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에 널 씻겨 내렸다

15201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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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여름, 볼 빨간 사춘기라는 말은 아마 그 해의 나를 두고 한 말일지도 몰라.

인천에 있으면 친구들이랑 사고만 친다는 이유로 여름방학동안

시골에 계신 할머니 집에 간 것을 난 아직도 후회한다.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서도 보이는 거라고는 개구리가 살던 도랑과,

넓디넓은 밭과 가끔 봉고차가 지나다니던 끝이 안 보이는 도로가 다였다.

 

3번째 다시 보는 터미네이터2가 질릴 때 쯤 아직은 어린 마음에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낡아 빠진 주제에 굴러가긴 하는 삼촌 자전거를 타고

노을이 지는 방향을 따라가다 잠시 쉬고 싶어 앉으려 했던 작은 오두막에 네가 있었지.

 

소나기의 남자아이가 내가 된 것만 같았다.

살짝 그을린 피부와 상반되는 쌍꺼풀 진 눈이 너무 예뻐서 잠깐 내려놓고 널 쳐다봤던 거 같다.

이내 달아오르던 내 볼을 주체하지 못 하고 얼른 돌아와 그 날은 다른 날보다 좀 더

새벽을 지새우다 잠들었었지.

 

처음엔 놀랬고, 두 번째는 예뻤고 세 번째 또한 예뻤다.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는데 16살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중학생 치고는 큰 편이었던 내 키의 어깨 쯤 오는 16살인 네가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

 

괜히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도 16살이라 속였지만 그 때 네가 살짝 웃어보이던 미소는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 것 같다.

 

아빠 엄마한테 너무 고마운 건 어릴 때부터 아빠가 엄마에게 욕하거나 때리는 걸 본 적이

없다. 7살 땐 아빠가 바보인줄 알았고, 15살 땐 멋있었고, 성인이 된 지금은 내가 아빠가 되어있었다. 결혼 했다는 소린 아냐.

자기 친구들은 자기한테 욕하고 때린다는 소리 듣고 물론 장난으로 그런 거겠지만 진짜 조카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조패고싶다 지금 생각해도.

여하튼 15살이라는 나이 때문인지 원래 그런 새기인지 양아치 같은 게 멋있어 보이는 줄 알았다. 담배 피는 척을 하고, 술도 많이 마셔본 척, 친구들이 많은 척, 하 진짜 지금 생각해도 죽여 버리고 싶다 미친 놈 왜 그랬냐 진짜.

 

할머니 댁과 네가 살던 곳이 그리 멀지 않은 탓인지, 네가 도시로 돌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고 돌아올 때 마다 설레고 반가운 마음이 앞섰던 건 아마 그때부터 널 좋아해서였던 것 같다.

길을 걷다 뱀이 나와서 놀래며 내 팔을 끌어안을 때 그 향기가 설렜고(갑자기 뱀 100마리 나타났으면 싶었다)

할머니 몰래 가져온 매실주라며 딱 한 잔만 먹자며 페트병 다 비워버린 너 때문에

밤에 심장이 콩닥콩닥 했다. 술 쳐 먹고 잠들어서 그런가.

번호를 주고받았을 땐 그 날 하루만으로 내가 살아갈 이유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낮엔 둘이서 놀고 밤엔 문자를 하는 그런 날 들이 3주 쯤 되었을 때 슬슬 내가 돌아가야 했지.

 

어떤 날은 문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 할머니 집 앞이라며 나오라는 너 때문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뭐 하려고 불러내지, 나 때리려고 그러나, 고백하려 그러나, 이참에 그냥 고백해버릴까’ 하는 마음들이 있었지만, 돌아가면 다시 보기 어려울 텐데, 좋아했던 건 맞지만

그 때의 나에겐 고백할 용기도, 혹시 잘 된다 해도 네가 보고 싶은 마음을 짓누를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나가보았다.

 

시골 공기 탓인지 보름달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밝은 달과 밤하늘과 높이 솟은 가로등이

널 좀 더 예쁘게 비춰주었지. 그 때 내 심장이 작게 콩닥거린 건 술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자꾸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또 볼이 빨개질까, 땅을 보면서 왜 왔냐고 물었더니,

품에 안기더라 네가. 안자마자 정말 진짜 그냥 놀랜 것 밖에 없었는데 그와 상관없이

기지개를 피려는 내 건강이 원망스러웠고, 뒤로 빼는 하체 모양새가 퍽이나 웃긴 걸 알았지만

네 성스러운 몸에 혹여 닿는 것 보다 훨씬 나았다.

 

왜 뒤로 빼냐는 너의 질문에 아무 핑계도 댈 수가 없던 난 마지못해 다리가 저리다고 했다. 병신.

 

입술을 포개고 나서야 이 여자가 할머니 몰래 술 또 자셨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 첫 뽀뽀는 매실주 맛이다.

 

품에 안겨 있던 넌 아마 미칠 듯이 쿵쿵대는 소리를 들어서 날 보며 얄궂게 웃었던 거겠지.

예쁘다며 한 번 더 입 맞추던 그날 밤은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너무 소중해서

 

널 바래다주러 가는 길에 맡는 새벽 냄새와 잡은 손이 미묘하게 떨렸던 걸 아직도 기억해 난.

집 앞에서 잘 가라고 말하는 너의 눈이 촉촉한 걸 그저 난 네가 하품해서 그런 줄 알았지.

다음 날엔 비가 내렸고 넌 말도 없이 도시로 돌아갔고 갑자기 연락도 안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너희 할머니에게 여쭈어보고 싶었지만 그 땐 무서웠어.

이틀 뒤에 난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너랑은 연락이 안 되고 애꿎은 폰에 분풀이 해봤자 돌아오는 건 엄마의 등짝스매싱이 전부였다.

 

네 생각에 두 계절이 지나 겨울이 왔을 때 다시 시골에 내려갔지만 넌 오지 않았고

용기 내어 너희 할머님에게 손녀가 혹시 오지 않았냐고 여쭈었을 땐 내년 여름엔 올 거야. 라는 말이 전부였다.

네가 없는 그 곳은 맨 처음과 똑같이 지루했고 할 짓 없는 그저 그런 시골 동네였다.

그제야 난 네가 첫사랑이라는 걸 미칠 듯이 느꼈고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와 닿았다.

차라리 연락 한 번이라도 해주었다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진짜 많이 미웠어 너

 

또 다시 그렇게 여름방학이 시작 할 무렵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골에 갔을 때 난 작년의 너와 같은 나이가 되어있었지만 결국 넌 오지 않았고, 너희 할머니도 아들 집으로 갔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혹시 갑자기 네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걸어보았지만 안내 음성이 들릴 뿐이었다.

너희 할머니가 비우신 그 집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엔

꽤나 많은 비가 내렸다 오늘처럼.

 

비는 차가운데 눈물은 왜 그렇게도 미지근한 것인지,

 

그 슬픈 와중에도 눈물이 짜다는 게 짜증이 나는 거 있지.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비 맞으며 길에 앉아 훌쩍이다, 흐르는 비에 너도 같이 씻겨 내렸다.

 

 

 

 

 

 

 

 

 

 

 

 

 

 

 

 

 

 

 

 

 

 

 

 

 

 

근데 사실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야.

후회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야.

아씨 진짜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