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데엔

201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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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엔 누구나 많든 적든 굴레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얽어매고 괴롭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인간관계였다.

어릴적 몸이 약해 좋아하던 유치원도 끝까지 다니지 못하고, 전염병이라도 돌면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했던 아이는 말 그대로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로 컸고,

그렇게 마음맞는 친구 몇몇과 놀던 아이는 아무 마음의 준비 없이 간 기숙 학교 생활을 버티지 못했다.

어릴적부터 '친구'라는걸 동경하던 아이는 아무 생각 없이 당시 친하던 친구와 같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숙 학교에 원서를 냈고, 붙었다.

하지만 더이상 또래 아이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그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기싸움을 하며 자기와 친하게 어울릴 아이들을 정할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는 당연히 그 기싸움을 이겨내지 못했고, 친구 역시 좋지 못한 기억으로 떠났다. 왜 새로 만난 친구들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지, 내 앞에선 헐뜯던 친구와 왜 단짝처럼 지내는지, 왜 나와 친해지면 '너 쟤랑 친해?'라며 친해진 아이를 자신과 떼놓는 아이가 있는지, 그리고 나를 왜 싫어하는지도 몰라 아이는 내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몇몇 아이들이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니는건 알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전혀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주변을 걱정시킬 용기마저 없었던 아이는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꾸역꾸역 3년을 혼자 보냈다. 그 때 버티기를 포기했으면 좀 더 나았을까?

3년을 혼자 보내면서, 그 부족한 사회성을 키울 기회는 없었다. 졸업 후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잡던 아이는 그렇게 몇몇 친구들을 더 떠나보냈다.

대학 때 술버릇은 울면서 상대가 누구든 사과하는거였다. 나는 술만 취하면 나와 같이 술을 마시는 이 사람도 곧 나를 싫어할까봐 나는 두려움에 차서 펑펑 울며 사과할 거리를 만들어내서라도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나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가 정상으로 돌아올 기회를 주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거다. 그들이 그럴 의무는 없으니까. 그들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내가 싫다면 보지 않으면 되는거다. 그게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니까.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정상인을 연기한다. 완벽하진 않다. 연기하면서도 내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그리고 어쩌면 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그저 변명일뿐인 '이상한 사람'이니까.

사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당시 나를 그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만든 친구한테 연락이 왔었다. 좋은 친구가 아니었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 사과에 고맙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내가 이상해서 혼자였던게 아니었나? 나는 혼란스러웠고 그 사과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다만 나는 그 3년이 끔찍히 싫었고, 그 때 생각이 나는건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의 연락에 이도저도 아닌 대답을 했다. 다행히 친구는 눈치가 빨랐다.

나는 이제 완벽히 이상한 사람이다. 언제나 눈 앞에 있는 사람이 호의를 표해도 속으로 이 사람이 사실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만약 나의 행동에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보이면 어쩔 줄 모른다. 그 상대가 누가 되었든, 심지어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자기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내비친 날에는 밤새도록 걱정하고, 매순간 나의 행동을 질책한다.

이러한 행동이 나에게 굴레가 되고, 낮아진 자존감은 다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아마 이 굴레는 영원할 것이고, 내 인생에 해피엔딩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