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계의 시국선언을 요구합니다.

시대유감20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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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가수분들께 고함]

한국 대중가요 전성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81년생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때 학원 버스안에서 서태지와 아이들 난알아요를 처음 들었으며
중학교 소풍 장기자랑 때 친구들과 연습해서 듀스 여름안에서 춤을 췄으며
밤마다 독서실에서 워크맨으로 김현철, 윤상, 신해철의 라디오를 듣다가 집에 오곤 했습니다.
룰라가 표절시비에 걸렸을 때는 반 친구들과 비교한 부분을 반복해서 듣고 방송국에 제보했고
김성재 비보를 듣고는 충격에 울다가 팬클럽과 재수사를 촉구하는 엽서를 수십장 보냈고
서태지의 시대유감이라는 곡이 사전심의에 걸렸을 때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KBS 국회에 기나긴 편지들을 썼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이렇게 발달하지 않아 부당한 일에 맞서 많은 이들의 서명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건 나우누리 천리안 PC통신과 전화사서함 정도였고
무슨 일만 있으면 손으로 편지를 써서 신문 독자의견란에 보내고, 기자들에게 항의 전화를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갑갑한 권력과 기성세대에 맞서 싸우는 것이 가요계의 훈장처럼 여겨지던 시기가.
70년대 민주화 운동하던 시절 양희은 김민기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핑클의 약자가 Fin.k.l (Finish Killing Liberty,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을 끝내겠다)이고
H.O.T의 데뷔곡이 사회비판 가사였던 걸 아는 어린 친구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윤도현, 강산에같은 분들이 공중파 뿐 아니라 시위 현장에서도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을 부르는 락스피릿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조피디, CB Mass 같이 얼굴도 내세울 필요없이 쿨한 리듬위에 사회에 독설을 퍼붓는 힙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형가수였던 디제이덕은 대놓고 돈많은 권력층과 짜고쳐서 수사하는 '짭새'들을 조롱하는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끌었고
김진표와 이적이 높고 낮은 음으로 랩과 노래를 사회에 시원하게 갈겨대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가수와 권력자에 대한 '~카더라' 통신은 고작해야 가사 내용 때문에 방송국 관계자들이 괘씸히 여겨 출연 안시켜준다더라 정도였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또 바뀌고
사회 참여 목소리를 냈던 연예인들이 증명하기 어렵지만 다음 정권에서 혐의 짙은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한때 저항 정신으로 청춘을 보냈다해도, 지금 당장 출연료를 받아 생활비를 해야하는 가장들에게 뭐라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경제는 나빠지고, 또 나빠지고
대중가요가 소수 '음악 기업'이 과점한 비즈니스가 되다보니 싱어송 라이터들이 정치사회 비판곡을 발표했을 때 리스크가 개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음반을 제작해주는 기업의 것이 됩니다.
소속사가 빵빵하면 배신하고 시국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해합니다.

대중들은 시니컬하고, 또 시니컬하고
가수의 성공은 대중들이 음악을 사랑해줄 때인데 저항과 사회비판 음악에 대중들은 시니컬합니다. 수년간 권력의 많은 조작과 억압 정황들이 드러나지만 목소리 높인다고 바뀌는 건 없고, 잘못하면 빨갱이 취급까지 당합니다. 오랜 개돼지 취급에 억눌려 학습된 무기력을 경험하고 나면 대중들이 가요에 바라는 건 그저 잠깐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후크송과 벗은 몸 뿐입니다.
힘을 다해 곡을 적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노래 부를 맛 안납니다. 이해합니다.

그 결과 지난 십여년간 한국 대중가요는 성공하고 싶어하는 10대 초반 청소년들의 노력을 괴물처럼 잡아먹으며 증식했습니다.
과연 지금 티비에 나와 노래하는 '가수'들 중에 몇 명이나 현 시국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이를 노래하고 싶은 욕구를 느낄까요? 하지만 그들을 비난하려고 쓴 글은 아닙니다. 모든 가수가 정치적 현안에 의견을 가지고 표현할 의무는 없고, 특히 요즘 차트 상위권의 어린 친구들은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교육받으며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이런 잣대로 판단하는 건 불공정합니다.

그리하여, 어린 친구들에게 비겁하게 숨거나 책임을 넘기기보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미 성공하신 당신들께 시국선언을 요구합니다.
음악이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였던 시절에 음악을 했던 분들
어떻게 대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곡을 쓰고 부를 줄 아는 분들
하고싶은대로 노래하고 염색했을 뿐인데 점차 방송사 복장규제도 풀리고 사전심의제도 철폐되고.. 변화를 목격하며 자라오신 분들
전국민의 1/3이 내 음반을 사고, 내 무대를 보러 티비앞에 앉아있고,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는 사랑을 한 몸에 받아보신 분들
이제는 결혼하고 딸린 식솔들이 있어 잃을 것도 겁나는 것도 많으실 것 압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이런 사회 물려줄려고 젊은 시절 그런 노래를 부르셨던가요?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2016년 11월은 훗날 교과서 현대 정치사에 쓰일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빠는 (엄마는) 저 때 뭐했어?' 하고 묻는다면 '너도 거기 같이 있었어' 대신에 '너는 이런 사회에서 살지마. 아빠가 젊을 적 돈 많이 벌었으니 유학 보내줄게' 하실겁니까?
그게 인생의 가장 빛나던 때 사랑해주던 대한민국과 팬들에 대한 예의입니까?

당신들을 사랑했던 소녀팬들은 이제 30대가 되었고
온밤 지새며 손편지로 팬레터를 보내던 그 필력으로 자소서를 적어내고 치열한 헬조선의 취업문을 통과해 운이 좋다면 어딘가에서 월급을 받으며 자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육아에 시달리는 두 아이의 엄마, 힘들어서 아이를 포기한 직장인, 백수, 전문직, 워킹맘....
각각 모습은 달라도 젊은 시절 순수하고 뜨겁게 당신들의 에너지와 가사에 공감하며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주말마다 생애 처음 촛불을 들고 아이 손을 잡고 광화문으로 나섭니다.

콘서트장에서 늘 팬들의 사랑에 보답한다 하며 눈물 글썽거리셨지요.
평생 왕자님같고, 여신같을거라 생각했던 당신들도 이제와 생각하면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가족을 책임지는 직업인일 뿐이지만
당신들이 젊은 시절 우리와 가졌던 마음들이 진심이었다면
정말 조건없이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우리가 고마웠다면
지금 대한민국을 바꾸는데 나와서 힘을 보태주세요.
풍선들고 오빠 언니 응원하던 우리가 나이들어 나라 바로잡고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광화문 앞에서 떨고 있을 때
우리 코묻은 돈으로 산 청담동과 이태원 집에서 우리 모습을 현장 생중계로 바라만 보고있지 말아주세요.

한 시대의 감수성을 풍미하셨던 가수분들 -
신해철씨가 살아계셨다면 이승환씨 혼자 저렇게 강동구 건물에 현수막 내걸며 애쓰는 정도로 두지 않으셨겠죠.
생전에 하려고 했다던 이승환, 서태지, 김종서씨와 같이 음악으로 뭐라도 하려고 하셨을겁니다.
그게 음악인이라고 생각하셨던 분이니까요.
다시 생각하셨던 바를 노래해주세요.
한마디라도 떳떳히 말씀해주세요.

이제는 어엿한 사장님이나 건물주가 돼버리신 힙합하시던 분들 -
정권에 잘보여서 말그대로 쇼비즈니스를 하고 계신 양현석씨는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스피릿이 본인 것이 아니였다는 걸 아주 잘 증명해주고 계시고
티비 프로그램에 나와서는 단 몇 시간, 며칠만에도 프리스타일랩도 만들어내고 음원도 자유롭게 배포할 수 있는 요즘같은 세상에 10대 어린 친구들은 앞에서 서로 랩으로 디스하게 하고 엄숙하게 심사하시면서, 본인들은 사회가 가장 '디스'를 필요로 할 때 그 충만한 힙합 정신은 어디 숨겨두고 침묵하십니까.

간간히 배우나 개그맨들의 소셜미디어와 풍자는 보이는 반면,
한국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당신들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섭섭합니다.
인터뷰도 좋고, 음악도 좋고, 성명서도 좋고, 트윗도 좋습니다.

2000년대에 태어난 친구들은
대중 가요로 사회 비판을 하는 가수를 본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불렀던 노래들이 과거 음원으로 사라져가 간간히 라디오에서만 나오고
더 젊은 가수들은 팔리지 않는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말살 당해
더이상 현 가요계는 대중과의 접점을 잃고 엔터테이너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세요.
국민이 주권자로서 현 정권의 퇴진을 명할 때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실겁니까?
우리 역시 20년전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부르는 노래를 목소리 높여 응원하겠습니다.


부러져버린 너의 그런 날개로 (너는 얼마나 날아갈수있다) 생각하나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 시대유감 (서태지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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