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강해

0002016.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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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 (삭제불가!)

  본장부터 마태복음의  끝 부분까지 내용을  먼저 간추려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 25장 이  두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섯 강화 중 마지막
것으로서 그 주제는 '종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26장과 27장은 예
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말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인 28장은 예
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종말론 강화'는 감람산에서 말씀하신 것이
므로 흔히 '감람산 강화'(the Oliver discourse)라고도 합니다.  24장에
서는 세상 끝에 있게  될 징조들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 25장
에서는 천국에 관한 비유들과 예수님의 재림 때 있게 될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 강화'를 말씀하신  목적은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습
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넓혀서 적용하자면, 새 언약백성이 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
들의 미혹 혹은 속임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4절). 다른 하나
는 '깨어서 예비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42, 44절).
  종말에 관한 그릇된 가르침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
는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일어날 것이라고 그 시기를 가르
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잘못된 가르침은 예수님의 승천 이래로 재림
때까지 끊임없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특히 지금 우리 나라 교회의 형
편을 보면, 많은 교인들이 종말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병들
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서, 재림의 년과 월을 예고
하는 가르침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고의 논리적 근거 중 하나는,
"그러나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
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 날과 때' 즉, 일(일)과 시(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므로 사람
이 알 수 없으나 년(년)과 월(월)은 알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
입니다. 얼핏 들으면 매우  그럴듯한 논리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
들이 솔깃해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속임수 논리이거나 무지한 논리
입니다. 여기서  '날과 때'라는 의미는 년과  월을 제외한 '일과 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과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문구의 뜻은
'아무도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말에서 '주야
로'라는 말이 새벽이나 저녁을 제외한 낮과 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또는 '쉬지않고'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한 마태복음 24:37이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이 마치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
까지" 일상적인 생활을 계속했으며  마침내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
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예측할 수 없는
급작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년과  월은 알 수 있다는 논리는, 언어의
자연적 의미를 무시하고 문맥과 맞지 않는 빗나간 것이므로 비성경적인
논리이며, 예수님의  경고처럼 말세에 나타난  그릇된 가르침인 것입니
다.]
  이 종말론 강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 문단을 나누어 보면, 여덟 문단
이  적절할 것입니다.  1) 서론(마  24:1-2), 2)  세상 종말의  징조(마
24:3-14), 3) 대환난(마  24:15-28), 4) 인자의 오심(마 24:29-31),  5)
주님을 예비하라(마 24:32-51), 6) 열 처녀 비유(마 25:1-13), 7)  달란
트 비유(마 25:14-30), 8) 인자께서 심판주로서 오심(마 25:31-46).  이
종말론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첫 징조는 예루살렘 성
전의 멸망입니다(2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징조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이 징조들과 대응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일이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닐 뿐더러 종
말에 있을 모든 징조들을 빠짐없이 제시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것들은 종말이라는  긴 기간 동안에  일어날 일반적 현상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의 시선을
종말의 일들 그 자체가  아니라 종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그분께 우선
적으로 고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종말의 징조들은 그것들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나팔소
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 또 하
나 있는데 그것은 성경기록자  또는 말씀하는 자의 관점을 갖는 일입니
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이  사건들을 바라보던 위치에 서서 그들이 바
라보던 방향과 각도대로 우리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언할 때 그것들의 시간적 순서나 간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그것들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제시
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실제상으로 엄
청난 시간 간격이 있는데도  마치 그 두 사건이 잇달아서 혹은 함께 일
어나는 것처럼 서술하였습니다. 이는 사건들의 시간 간격보다 구원역사
적인 연관성을 더욱 중시하는 관점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있는 산들을 바라볼 때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두 개의 필름을 포개어  놓고 스크린에 투영해 볼 때 나타나는 상에 비
유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이
라는 평면 위에 올려 놓으시고 동시대 사건들 처럼 말씀하십니다. 이런
관점은 사실  처음 청중이나 독자들을 크게  고려한 것이며, 그들이 그
말씀들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 마태복음 24장에서 제
자들은 유대인들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재림과 세상의 종
말을 생생하고 확실하게 가르치시려면 문화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종교
및 사상적으로나 어느 모로든지  그들의 이해와 인식의 범위 또는 한계
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리고 성경적 의미에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색칠하시기에 매우 적절한 밑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의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상한 견해들이  있어서 우리 독자들은 자칫하면
이 구절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상세
히 설명한, 믿을만한 주석가의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에  관한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심으로써  이 [셋째]부분의 강설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언이 곧  성취될 것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그런  일을 보거든 자신들이 도망해야할 신호
    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니엘의 예언에서, '가증
    한 것' 또는 '가증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세 구절에서 볼 수 있
    는데, 각 구절마다(단  9:27, 11:31, 12:11) '멸망'이라는 말을  사
    용합니다. 다니엘 9:27의 번역과 해석에는 문제점이 있지만, 11:31
    과 12:11은  이 구절(마 24:15)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질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 구절 중 나중 두 구절의 예언
    은 예수님 시대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몇몇 주석가들은  예수님
    께서 이 두 구절을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러나 이에 대해서는  한 예언의 최초의 성취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나중에 더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다는 논박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9:27보다는 11:31과 12:11에 더욱  잘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인용이 다니엘 9:27에서만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란 말은, 우상이나 우상숭배의 대상
    물을 가리킵니다(왕상 11:5, 7; 왕하 23:13, 24; 사 66:3).  그리고
    '멸망의'라는 말은, 그러한 가증한 것들로 말미암은 결과를 묘사합
    니다.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 즉, 성전에 서게 될 때,
    그 더럽힘으로 인하여 성전은 텅 비게 되고 또한 멸망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렬한 성전 출입자들이 갈망하던 하나님께 대한 참 에배는
    끝날 것입니다.
      다니엘 11:3과 12:11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개역  한글에
    서는 각각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과 "멸망케 할 미운 물건"으로
    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175-164 B.C.)가 통치하는 동안 성전 뜰에 세워진  제우
    스 올림피오스(Zeus Olympios)를 위한 제단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러나 다니엘 9:27의  의미는 다소 불분명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예
    수님께서는 성전이  더럽혀질 것과 텅 비게  될 것을,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여  멸망될 것(눅 21:20을 보라)을  언급하시려
    고 다니엘의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운  일이거
    나 예루살렘 함락  전에 있었던 열심당원들(the Zealots)의  잔학행
    위를 가리킨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의 제안은 추측에 불과
    할 뿐이며,  열심당원들이 성전 안에서  행한 살해행위라는  제안도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너무 제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좀더  일반적으
    로 즉,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함락당할 동안에 발생한 성전에 대한
    모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
    들이 다니엘의 예언의 완전한 성취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계적으로  취해
    서 예수님께서 어떤  우상을 언급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니엘의 표현을 그대로 따오신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단 11:31, 12:11을 보라).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라는 이 괄호 안의 말씀에 대래서, 후기 독
    자들을 위해서 마태나 아니면 어떤 필사자가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청중들로 하여금 다니엘의  이 예언에  특별히
    주의하도록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봄
    이 더욱 타당할 것입니다.
      몇몇 주석가들은 옳게도 이 구절을 데살로니가후서 2:4에  언급된
    적그리스도 곧 '친히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와 연관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예수님은 세상의 종말과 세
    상 끝에 나타날  가증한 일들을 말씀의 범위 안에 넣고 계셨습니다
    (3절을 보라).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말씀
    함으로써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증
    스럽고 신성모독적인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말세에 대한 한 징조가
    될 것입니다.

  '대환난'을 말씀하고 있는 셋째  문단에서 우리는 이 주제의 폭이 넓
어짐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멸망 때에 있게 될 큰 환난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어느새 이  환난은 세상 끝날에 있을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변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표현이 21절입니다. 여기
서 말씀하시는 큰 환난은 '창세 이후로 전무후무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써 이것은 세상 끝날에 있을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에 심판의 고삐를  바짝 당기시면 어느 누구도
그 대환난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끝까지 자
기의 언약백성을 위한 은혜와 긍휼의 손길을 거두시지 아니하십니다(22
절).
  세상 끝날에 있을 대환난  때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환난들만 있는 것
이 아니라, 강력한 권능을  지닌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의
권능은 너무도 강력하여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조차 그들의 권능이 하나
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착각하고  그들을 추종할 수 있을 정도일 것입니
다. 이와같은 큰 미혹이 있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곳은 24절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처음  오실 때와는 괄목할만하게 다른 점이 있
습니다. 그분의 다시 오심은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일어나는 일
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분
명하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2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 혹은
저기에 계시다는 말들은 미혹하는 소리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종말론  강화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목적에 따라 여덟  문단을 분류해 본다면, 넷째
문단까지는 그릇된 가르침에 속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인 반
면에, 다섯째 문단부터  25장 끝까지 계속되는 여덟째 문단까지는 깨어
서 예비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세상의 종말)을 깨어
서 예비해야 할 까닭은  말씀하신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34-35
절)이며 그분의 재림은 갑작스럽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2절에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44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쉽게 가르쳐 주시려고 두 개의 짧은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깨어 예비함
이란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도록 신실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삶은 주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입
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삶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하고픈 대로 사는 삶
입니다. 이 반대의 삶을  비유에서는 48절과 49절에 잘 묘사해 놓고 있
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