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북 소도시에서 컸고 대학을 부산에서 다녔습니다.
직장을 서울에서 잡아서 서울 생활 몇 년 했지만
직장 동료들과 사적으로 친해지지 않는 타입이라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딱히 하소연할 데도 없고
직장 동료들이나 잘 모르는 지인들에게 집안 얘기 해봤자
다 제 허물이라고 생각하고 일절 안했습니다.
여기에 글 쓰니까 다들 답변 달아주시고, 남편에게
너무 기 죽어 살 필요 없다고 하셔서 용기가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친구한테 하소연한다고 생각하고 몇 자 더 쓸게요.
오늘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오는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때는 너무 화가 뻗쳐서 막말을 했는데 미안하다,
네가 살기 힘들면 이혼해라. 아직 애도 없는데 걱정 말고.'
어머니가 원래 굉장히 신경질적인 성격이라 아마 제가 일년만에
이혼 어쩌구 하니까 화가 나서 소리질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보수적인 분인 건 변함없고요...
아마 지금 말은 그렇게 해도 이혼한다, 혹은 다른 잡음이 난다 싶으면
또 폭언을 퍼부을 게 분명합니다. 저 자랄 때도 내내 그랬으니까요.
친정 어머니에게는 사실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습니다.
서두가 길어졌네요. 이 이야기를 쓰려는 게 아니고,
오늘 밤에 남편하고 얘기를 좀 했습니다. 사실 월요일이고 해서
주말에 천천히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머니 전화 받고 약간
용기가 났던 게 사실입니다. 11시쯤 들어가니까 아니나다를까
또 기다리고 있더군요. 밥 다 차려주고 먹고 난 다음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제 기분이나 사정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중간에 끊고
막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 듣더군요. 다 듣더니
제가 솔직하게 심정을 말하니까 본인도 까놓고 말한다고 합니다.
일단, 본인은 직업도 좋은 편이고 인물도 좋으니
(남편은 키도 크고 잘 생겼습니다.) 어떤 여자든지 고를 수 있었다.
그런데 너를 택한 이유는 네가 웃어른들에게 공손하고
차분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조도 잘 하고
솔직히 말해서 결혼 후에 내 말도 잘 수용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는 너무 다르니까 점점 더 정이 떨어지고
솔직히 지금은 그냥 의리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지, 여자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본인이 손발이 없어서 집안일은 안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 결혼 전에 어머니를 노상 도와서 집안일 해서 잘 한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도왔던 이유는 어머니가 집안일이면 집안일, 회사면 회사
늘 철저하고 치열하게 일하시고 가족에게 헌신하려는 태도셨기 때문에
자신의 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왔대요.
한마디로, 제가 최선을 다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서
괴씸해서 안 도왔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어떤 거냐고 물어보니, 회사에서는 최대한
요령껏 일해서 야근을 하지 않고,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그리고 저녁에 칼퇴근을 해서 집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남편을 맞는다.
새벽에는 5시 반쯤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깔끔하게 화장도 하고,
틈틈히 화장실 청소도 좀 하고.
제가 저렇게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살면 쓰레기 정도는 본인이
버려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결혼하고 1년동안 몸무게가 좀 는것 같다면서,
저녁에 퇴근해서 운동할 시간이 없으면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든가, 아니면 점심을 10분만에 먹고 나머지 40분동안
회사 주변을 빠르게 걸으면서 운동을 해야지 왜 몸을 방치하냡니다.
저 결혼하고 3킬로 쪘습니다...그런데 그것도 못 참겠대요.
제가 밥을 늦게 먹어서 10분 안에 못 먹는다 하니, 그런 부분 때문에
저에게 정이 떨어진다면서 화를 냅니다. 왜 자신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고 방만하게 사느냐면서요.
그래서 저는 그것은 당신 기준이고 나는 야근이 많은 직업인 만큼
집에 돌아오면 내 밥도 안 챙겨먹고 바로 씻고 눕고 싶다.
본인 밥을 스스로 챙겨먹었으면 하는 게 임무를 소홀히 하는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도 미리 만들어놓지 않느냐. 라고 말했고...
네. 그 이후는 또 그냥 평소 싸우는 내용의 반복이었습니다.
방만하고, 노력이 없고, 게으르고, 요령만 피운다는 말을
20번 정도는 들은 것 같네요.
남편은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하고, 여자가 부지런하면 집안일과
회사일을 병행하면서 외모도 잘 가꿀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거고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커왔으니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한참 말하던 남편은 본인도 기운이 딸리고 힘들고 짜증이 났는지
제 꼴도 보기 싫으니 시댁 가서 잔다고 하고 나가버렸네요.
저희는 시댁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데 지금 시간에 가면
시부모님이 분명 걱정하실 텐데도 저러고 가버립니다.
싸운 거 알게 되실 텐데 뭐 또 좋은 소린 안 나오겠지요.
그냥 여러가지 상념이 들고 애초에 남편과의 만남 자체가
잘못되어서 이지경에 이르렀단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얌전하고 차분한 성격이고, 웃어른을 공경해서
결혼했다는 남자와 더 이상 할말도 없고요.
솔직히 직장 여자 동료들이랑 수시로 히히덕거리는 카톡을 하고
숨기기는커녕 절 보여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고
몇 번이나 어필을 하는 남편, 이제는 저도 버티기 힘듭니다.
저랑 이혼하고 본인 맘에 쏙 드는 여자 다시 골라서
새 장가가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전 솔직히 이젠 남자에게 질려서 다시 결혼은커녕
연애 생각도 안 들 거 같네요. 생각할 여력도 없고요.
담주에 바로 휴가내서 이혼 절차와 필요한 서류들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 결정이 옳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