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본 일기-6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2004.01.21
조회602

"임마, 꼴랑 한달 있을 거면서 무슨 옷이 이리 많냐?"

내 아파트에서 한달간 얹혀지낼 그녀의 짐을 정리하며 마음에 없이 투덜거렸다.

"원래 여잔 다 그래."

"그래? 너도 여자구나?"

"뭔 뜻이냐? 죽고잡다는 뜻으로 새길까?"

"넘어가. 내 짐은 대충 뺐으니까, 니껀 니가 정리해."

"그래. 에휴, 울 마왕한테 찍혀서 이게 뭔 고생이냐. 요번엔 좀 길다."

"그러게."

맞장구는 쳤지만,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혼자 지내는 집에 사람하나  더 들어오는게 뛸듯이 반갑기까지 했다.

"참. 경민아, 너 저번처럼 여자친구 델꾸 와서 비디오 찍을꺼면 미리 말해라. 차라리 딴 친구 집가서 자고 올테니깐. 민망해서원."

"쳇! 성인 남녀 다 그렇지. 너 혼자 깨끗한 척하지마. 솔직히, 너도 이제껏 남자들 한두 명 사귄 것도 아니잖아."

"그래. 니 사생활 간섭안해. 안하는데, 건 아니다. 니 집이구, 니 여자친구 데리고 오는거 좋아. 그치만, 나 보기 민망안해? 난 다음 날 아침에 니 여자친구 보기 민망해."

"킥킥킥...뭐가 민망해?"

"몰라. 왜, 저번에,  나 니네 집에 일주일 있었잖아. 은하인가? 걔가 아침에 너한테 느끼한 웃음 짓는데, 으~~!! 생각만해도 닭살돋아!! 아침부터 오바이트 쏠리더라."

"아~! 너 과외 알바 때려쳐서 마왕한테 쫒겨 났을때? 기집애가 별걸다..!! "

"어쨌든, 앞으로 그런 불상사는 막아줘. 에휴.. 너도 생각좀 하고 살아라."

"뭔 뜻이야? 너 같은 둔재가 나 같은 수재보고 그런 말을 다하고."

"뭐? 둔재? 이씨!  꼴랑 N주립대 다니는게 자랑이냐? 하버드도 아니구, 옥스퍼드도 아니면서. 그래봤자, 아직 졸업두 못해서 한국에서 빌빌거리면서."

"임마! 옥스퍼드는 영국이야. 하여튼, 무식이 하늘을 치솟아요. 쯧쯧.."

"무식? 죽을래? 무식한 년한테 무식하게 맞을래? 너 행동이나 똑바로해. 옆 집에서 너 어떻게 보겠냐. 맨말 여자가 들락거리지. 거기다가 들락거리는 여자마다 죄다 바뀌지."

"기집애가 콱! 임마, 니가 젤 많이 들락거려. 글구, 막말로 딴 여자들이야 내가 델꾸 오니까 오해받아도 그러려니 하지만,  넌 아니다. 너에 대한 오해는 억울하지."

솔직히 혼자 사는건 외로움을 잘 타는 내 성격상 너무 힘들다.

불꺼진 집에 혼자 들어서는 그 적막함이 싫어서 여자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데려온 편이었다.

그녀도 그런 날 잘 알고 있지만, 나에대한 오해는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오해를 하도록 내버려 둔 편 이었다.

"뭐? 피차 일반이야."

"그럼 나가던가. 왜 자꾸 들락거려?"

"내 맘이다. 암튼, 딴 소리 말고 너 주의 해. 아이구 힘들다, 허리 아프네. 낼 출근 하려면 죽겠다. "

"기집애, 그만하고 일루 와서 엎드려. 허리 주물러 줄께."

"어, 살살해야돼."

" 엄살은. 예전에 날리던 넌 어디 갔냐?"

그녀에게 안마를 해주며 물었다.

"킥킥.. 예전에 한참이었는데. 그지?"

"아냐, 임마. 너 어렸을 땐 맨날 울고 다니던거 기억 안나?"

"기억에 없습니다."

"푸하하하. 아이구, 하여튼."

"경민아, 나 열쇠하나 더 파줘."

"안돼. 또 잊어버릴려구? 불안해."

"아씨... 나 낼 회사 조퇴할거야. 일찍 들어와서 쉬려고. 치과도 가야하고."

"치과? 왜, 또 쌈하다 부러졌냐?"

"아니. 내가 쌈꾼이냐. 사랑니 낫어.신경쓰여 뽑을려구."

"사랑니? 이제 낫어? 애도 아니고. "

"뭐? 그런 넌? 다 낫어?"

"얌마! 나야 안낫지. 사링니 나는 것도 진화가 덜 된거래. 하하하. 너야 원채 더디니."

"아냐. 이쒸~!! 아!! 경민아,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니?"

"뭐가? 왜 또, 무슨옛날 고리쩍 얘기 꺼낼려고?"

"왜 있잖아, 일학년 땐가? 우리 이빨 빠지는 거 시합했잖아? 그때 내 기억으로는 내가 이긴거 같은데?"

 

기억난다.

일학년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나이 또래 한참 유치가 빠지고 새로 이가 나던 시기 였다.

어느 날,  내 짝이었던 그녀가  앞니 하나 뻥 뚫려서 등교한 적이 있었다.

"얼레리 꼴레리~ 대문 열렸대요~ ,얼레리꼴레리~ 이빨빠진 괴물이래요~"

그날 그녀는 예외없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하루종일 놀림을 당해야 했다.

나 역시 아이들과 어울려 짝꿍이었던 그녀를 실컷 놀려주었다.

학교가 끝나고 같이 집에 가는 길에도 펑펑 울던 그녀가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에는 아이들의 놀림에 의연하게 씩 웃는 것이아닌가.

"얘들아, 니넨 아직 이빨 안 빠졌지? 그럴거야. 이빨빠지는건 어른이 된다는 거거든.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훗~"

헉.

그녀의 받아치는 말에 우리 모두 어린 애가 되어서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잃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집에 돌아가 하루종일 떼쓰며 울던 그녀를 달래기 위한 마왕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런 걸 알리 없는 우리 사내 녀석들 몇명은 어른이 되기 시작한(?)  그녀 앞에서 기가 죽어 더 이상 놀리지 못하고 슬슬 피하기 만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드디어 우리에게도 빛이 보였다.

내 이빨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해서 빠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 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녀를 따라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삼일간을 침을 질질 흘려가며 이가 더 빨리 빠지도록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아랫니 두개가 동시에 빠지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 날 그녀에게 자랑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등교를 했다.

"야!! 이거 봐라! 나도 이빨 빠졌어. 나는 두개나 동시에 빠졌어. 그러니까 너보다 내가 어른이야. 앞으로 오빠라구 불러. 알았지?"

아랫니가 두 개나 빠져 흉칙한 모습에 새는 발음으로 난 자랑스럽게 그녀를 누를수 있었고, 기어이 '오빠'란 호징을 받아 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못 견뎌 했고, 자신의 이가 빨리 빠지기를 기도까지 해가며 애태웠던 것이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 덕분 이었을까?

며칠만에 판세는 뒤집어져 그녀의 이가 하나 더 빠졌다.

"경민아! 이거봐라! 나도 이빨 두 개 빠졌어. 쌤쌤이다."

스코어는 2대2 동점.  

 우린 서로를 견제하며 상대방보다 하루 라도 빨리 이가 빠지기를 바랬다.

아침에 등교할 때면, 혹시라도 상대가 먼저 이가 빠지지 않았나 싶어 서로의 이부터 확인했다.

긴장된 나날이 지속 되던 어느 날 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고, 드디어 내 이 하나가 더 빠져서 난 세 개 씩이나 빠진 이로 등교를 했다.

그날 난 하루종일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고, 그녀는 분한듯 마지 못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난 그녀에게서 다시 '오빠'란 타이틀을 얻어 냈고, '오빠'로 불리며 우월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지기싫어하는 성격을 간과한데 있었다.

나에게 지는 것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마왕을 졸라 치과까지 억지로 갔던 것이다.

"엉엉~~이빨 뽑아줘! 엉엉~~!"

"얘가 정말 왜 이래? 이 안 뽑아도 괜찮다니깐. 왜 멀쩡한 이를 뽑아?"

"거 참, 특이한 아이군요. 보통 애들은 이 뽑는 것을 싫어하는데. 이 뽑아 달라고 조르기 까지 하니."

"히잉~ 뽑아줘...잉잉~~!!"

마왕의 말에 의하면 의사 선생님도 기가 차 하시며 어쩔 수 없이 조금 흔들리기 시작한 이 하나를 뽑아 주셨다고 한다.

"훌쩍~!하나더요..."

"안돼! 얘가 정말?!"

"안대~~!! 살랑 소바더여(빨랑 봅아줘요)~~!!"

새는 발음으로 기어이 이 하나를 더 뽑아낸 그녀는 겨우 만 족하며 물러났다고 한다.

윗니 하나, 아랫니 세 개, 총 네 개의 뻥 뚫린 이로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그녀는 우리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얘들아! 나 이빨 네개 빠졌다. 앞으로 누나라 불러!!"

"어..그...그래!!대단하다.... 누...나..."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린 한동안은 그녀를 쉽게 놀리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 추억을 더 올리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인거 같다.

이런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도 행복중 하나 인거 같다. 

오랜만에 그녀와의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킥킥 거리다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