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본사 주지 빠짐없이 개명…불교잡지 등 언론 통해 절차·방법 자세히 소개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히쿠’…불교계 절반 이상이 개명 참여
<사진>31본사 주지들의 창시개명 현황.
불교계의 창씨개명 상황 역시 비슷하였다. 1940년 총독부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전조선의 승려 수는 6,60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창씨개명을 한 승려 수는 3,359명이었으니 과반수를 넘어선 숫자이다. 당시 교계를 주도하고 있던 총본산건설사무소에서는 1940년 6월 17일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무료 상담소 설치·운영과 수속사무를 대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교계의 신문과 잡지에는 창씨개명의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1940년 6월 『불교(신)』 제24집에는 31본사 주지 가운데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과 일본어 발음을 게재하였고, 『불교(신)』 제26집에는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소개하였다. 1940년 12월에 발간된 『불교시보』 제65호에 누락된 4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본사는 31개이지만 평안도의 영명사와 법흥사의 주지는 한 사람이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본사 주지는 30명이었다. 결국 1940년 연말까지 본사 주지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총독부는 보다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조선불교 조계종의 창립을 종용하였다.
이 조계종은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신이며 일제 말기에 불교계의 친일 행각을 지휘하였다. 초대 종정 방한암은 불교계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오대산 상원사에 칩거를 하고 있었으나 그 마저 산천중원(山川重遠:야마가와 쥬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종무총장 이종욱은 광전종욱(廣田鍾旭:히로다 쇼이꾸)로 창씨 개명하였다. 그는 일본이 1944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불교 잡지에 「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하고」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人)이 잘 시행된다는 것으로 기쁜 일이라고 하였다.
내선일체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은 종족이라는 설이며, 일시동인이란 일본 천황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 같이 취급한다는 뜻으로 황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결코 같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봉급은 대략 3배 정도 차이가 났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받는 봉급의 3분의 1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일은 조선인이 도맡아 해야 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과 종무총장에 이어 주요 간부들도 모두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다. 교무부장이었던 임석진은 하야시 겐기찌(林原吉)로 서무부장이었던 김법룡은 가가와 호류(香川法龍)로, 재무부장이었던 박원찬은 아라이 엔산(新井圓讚)으로 창씨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계의 인사들도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혜화전문학교 교수였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던 권상로는 안토 소로우(安東相老)로,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을 지냈던 김경주는 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로, 1944년 혜화전문이 폐교될 때까지 재직하였던 김두헌은 쯔루야마 아키라(鶴山 憲)으로 창씨개명하였다.
혜화전문 교수를 지내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을 지낸 김동화는 가네가와 도까(金河東華), 조선후기 승려들의 군역문제를 해명하고, 『한국불교사』를 저술하였던 우정상은 단장 사다미(丹山貞相)으로 성을 바꾸었다. 역시 혜전 교수를 지내고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명기는 이와 아키모토(以和明基)로 창씨개명하였다. 이 밖에도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를 지내고 심전개발 순회강연의 명연사였으며, 당시 불교계의 신문인 『불교시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자었던 김태흠은 가네야마 다이지(金山泰洽)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처럼 불교계는 교단의 집행부와 학계 할 것 없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성씨를 바꾸는 창씨와 이름을 바꾸는 개명 작업에 동참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친일파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지배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봉에 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과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한 사람들의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동족으로 하여금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의 하수인이 되기를 강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교계도 친일이다...
창씨개명과 불교계의 반응
교단 집행부가 창시개명 주도…친일 행각도 절정
<사진설명>창시개명 서류를 법원에 제출할 것을 촉구하는 전단
31본사 주지 빠짐없이 개명…불교잡지 등 언론 통해 절차·방법 자세히 소개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히로다 쇼히쿠’…불교계 절반 이상이 개명 참여
<사진>31본사 주지들의 창시개명 현황.
불교계의 창씨개명 상황 역시 비슷하였다. 1940년 총독부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전조선의 승려 수는 6,60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창씨개명을 한 승려 수는 3,359명이었으니 과반수를 넘어선 숫자이다. 당시 교계를 주도하고 있던 총본산건설사무소에서는 1940년 6월 17일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무료 상담소 설치·운영과 수속사무를 대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교계의 신문과 잡지에는 창씨개명의 절차와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1940년 6월 『불교(신)』 제24집에는 31본사 주지 가운데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과 일본어 발음을 게재하였고, 『불교(신)』 제26집에는 13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소개하였다. 1940년 12월에 발간된 『불교시보』 제65호에 누락된 4명의 창씨 개명된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본사는 31개이지만 평안도의 영명사와 법흥사의 주지는 한 사람이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본사 주지는 30명이었다. 결국 1940년 연말까지 본사 주지들은 모두 창씨개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총독부는 보다 효과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불교계의 통일기관인 조선불교 조계종의 창립을 종용하였다.
이 조계종은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전신이며 일제 말기에 불교계의 친일 행각을 지휘하였다. 초대 종정 방한암은 불교계의 상징적인 존재이며 오대산 상원사에 칩거를 하고 있었으나 그 마저 산천중원(山川重遠:야마가와 쥬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간부들은 모두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종무총장 이종욱은 광전종욱(廣田鍾旭:히로다 쇼이꾸)로 창씨 개명하였다. 그는 일본이 1944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불교 잡지에 「징병제 실시의 영(榮)을 예대하고」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군에 입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人)이 잘 시행된다는 것으로 기쁜 일이라고 하였다.
내선일체란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은 종족이라는 설이며, 일시동인이란 일본 천황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 같이 취급한다는 뜻으로 황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결코 같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봉급은 대략 3배 정도 차이가 났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이 받는 봉급의 3분의 1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잔심부름과 궂은일은 조선인이 도맡아 해야 했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종정과 종무총장에 이어 주요 간부들도 모두 창씨개명에 참여하였다. 교무부장이었던 임석진은 하야시 겐기찌(林原吉)로 서무부장이었던 김법룡은 가가와 호류(香川法龍)로, 재무부장이었던 박원찬은 아라이 엔산(新井圓讚)으로 창씨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계의 인사들도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혜화전문학교 교수였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던 권상로는 안토 소로우(安東相老)로,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을 지냈던 김경주는 가네야마 게이쥬(金山敬注)로, 1944년 혜화전문이 폐교될 때까지 재직하였던 김두헌은 쯔루야마 아키라(鶴山 憲)으로 창씨개명하였다.
혜화전문 교수를 지내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학장을 지낸 김동화는 가네가와 도까(金河東華), 조선후기 승려들의 군역문제를 해명하고, 『한국불교사』를 저술하였던 우정상은 단장 사다미(丹山貞相)으로 성을 바꾸었다. 역시 혜전 교수를 지내고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조명기는 이와 아키모토(以和明基)로 창씨개명하였다. 이 밖에도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를 지내고 심전개발 순회강연의 명연사였으며, 당시 불교계의 신문인 『불교시보』의 편집 겸 발행인이자었던 김태흠은 가네야마 다이지(金山泰洽)로 창씨개명하였다.
이처럼 불교계는 교단의 집행부와 학계 할 것 없이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성씨를 바꾸는 창씨와 이름을 바꾸는 개명 작업에 동참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친일파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지배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봉에 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과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한 사람들의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동족으로 하여금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일본인의 하수인이 되기를 강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