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코앞이네요. 오늘이 빼빼로데이라는데 편의점에 빼빼로보다 초콜릿 상품이 더 많더군요.왜인가 했더니 수능때문인가 봅니다. 조금 전에 물티슈 사러 들어갔다가 새삼 느꼈습니다.수능에 대한 기억이 좋진 않아서요. 수능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이맘때쯤이면 '수능'이라는 걸 잊으려고 합니다.
9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있습니다.그런 탓에 제 10대 학창시절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위치 위에서 흘러갔습니다.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모범생 딸을 연기하며, 보모역할도 했습니다.부모님이 힘들게 돈 버시는 이유도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건 하고, 도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철없는 얘기를 할 때에도, 놀러다닐때에도저는 부러워해야만 했고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느라 항상 학원 수업시간에 늦곤 했는데선생님이 농담으로 던진 ‘보모’, ‘어머님’ 같은 말에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아빠와의 관계였습니다.아빠는 항상 술을 마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분이신데 언제부터인가 술 없이는 못 사는 분이 되셨습니다.술도 약한 분이 주정은 심해서 상냥하고 가정적이던 엄마의 얼굴에도 슬슬 그늘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일은 언제나 제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행복한 편이라고 스스로 위안삼고 그랬습니다.동생이 잘못을 하면 언제나 제가 대신 혼났고시험을 잘 보고 오면 점수가 비교적 낮은 과목 하나 때문에 혼이 났습니다.그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집안일에 대한 짜증이었습니다.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술마시고 퇴근해 들어온 아빠는 방문을 열어 제치면서"왜 설거지 안 해놨느냐, 세탁기는 왜 안 돌려놨냐" 하고 역정을 내셨습니다.집에서는 보모이자 가정부였고, 밖에서는 학생이었고, 동생에게는 누나이자 이모였습니다.그 모든걸 다 해내야했습니다.열다섯살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열여섯살에 본인도 자살을 시도했다는 아빠의 고백을 들었습니다.열일곱살에 독신주의자가 되었습니다.아빠의 피가 내 몸에도 흐를 테니까 나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내 자식에게 이런 불행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겉으로는 유복한 가정이겠지만 저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공부는 최상위 등급은 아니었지만 썩 잘했었습니다. 한양대, 경희대 수시에 합격했고 수능 최저등급만 넘기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을 망쳤습니다. 핑계겠지만 고3때는 제 삶의 지옥불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수능을 잘 쳤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겁니다. 수시 합격을 확인한 날, 용기를 내서 아빠한테 술을 줄이면 안되겠냐는 말을 꺼냈습니다.아빠한테 뺨을 맞았습니다.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기가 쓰레기라면서 자기가 죽어야한다면서 자기가 인간쓰레기라면서 푸념만 하고 제 눈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참고 그런 아빠를 끝까지 쳐다봤습니다. 엄마는 그 주 주말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동생의 방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애매한 애늙은이처럼 살지만, 동생만은 평범한 애들처럼 자라길 바라고 바랐습니다. 수능을 망쳤습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가 나왔습니다. 다 던지는 심정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좀 낮은 대학에 갔습니다. 아빠돈은 한 푼도 빌리기 싫어서 장학금을 받을 생각으로 갔습니다. 대학이 뭐라고 저에게도 허영심이 있었나 봅니다. 입학식날 자퇴원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12년의 학창시절이 이렇게 무의미해지는구나 싶어 공허해졌습니다. 피해망상마저 들었습니다. 공허와 피해망상이라는 병에 걸리자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겨워지고, 담임선생님의 얼굴조차 안 보고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고, 버스를 타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수를 했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야속하게, 무의미하게,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재수 끝에 본 수능도 별로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언어영역을 풀다가 문득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 찍었습니다. 운좋게도 잘 찍히긴 했습니다. 왜 찍었는지에 대한 울분을 아빠에게 다 쏟아부으려 했습니다. 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철없는 반항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 학창시절 성적도 잘 모르고 계셨고, 저를 한심하게만 여기면서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그 때부터 저는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대화는 사라졌습니다. 어영부영 대학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습니다. 첫 직장은 힘들었지만 집에서 독립할 자금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녔습니다.썸남도 있고 배움이 있어서 좋았습니다.그러던 중 문자가 왔습니다. 5년 동안 소식이 없던 엄마의 이름이 적힌 문자였습니다.부고 문자라는걸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검은색 상복치맛자락만 붙들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서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제법 유능한 공무원인 엄마와 아버지인건지 조문객은 많았습니다. 저에게는 네가 OO니? 라는 말만 귓가를 스쳐갔고,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외할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꼭 5년만에 뵈었는데 머리가 완전히 새하얀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셨습니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 댁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마로 인한 관계 단절이 항상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혔던 외조부모님의 모습. 너무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목구멍이 메여서 목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눈물이 자꾸 흘러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그때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무너지셨습니다. 바닥에 엎드려서 흐느끼며 울고 계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아버지 등을 붙잡고 흐느껴 우셨고, 점잖으신 외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천장만 바라보셨습니다. 지금도 그 때 그 장면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상을 치르고 나서 아버지와 대화를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남은 짐을 추리려고 외할아버지댁 집 한 켠, 엄마의 장롱을 열어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래도 행복했던 어린시절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학창시절에 서러웠던 얘기도 얘기했습니다. 돌이켜보고 막상 얘기해보니 사소한 사건사고들이었습니다. 조금씩 앙금을 풀었고, 가끔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퇴근할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족발을 사오셨고, 저는 이따금씩 의미없는 선물을 아빠와 남동생에게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두번째 직장은 제 전공과 무관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 같아 야근도 즐겁게 했습니다. 아빠는 날이 춥다면서 저에게 이것저것 사주셨고, 한 번은 크림파스를 사다주셨습니다. 육각형의 하얀 케이스 안에 폼클렌징이나 썬크림처럼 생긴게 들어있었는데,폼클렌징인줄 알고 발랐다가 눈이 매워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바르는 순간에도 허브향 같은게 나서 상상도 못했습니다. 퇴근 후에 바르자마자 “아빠! 이거 뭐야!!” 하고 소리질렀는데, 새삼 드라마 속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그것마저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빠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 이후로 그 크림파스를 자주 사다주셨습니다. 알아보니 꽤 비싼 고급 스포츠파스였습니다. 헬스장 갈때나 조깅할 때 바르고 뛰면, 핫팩 붙인 것처럼 따뜻하고, 땀이 더 많이 나서 애용했습니다. 특히 아빠 어깨에 발라주고 주물러 드리고 하면서 보모가 아닌 효녀 노릇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통을 다 발라버렸습니다.꽉꽉 쥐어짜서 다 발랐습니다.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남동생은 옆에서 쳐다보면서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물티슈 사다줄까 하길래 그냥 제가 사온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이틀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야 다시 가까워져 아빠가 되었는데, 한없이 멀리 가버리셨습니다.출근했다가 그대로 병원으로 왔습니다.병원인 것만 알겠고 제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는지 무엇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가방 안에서 아빠와 관계가 있는 물품은 크림파스 하나, 폰 안에 들어있는 연락처 하나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젠 걸어도 안 받으시겠죠. 파스를 발라드릴 어깨는 너무도 차갑겠죠.혹시 발라서 따뜻하게 해드리면 일어나실까요. 조금은 딸 노릇을 해보려고 했는데, 다시 애늙은이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는얘기... 제 사는얘기입니다
9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남동생이 있습니다.그런 탓에 제 10대 학창시절은 아이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위치 위에서 흘러갔습니다.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모범생 딸을 연기하며, 보모역할도 했습니다.부모님이 힘들게 돈 버시는 이유도 다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건 하고, 도와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철없는 얘기를 할 때에도, 놀러다닐때에도저는 부러워해야만 했고 생각만 해야 했습니다.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오느라 항상 학원 수업시간에 늦곤 했는데선생님이 농담으로 던진 ‘보모’, ‘어머님’ 같은 말에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아빠와의 관계였습니다.아빠는 항상 술을 마시고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던 분이신데 언제부터인가 술 없이는 못 사는 분이 되셨습니다.술도 약한 분이 주정은 심해서 상냥하고 가정적이던 엄마의 얼굴에도 슬슬 그늘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안일은 언제나 제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어려움은 없었기 때문에 행복한 편이라고 스스로 위안삼고 그랬습니다.동생이 잘못을 하면 언제나 제가 대신 혼났고시험을 잘 보고 오면 점수가 비교적 낮은 과목 하나 때문에 혼이 났습니다.그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집안일에 대한 짜증이었습니다.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술마시고 퇴근해 들어온 아빠는 방문을 열어 제치면서"왜 설거지 안 해놨느냐, 세탁기는 왜 안 돌려놨냐" 하고 역정을 내셨습니다.집에서는 보모이자 가정부였고, 밖에서는 학생이었고, 동생에게는 누나이자 이모였습니다.그 모든걸 다 해내야했습니다.열다섯살에 자살을 시도했습니다.열여섯살에 본인도 자살을 시도했다는 아빠의 고백을 들었습니다.열일곱살에 독신주의자가 되었습니다.아빠의 피가 내 몸에도 흐를 테니까 나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내 자식에게 이런 불행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겉으로는 유복한 가정이겠지만 저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공부는 최상위 등급은 아니었지만 썩 잘했었습니다. 한양대, 경희대 수시에 합격했고 수능 최저등급만 넘기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능을 망쳤습니다. 핑계겠지만 고3때는 제 삶의 지옥불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수능을 잘 쳤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겁니다. 수시 합격을 확인한 날, 용기를 내서 아빠한테 술을 줄이면 안되겠냐는 말을 꺼냈습니다.아빠한테 뺨을 맞았습니다.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기가 쓰레기라면서 자기가 죽어야한다면서 자기가 인간쓰레기라면서 푸념만 하고 제 눈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참고 그런 아빠를 끝까지 쳐다봤습니다. 엄마는 그 주 주말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피해자이자 방관자였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동생의 방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애매한 애늙은이처럼 살지만, 동생만은 평범한 애들처럼 자라길 바라고 바랐습니다. 수능을 망쳤습니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가 나왔습니다. 다 던지는 심정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좀 낮은 대학에 갔습니다. 아빠돈은 한 푼도 빌리기 싫어서 장학금을 받을 생각으로 갔습니다. 대학이 뭐라고 저에게도 허영심이 있었나 봅니다. 입학식날 자퇴원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12년의 학창시절이 이렇게 무의미해지는구나 싶어 공허해졌습니다. 피해망상마저 들었습니다. 공허와 피해망상이라는 병에 걸리자 친했던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겨워지고, 담임선생님의 얼굴조차 안 보고 도망치듯 학교를 나왔고, 버스를 타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재수를 했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야속하게, 무의미하게,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재수 끝에 본 수능도 별로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언어영역을 풀다가 문득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다 찍었습니다. 운좋게도 잘 찍히긴 했습니다. 왜 찍었는지에 대한 울분을 아빠에게 다 쏟아부으려 했습니다. 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철없는 반항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이유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제 학창시절 성적도 잘 모르고 계셨고, 저를 한심하게만 여기면서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그 때부터 저는 아빠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대화는 사라졌습니다. 어영부영 대학을 마치고 사회로 나왔습니다. 첫 직장은 힘들었지만 집에서 독립할 자금을 모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다녔습니다.썸남도 있고 배움이 있어서 좋았습니다.그러던 중 문자가 왔습니다. 5년 동안 소식이 없던 엄마의 이름이 적힌 문자였습니다.부고 문자라는걸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검은색 상복치맛자락만 붙들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서있었습니다. 밖에서는 제법 유능한 공무원인 엄마와 아버지인건지 조문객은 많았습니다. 저에게는 네가 OO니? 라는 말만 귓가를 스쳐갔고,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외할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꼭 5년만에 뵈었는데 머리가 완전히 새하얀 백발의 노인의 모습이셨습니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 댁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마로 인한 관계 단절이 항상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혔던 외조부모님의 모습. 너무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있었습니다. 처음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목구멍이 메여서 목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눈물이 자꾸 흘러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그때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무너지셨습니다. 바닥에 엎드려서 흐느끼며 울고 계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아버지 등을 붙잡고 흐느껴 우셨고, 점잖으신 외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천장만 바라보셨습니다. 지금도 그 때 그 장면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상을 치르고 나서 아버지와 대화를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남은 짐을 추리려고 외할아버지댁 집 한 켠, 엄마의 장롱을 열어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래도 행복했던 어린시절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학창시절에 서러웠던 얘기도 얘기했습니다. 돌이켜보고 막상 얘기해보니 사소한 사건사고들이었습니다. 조금씩 앙금을 풀었고, 가끔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퇴근할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족발을 사오셨고, 저는 이따금씩 의미없는 선물을 아빠와 남동생에게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습니다. 두번째 직장은 제 전공과 무관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 같아 야근도 즐겁게 했습니다. 아빠는 날이 춥다면서 저에게 이것저것 사주셨고, 한 번은 크림파스를 사다주셨습니다. 육각형의 하얀 케이스 안에 폼클렌징이나 썬크림처럼 생긴게 들어있었는데,폼클렌징인줄 알고 발랐다가 눈이 매워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바르는 순간에도 허브향 같은게 나서 상상도 못했습니다. 퇴근 후에 바르자마자 “아빠! 이거 뭐야!!” 하고 소리질렀는데, 새삼 드라마 속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그것마저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빠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 이후로 그 크림파스를 자주 사다주셨습니다. 알아보니 꽤 비싼 고급 스포츠파스였습니다. 헬스장 갈때나 조깅할 때 바르고 뛰면, 핫팩 붙인 것처럼 따뜻하고, 땀이 더 많이 나서 애용했습니다. 특히 아빠 어깨에 발라주고 주물러 드리고 하면서 보모가 아닌 효녀 노릇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통을 다 발라버렸습니다.꽉꽉 쥐어짜서 다 발랐습니다.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남동생은 옆에서 쳐다보면서 말리지도 않았습니다. 물티슈 사다줄까 하길래 그냥 제가 사온다고 하고 나왔습니다. 이틀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야 다시 가까워져 아빠가 되었는데, 한없이 멀리 가버리셨습니다.출근했다가 그대로 병원으로 왔습니다.병원인 것만 알겠고 제가 지금 어디에 앉아있는지 무엇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가방 안에서 아빠와 관계가 있는 물품은 크림파스 하나, 폰 안에 들어있는 연락처 하나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젠 걸어도 안 받으시겠죠. 파스를 발라드릴 어깨는 너무도 차갑겠죠.혹시 발라서 따뜻하게 해드리면 일어나실까요. 조금은 딸 노릇을 해보려고 했는데, 다시 애늙은이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