 여자애는 그 후로그 남자애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지.

나는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엄청 겁을 먹었었어. 일단 내가 다솜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냥 우정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다솜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 그 동안의 내겐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저 책에서만 배운 글자일 뿐이었는데, 그 사건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그 존재를 느끼고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게 다른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너무 두려웠어. 사건의 여자애가 그랬던 것처럼 아예 나와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할까봐 말이야. 다솜이를 잃을까봐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일부러 평소보다 다솜이와 자주 놀지도 않고 같이 다니는 일도 적게 하기도 했지.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하고자 하는 표현을 아끼고 속으로만 품는 습관을 가지게 됐는지 몰라.

그 후로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나는 다솜이와 많은 기억을 공유했어. 엄마들끼리 아주 친해져서 몇 년 동안 학원을 같이 다녔거든. 학교가 끝나면 같이 학원차가 오는 곳까지 걸어가서 둘이서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여름방학이면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학원이 있는 곳까지 걸었어. 학원에서도 같은 반이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눈 떠있는 시간의 절반은 되었고, 내 인생에서 그 어떤 때보다도 그 애와 스스럼없이 긴 시간동안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내가 추억하는 가장 소중한 순간이기도 했어. 그때는 미처 자각 못했을지라도, 나는 너무 행복했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에 중학교가 하나 있었어. 그리고 우리 초등학교에서 평균 70%는 다 그 중학교로 진학을 했었지.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 중학교의 교복을 입게 됐고 다솜이도 나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어. 하지만 그 시절쯤 내게 큰 변화가 왔어. 사춘기가 시작된 거야. 여자애들에 대한 시선과 개념이 미숙하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바뀌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은 학교의 질 나쁜 무리들에게 찍히면서 더 소심하게 변했어.

학교에 가는 게 겁이 나던 시절도 있었지. 학교에서 일진들한테 괴롭힘 당할 때에 주위에 있던 여자애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고, 자존감이 한창 바닥을 칠 때였어. 지금은 많이 극복했지만 여자애 눈을 보고 말 할 수도 없었었어. 한창 성숙해지며 여성으로 보이기 시작한 그 애들을 보는 게 부끄러웠고, 내 모습이 찌질해 보여서 창피했거든. 한창 다솜이와 사이가 멀어졌던 시기기도 했어. 같은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3년 동안 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어. 그렇다고 딱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한 건 또 아니었어. 단지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엇갈렸었던 거지.

또 한걸음 그 애와 멀어지는 것 같았던 대화가 기억나. 중학교 3학년 때였고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 그런데 한창 책을 읽는 도중에 책 위로 누군가의 옅은 그림자가 내려앉는 게 보였어. 친구가 장난치려고 그러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책을 읽었지. 그런데 전혀 의외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지금도 귀에 올리는 것 같은, 또한 내가 그 애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세 글자, 내 이름이었지.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애가 나를 보고 서있었어. 황토색 교복조끼에 어제 빤 듯이 새하얀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우리가 미역색이라고 부르던 색깔의 교복치마를 입고 한 손엔 책을 들고 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 그리고 그 모습이 너무 밝아보여서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댔어. 내게 오랜만이다? 하고 말을 건네는 그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대답했지. 그런데 갑자기 그 애가 들고 있던 책을 내밀면서 이 문제 풀 수 있냐고 물어봤어. 수학문제였고, 삼각형 안에 원이 그려져 있고 그 지름을 구하는 문제였던 것 같아. 나는 순간 그 애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었어. 단지 문제를 푸는 거라면, 그 애를 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말이야.

한참을 샤프를 쥐고 있던 내가 그 애에게 했던 말은 야, 못 풀겠다. 였어. 스스로도 너무 한심했지. 다솜이는 그래? 알았어. 하고 도서관을 나갔어. 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어. 말이라도 더 건낼 걸. 문제가 너무 어려운거 아니냐고 하면서 농담이라도 할 걸. 왜 바보같이 그냥 얼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쪼아댔지. 그리고 그때 본 다솜이의 모습이 너무 밝아보여서, 마치 아침 해에서 쏟아져 내린 햇빛처럼 따듯하고 밝지만 만질 수 없는 그런 것 같아서 그랬다고 스스로에게 변명했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겨울이 찾아왔다가 물러갔고, 나는 집에서 좀 떨어진 전통 있는 남자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어. 그리고 다솜이는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고 들었어.

고등학생이 된 후 한참동안을 다솜이와 만나지도 못했고,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지냈어. 그러다가 고2때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부산을 놀러갔던 적이 있었어. 순천으로 내려온 후에 피시방에 가겠다는 친구들을 보내고 혼자 집을 향해 걷던 중이었지.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마침 풀린 신발 끈이 눈에 띄더라고. 한쪽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고 있었지. 그런데 저 앞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오래도록 그리운 목소리였어.

하지만 누군지 확인하려고, 진짜 그 사람인지 내 온 몸이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었어. 그렇게 서서히 든 것도 아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토끼눈을 뜨고 점점 머리를 드는 모든 순간순간의 장면이 영화처럼 느리게 보였어. 그리고 저 멀리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다솜이가 보였어. 그리고 그 뒤로 파란불이 보이고 몇 초 남지 않은 시간이 보였어. 나는 그때 그 신호를 넘겨야 했어. 내가 있던 자리에서 다솜이를 기다렸다가 잠깐이라도 같이 있어야 했어. 하지만 내 머리의 신경회로가 그 자리에서 꼬여버렸어. 나는 어! 안녕!하고 누가 들어도 당황한 말투로 크게 소리치고는 다 묶지도 못한 신발 끈을 끌고 달려 나가서 그 애를 지나쳐버렸어.

-할 말이 너무 길어서 여기까지 쓰고 끊고 나중에 더 올릴게... 누가 볼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싶은 그린 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