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30살(12)

리드미온2004.01.19
조회15,368

왜 진실은 위험한 순간에 감춰지고, 거짓은 드러나는 걸까?

민준이 상상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내 머릿속에서도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어젯밤에 지선이 아닌 다른 남자와 콘도에서 보낸 다음 그를 보내고 민준과 다시 데이트를 했다'라는...

 

물론 진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김대리의 일행과 만나서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줄이야.

덜렁이 김대리가 자기 지갑을 곱게 챙겨 놓는다고 아마도 화장대의 서랍에 지갑을 넣어둔 것 같았다.

나는 콘도를 청소하면서 그곳에 지갑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체크아웃을 하려고 빠진 짐이 있나 챙기던 민준이 먼저 발견한 것이었다.

 

김.대.리......정말 이렇게 날 방해하다니....

민준에게서 받아든 지갑을 펼쳐보니 역시 내 예상대로

'김정민'이라고 쓰여지고 사진까지 박혀 있는 김대리의 운전면허증이 마치 날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밑에 쓰여진 주민번호가 그의 나이까지 또 주소가 그의 위치까지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이건 김대리와 나의 악연이다....

어제의 내 착한 일들의 보상치고는 너무 쓴 댓가가 아닐까....

아니면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는 것일까...

 

김.대.리...정말 너무하다...3년 만에 연애다운 연애 한번 하는데 이렇게 산통을 깨다니...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민준도 멍하니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거기다 이젠

'텐미닛...텐미닛...'

직장으로 설정된 벨소리까지 울린다. 화면에 이름이 뜬다...

'김.정.민'

나는 그 전화를 받을 수도 없다. 이 난감함이란....

 

"전화 받아....지갑 주인인 거 같은데...."

민준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 전화마저 안받는다면 더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

일단 전화를 받고 해명을 해보자....

이럴 땐 정면의 진실이 최고이리라...하긴 나는 민준에게 조금도 찔릴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난.....결백하다.......

 

"어..김대리?"

난 일부러 '김대리'라는 소리를 강조했다.

 

"어...어디세요?"

 

"응..콘도..."

 

"앗...강팀장님 말대로 남자라도 하나 헌팅하셨나요? 아직도 계시게...."

야....지금 그렇게 시시껄렁할 농담할 때가 아니란 말야....

 

"휴우...잘 됐네요. 내가 지갑을 거기다 놓고 왔더라고요. 스키 타러 나갈 때 그냥 나간 후에 여기로 왔잖아요."

그런 전화는 좀 미리해주면 안되나? 최소한 1시간만 먼저 했어도 나의 행복한 환상은 이렇게 무참히 깨지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타이밍에 비협조적인 남자는 내 생애 처음인 것 같았다.

 

"응...챙겨줄게...그리고 다린 어때?"

"크크크크....일주일 휴가에요. 고생하셔야겠어요....팀장님...."

"알았어...이만 끊자..."

정말 짜증스럽다. 김대리의 그 유쾌함....

 

이젠 민준에게 말하자...모든 사실을...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몫이다....

 

"저기...."

"너무 늦겠다...가자...서울로...."

민준은 내가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무시하고는 먼저 콘도밖을 나가 버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와 민준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 계속되고 있었다.

이 어색한 침묵....나에겐 견디기 힘든 형벌처럼 느껴졌다.

차라리....화라도 내면 좋으련만.....

나는 견디지 못하고 차를 갓길에 세워버렸다.

 

"민준아...잠시 얘기 좀 하자..."

차라리 유쾌한 농담으로 이 분위기를 깨야하는 건지 다시 진지하게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난 그렇게 일단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하나만 묻자...나 말고 다른 남자 친구 있니?"

민준은 내 설명을 듣기도 전에 먼저 물었다.

 

"아니....."

바보야...당연히 그건 아니지...너한테 이렇게 푹 빠져 있는 모습 보이지 않니?

 

"그럼 됐다...."

민준은 짧게 말을 끊고는 나를 안아 버렸다.

몇 시간 동안 혼자 견디던 어색함이 포근하고 달콤한 마술로 바뀌고 있었다.

그럼....민준은 결코 날 오해하지 않고 있었단 건가?

 

"나....질투하나봐.....아닐 거란 걸 알면서도...견디기 힘들더라..."

민준의 그 말에 눈물이 난다.

날 의심하거나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질투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라고?

 

"울어?"

민준은 나의 작은 흐느낌을 듣고 눈가를 손으로 어루만져 주며 물었다.

 

"그렇게 억울했어?"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게 아니라...."

"알아..괜찮아...네가 더블 데이트를 할 여자라고 생각했다면 첨부터 고백도 안했을 거야..."

사랑은 믿음이다.

민준은 그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날 믿어주었다.

어떻게 이 남자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동안 만났던 모든 남자들은 기억속에서도 지우고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쓸어서 우주로 밀어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민준과 런던에 뮤지컬을 보러가는 금요일을 기다리면서 일주일은 참으로 더디고 힘겹게 흘러갔다.

거기다 김대리의 공백이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대리의 공백은 김대리가 표현한 대로 김대리가 없음으로 내가 김대리를 애절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많이 불편한 정도였다. 일이 두배로 늘어난 기분이었는데 은수씨에게 맡기면서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었다.

 

금요일 아침이었다. 일주일 전처럼 나는 런던에 갈 짐을 챙겨와서 들 떠 있었다.

갑자기 매출 자료를 부장이 찾는 바람에 김대리와 일주일 만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

 

"앗...팀장님...어째 전화 한 통 없이 잘 버티나...했어요. 은수씨하고 하연씨는 한번은 왔었는데..."

 

"김대리 땜에..내가 이 지경인데...병문안을 어떻게 가나?"

병문안은....김대리 모르게...맘 고생한 게 얼만데...그래도 다리 다친 거 때문에 당장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걸 참고 있을 뿐인데...이 뻔뻔한 녀석아....

 

"매출 자료 어딨어?"

 

"그거 당연히 제 컴퓨터에 있죠..."

이미 김대리 컴퓨터를 키고 이것저것 문서를 뒤지고 있는 터였다.

남의 컴퓨터를 보는 게 예의는 아니지만 김대리가 병원에 있는 동안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보라고 했던 터라 아무 거리낌 없이 보고 있었다.

 

"이미 컴퓨터 내 문서까지 열어봤어. 문서 이름이 뭐냐고?"

"아...그게 말이죠...."

 

김대리의 컴퓨터 화일들은 생각보다 잘 정리되어 있었다.

원리만 조금 알면 누구라도 찾을 수 있게 문서 이름과 번호들이 나름대로 체계적이었다.

 

"그리고...팀장님....부탁이 있는데요...."

 

"부탁?"

내가 또 김대리의 무슨 부탁을 들어줘야 한단 말인가.....

 

"이제 웬만하면 부탁하지 말고 직접 출근해서 해..."

 

"그게 아니라 시간이 걸린 문제라..."

 

그래....착한 일....착한 일....착한 상사...착한 여자...착한 인간....

꾹 참고 다시 김대리의 부탁을 들어주자고 생각했다.

 

"저기 티켓링크 사이트에 가셔서요. 제아이디와 비번으로 로그인 해서 토요일 뮤지컬 왕과 나 표 좀 취소해주세요. 내일 예약했는데...제가 못갈 거 같아요...혹시 일찍 나으면 가려고 두었는데 도저히 안되겠네요..."

 

김대리가 말해준 아이디와 비번으로 들어가서 뮤지컬 표를 취소 했다. 토요일 오후 7시 표였다. 2장이었고 거기다 VIP석이었다. 무슨무슨 패키지가 있다는....

이 녀석이 애인이 있나? 누구와 보려고 이런 비싼표를....

 

"그리고...해주시는 김에 하나만 더요...."

쩝...요구 사항도 무지 많군...이젠 귀찮아서라도 김대리의 출근이 기다려진다....

 

"이왕 로그인 하신 거...제 메일도 좀 정리해주세요. 혹시 업무에 관한 메일 중에 밀린 거 있음 봐주시고요. 스팸메일이 있으면 좀 지워주시고요..."

메일 정리까지?

다리 다쳤다고 이젠 이런 부탁까지....난 네 상사지 비서가 아니란 말야....

 

"알았어... 월요일 출근은 틀림 없는 거지?"

난 예의상이라도 몸조리 잘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저것 김대리가 부탁하는 바람에 월요일 출근하라고 압박을 넣는 것으로 전화를 끊었다.

 

김대리의 메일함에는 새편지가 200통쯤 쌓여 있었다. 거기다 한 눈에 보기에도 스팸 메일인 듯한

'오빠..나야.' 혹은 '***님만 보세요'라던가 '몰카 천국...'등의 메일이 가득했다.

업무 메일이라고는 김대리가 병원에 있는 것을 모두가 알고라도 있듯이 한통도 없었다.

한 100통의 메일을 지워나가다가 제목이 눈에 띄는 메일을 발견했다.

 

'김정민님에게 이은수님이 보낸 음악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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