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30살(9)

리드미온2004.01.15
조회25,793

"내가 토요일에 어머니 생신인 걸 깜빡했어. 마침 나도 미국에서 몇 년만에 오고 했으니까 빠질 수도 없고..."

실망이다. 어떤 변명도 귀에 들어올 것 같지 않다. 나는 그가 잡고 있던 내 손을 슬며시 뺐다.

 

"화났어?"

"....."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다른 일도 아니고 가족에 관한 일이니 내가 이해를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어머니 생일과 겹쳐서 약속을 하느냔 말이다.

 

"대신 다음 주에 가자....다음 주 일요일이 네 생일이잖아. 토요일에 생일 전야제....내가 근사하게 해줄게..."

솔깃....한다. 그래 오늘이 끝은 아니지...다음 주도 있는 거고....

잭팟 터뜨린 사람이 시간이 문제겠어...취소하고 다시 예약하면 되는 걸....

역시 ... 돈이 시간의 자유마저도 주는 것일까?

1년 내내 어렵게 결심해서 해외 여행 가는 것과는 틀리다. 음식점을 예약하듯이 예약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예약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래...한 주 미룬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없을테니까...

 

"그리고 내가 미안해서 그러는데....일요일에 시간 되니까 먼저 스키장에 가있을래? 친구랑 거기서 놀다가 내가 일요일에 가서 같이 서울 오자...."

스키장?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키장도 한 2년간은 가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선이도 몇 번 나에게 스키장에 가자고 했지만 매번...'이 나이에 여자 둘이 스키장에 가면 .....괜히 물흐린다...'하면서 거절하곤 했다.

 

"괜찮지?"

약속 취소 때문에 잠시 화가 났던 마음이 그에 대한 배려로 어느 새 다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약속 불이행 정도는 쉽게 이해해주는 관대함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래..."

 

"어느 스키장으로 갈래? 내가 콘도 예약해줄게...용평?"

용평? 이란 말에 주말에 김대리와 팀원들이 그 쪽으로 간다고 한 것이 생각나서...

"아니...아니...피닉스...피닉스...거기가 좋을 것 같아..."

급하게 다른 곳이라고 생각난 곳이 피닉스였다.

 

"그러자...전화 좀 빌려줘봐..."

미국에서 온 후로 아직 핸드폰을 만들지 않았나보다. 민준은 나에게서 전화를 빌리더니 피닉스 콘도미니엄에 전화를 해서 60평짜리를 예약해 주었다.

웬지 앞으로 나의 주말은 즐거운 여행으로 가득찰 것 같았다.

그래...세상은 월.화.수.목.금.토.일. 이 아니라 금.토.일.금.토.일.일 이렇게 만들어져야 해....

 

민준은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여기지? 우리가 키스했던 데가?"

 

민준은 사거리에서 택시를 세우면서 말했다.

 

"그 때 얼마나 놀랬는데....."

 

나는 쑥쓰러운 기분도 있고 그때가 너무도 선명히 떠올라서 무안하기도 했다.

 

"하하하하..알아...너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

 

"내가?"

 

"엉."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다...다음 날 네가 먼저 전화라도 한통하면 말하려고 했었어."

 

"뭐라고?"

 

"보고 싶다. 전화 자주 해라....라고...."

 

항상 주변에는 자신의 모르는 기회들이 왔다가 스쳐가는지 모르겠다.

그 때 민준에게 전화를 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앗..지금 그말 하려고 했는데...내가 전화가 없네...."

 

"전화기 하나 사지?"

 

"자주 외국 왔다갔다할 것 같아서 귀찮아서...하긴 로밍을 써도 되지만...당분간 내키기 전까지는 이렇게 지낼래..."

 

민준에게 자신의 원룸으로 올라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제 본 스위트룸과 너무 비교가 되서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빈부의 격차는 무시할 수 있지만 빈부의 위화감은 이렇게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 그 때처럼 여기서 키스할까?"

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민준은 순식간에 내게 입을 맞추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니까 좀 그렇다...오늘은 이렇게 짧게 인사하고...그리고....."

민준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스키장가서 써.....내가 같이 못가서 미안해서 그래..."

민준이 나에게 준 것은 카드다. 신용카드....그것도 어메리컨익스프레스.....

난 순간 잠시 망설였다.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이거야 말로 선물이 아니라 돈이 아닐까?

아니다...악세서리나 꽃만 선물은 아니다. 편견을 버려야 해....

 

"헤어지기 싫으네.... 그런 노래 있어. say good night Not good bye....라고..며칠 안되었는데 헤어지면 영영 이별이 아닐까 걱정되고 그렇다....Good Night....이다...응?"

민준은 내가 카드를 받아들까 말까 잠시 갈등하는 사이 내 주머니에 카드를 넣어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Good Night....그의 목소리가 잠들기 전까지 내 귓가에서 자장가처럼 은은히 울려 퍼졌다.

 

"야...그 때...우리같이 점 보러 갔을 때 기억나? 너 30살부터 팔자가 확 핀다고 하지 않았어? 어쩜 이렇게 해가 바뀌니까...달라지니? 역시..여잔 남잘 잘만나고 봐야 해..."

 

지선은 어린 아이처럼 신이 나서 말했다. 나도 단 이틀이지만 꿈과 현실이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황홀하고 행복하고 또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니까..피닉스 60평짜리를 예약했다고? 야야...네 덕분에 호강한다. 호화찬란하게 스키도 타러 가고...네 스키복 사면서 내 것도 사면 안될까?"

그런 사람이 카드 명세서 목록을 일일히 볼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그러자고 했다.

 

오전에 지선과 신나게 백화점 쇼핑을 하고 오후에 피닉스 파크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젊은 사람들이 스키장에 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는 길도 복잡하고 도착해서도 사람이 많았다.

콘도 리셉션에서 예약을 확인하는 순간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제가 분명히 예약을 했는데 취소라뇨?"

"네. 손님은 회원이 아니시기 때문에 회원분들에게 우선권을 드리다 보니......"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순간....지선과 나는.....당황스러웠다.

 

"아니..그럼 미리 연락을 주셨어야죠.'

김대리다.....

용평에 간다더니...왜 피닉스 파크에 와서...저러고 있는 걸까?

 

"연락을 드렸는데 손님이 안받으셔서...."

"여기 적혀 있는 번호는 저하고 끝자리가 틀립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직원이 잘못 적었나보네요."

"아니..그럼 여기까지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김대리 뒤쪽을 보니 팀원들이 로비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분명 용평에 간다고 했었는데....

아는 척을 할까 외면을 할까...하는 사이 이미 우리는 김대리의 레이다에 걸려버렸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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