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본 일기-3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2004.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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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모 경민인데요, 식사하셨어요?....."

그녀 집으로 전화하자 그녀의 어머니께서 받으셨다.

안부를 여쭙는 척하면서 그녀의 맞선으로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수다는 한번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안해도 될말까지 주루룩 쏟아져 나오니 그중 몇마디는 건질만한 정보가 섞여 있기 마련이다.

그녀의 어머니 말씀에 건성건성 몇마디 맞장구를 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

내가 이모라 부르는 그녀의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나면 항상 8년전에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

두 분이 여고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하시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함께 한걸까.

나와 그녀 역시 그런 세월을 함게 할수 있을까?

우정으로... 아니면...??

 

그녀의 맞선 약속장소인 잠실 L호텔 로비라운지는 정장을 빼입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토요일이고하니 이 지루해보이는 사람들도 그녀처럼 맞선을 보는게 뻔하다.

간단한 호구조사와 함께 재미없는 농담 몇마디, 억지미소로 그들의 사이는 짐작이 충분했다.

호텔이야 수없이 많이 드나들었지만, 이처럼 약속도 없이 멀뚱 거리고 앉아 있던적은 없었다.

그녀의 맞선이라니.

별것 아니라 스스로 위로해봐도,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라서 지난 5일내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결국 우스운 꼴이 되어버리는 걸 인정하면서 이 자리까지 나와 앉아있었다.

자리가 없어 아쉬운듯 발길을 옮기는 손님들을 보니, 나혼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게 영 민망했다.

잠깐동안, 이게 뭐 하는 짓 인가 싶어 그냥 일어날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손목시계를 보니 7시 정각이다.

'이모 말로는 분명 6시 30분이라 했는데...'

약속시간엔 늘 늦는 그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우형 얼굴이라도 찾을수 있을까 싶어 로비를 한바퀴 둘러봤다.

창가쪽에 말끔한 곤색 슈트를 입은 남자가 곤란한 얼굴로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있는게 눈에 띄었다.

'신우형이군...노인네 영계 잡으려고 용썻네. 꽃단장 했군.'

혹시라도 형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에 고개를 숙이고 반대편으로 돌렸다.

신우형이 앉아 있는 자리의 뒤테이블 손님이 일어서자 잽싸게 자리를 옮겼다.

헉.

자리를 잡고 신우형에게 안들킨거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내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칵테일 한잔에 취할리 없고, 로비를 향해 당당히 걸어 들어오는 저 여인네는 분명 그녀다.

큭큭큭...

너무나 그녀다운 차림새에 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호텔 커피숍에서 좀 어색한 차림의 그녀는 로비라운지 한가운데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뭔가 단단히 심술이 난듯 볼에는 바람이 잔뜩 들어서 퉁퉁 부어있고 안그래도 좀 튀어나온 듯한 입인데 아래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표정은 금방이라도 전쟁을 치룰 비장한 각오라도 한듯 굳어 져있었다. 아마도 긴장한 탓이겠지.

뭐 저런 차림이냐 싶은 신우형의 시선도 그녀에게 잠깐 멈췄으나 곧 고개를 돌렸다.

'오호라~ 니가 형을 모르니 형이라도 널 빨리 발견하라는 거냐. 하긴, 저 튀는 차림에 시선이 안가긴 힘들지. 사람 찾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형도  그녀를 알아봤는지, 다시 그녀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박신우씨?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회사에서 나오는 거라서요."

내키지 않는듯 자리에 앉으며 지각한 변명부터 늘어놓는다.

'기집애. 저러면 마이너스인데... 이거 생각했던거 보다 훨씬 재밌어지겠네...'

첩보영화 주인공처럼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들의 대화를 느긋이 경청했다.

"네.오늘 쉬시는거 아니었어요?"

"아, 네. 저희 회사가  토요일은 격주 휴뮤인데요, 오늘은 쉬는 날인데 일이 많아서 갑자기 출근하게 됐어요."

"그래요? 식사는?"

"사실은요, 저 지금 다시 사무실 들어가야돼요."

"푸하하하! 정말인가요? 혹시 옆에 있는 놀이동산에서 놀다가 마지못해서 나온거 아니에요?"

형도 참기 힘든 듯 끝내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녀는 신우 형의 웃음에 당황해했지만, 긴장은 좀 풀린듯했다.

"네? 놀이동산이요? 아닌데...왜그렇게 물으시는데요?"

"뭐, 옷차림이 놀이동산에서 뛰어놀다 온것 같아서요. 나쁜 뜻은 아니구요. 근데, 진짜 나 기억안나요? 이거 좀 서운하네."

"네? 아네. 어렸을 때 저랑 경민이를 많이 예뻐해주셨다고요? 어머니께 말씀은 들었지만, 전 기억에 없는데요."

"오호. 경민이도 많이 컸겠네. 경민이랑 같이 한번 보지."

"저, 사무실 들어가봐야되서요."

"아, 아직 불편한가? 혹시 그래서 도망가는 건 아니구?"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말 불편한 자리였는지,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간신히 웃음을 찾는 듯한 신우형 역시 뒤따라 사라졌다.

 

'내가찾는아이 흔히 볼수없지...'

핸드폰 벨소리에 간신히 눈을 뜬다.

일요일 아침 7시에 나에게 전화할 사람은 그녀다.

굳이 구분해놓은 벨소리가 아니라도 충분히 짐작케한다. 그리고 그 짐작은 빗나가질 않는다.

"어."

"나 어제 맞선봤어."

"알아."

 "왜 안물어?"

"뭘?"

"맞선말이야. 상대는 어떠냐, 맘에 드냐, 또 만나기로 했냐, 뭐 그런 것들. 왜 안묻는데?"

"다 물어줘? 니가 내켜서 나간것도 아닌데. 물어보나마나 뻔한거, 그것들 죄다 물어줘야하냐구? 좋아, 그럼 물어볼께. 어땠어? 맘에 들어? 또 만나? 됐지? 아니다. 어떻게 깽판쳤니? 그사람 때어냈니? 진짜됐지?"

"뭐야? 시시해."

"뭐가 시시해. 훌륭한 질문들인데. 니가 원하는 질문이잖아."

 "난 또 니가 궁금해서 라도 어제 전화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좋아, 대답해주지. 마지못해 나갔구, 꽝 이었어. 딴 것들은 시시해서 얘기하기도 싫고, 아 맞다. 이상한사람인가봐."

"누가? 어디서 미친 놈봤냐?"

"아니. 왠 딴소리야? 그 사람 말야. 박신우. 갑자기 막 웃더니 뜬금없이 나보구 놀이동산에서  놀다왔냐구하더라. 제 정신 안같아 보였어."

"너 옷 정장 입구 갔어?"

"아니. 그냥 편하게 입었어. 어제 재수없게 갑자기 일생겨서 출근했거든. 일하다가 저녁시간에 잠깐 나가서 얼굴만 비추고 나올 요령이었지머."

"일하다 갔다고?"

"어. 마침 장소도 회사에서 안멀구, 또 기껏 잡은 약속인데 갑자기 연기하는 것도 미안하기도하고, 귀찮기도해서 그냥갔어."

"편하게 뭐입었는데? 이모 아셔?"

"갑자기 옷은 왜 따지고 들어. 니가 편하게 입으라며? 일하기 편하게 청바지 입었어. 엄마는 나 정장입구간줄 아시겠지.잠깐, 경민아."

수화기 넘어로 그녀의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이노무 지지배. 어쩜 엄마 망신을 이렇게 시켜? 내가 너 땜에 못 산다. 세탁소에서 드라이까지 해다둔 정장은 팽게치고 어딜 청바지를 입고나가?'

'엄마, 나 어제 출근하느라...'

'시끄러. 그것도 옷이라고 줘 입고 나갔냐? 옷이란게 때와 장소에 맞춰 입어야지. 니 처입고 싶은대로 맘대로 휘두르고 나가? 나이가 어려서 그런 분별력도 없는 것도 아니고, 왜 들떨어진 짓을해서 에미 망신을 시켜? 신우 걔도 얼마나 황당할까? 호텔 커피숍에 떡하니 힙합청바지로 나타났으니, 원... 같이 있던것도 부끄러웠겠구만.'

'엄마! 내 친엄마 맞아? 왜 내 얘긴 듣지도 않고.'

'시끄러, 이년아. 니가 뭘 잘하고 왔다고 터진입이라고 나불대? 신우 엄마가 니년 얘기하면서 웃는데 내가 어찌나 창피하던지. 너 같은 딸 둔덕에 그런 개망신까지 당해본다,야. 너 당장나가. 당장 짐싸들고, 아니지. 이 집에 니꺼 없으니까 그냥 맨 몸으로 당장 나가!!'

'아이!진짜!'

'어디서 전화질이야? 끊어!'

찰칵!! 뚜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