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공장, 지브리 뮤지엄과 아키하바라

Nitro201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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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여행을 떠나면 항상 시간이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비싼 돈 들여가며 없는 시간 짜내서 온 여행이니 뭐라도 하나 더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에 쫓기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여행 횟수가 늘면서 점점 그런 거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나에게는 특별한 여행의 하루인 이 날이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하루이기 때문에 나 혼자 애태우며 급하게 굴어봤자 별 소용 없다는 걸 깨달아서일 겁니다. 


아무리 새벽부터 일어나 구경하고 싶어도 주요 관광지나 쇼핑몰의 개장시장은 정해져 있고, 빨리 기념품을 사고 싶어도 (특히 일본에서는) 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며, 다양한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해서 모든 음식점이 시식용 종합 메뉴를 판매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아침 일찍 절로 떠지는 눈은 어쩔 수 없다쳐도, 괜히 조바심을 내기 보다는 여유롭게 산책을 하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끽합니다. 


그래봤자 바로 옆나라 일본인지라 크게 다른 점은 별로 안 보이긴 하지만요. 

깨끗한 거리와 일본어 간판, 그리고 좌측통행하는 자동차들 정도가 다른 점입니다. 

듣기로는 우측통행하는 나라들이 더 많아서 원래 좌측으로 운전하던 국가들도 사고의 위험성 때문에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는데, 영국이나 일본같은 섬나라 국가들은 별로 외국과 연결된 도로가 없는지라 그냥 좌측통행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키치죠지 지하철역에서 내려 슬슬 걷다보면 이노카시라온지 공원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무도 많고, 분수가 물을 뿜는 커다란 호수도 있고, 곳곳에 일본식 정원 느낌이 나는 조경이 있어서 아직 도시가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햇빛을 받으며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요즘에는 우리나라도 조그만 공원이 여기저기 들어서고는 있지만, 그래도 도쿄의 도심 공원들은 다 그 역사가 길어서인지 규모도 크고 나무도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부러운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2차대전 당시 폭격 당하면서 공원의 나무들도 싹 쓸려나갔을텐데도 이렇게 나무들이 커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다른 곳에서 커다란 나무를 옮겨심었기 때문일지, 아니면 급속한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제대로 된 공원문화가 없는 서울에서 자란 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원을 걷다 보면 발견하게 되는 지브리 뮤지엄 안내판. 

300미터만 더 가면 도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점찍어 놨던 지브리 스튜디오에 도착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런데 표지판 위에서 씨익 웃고 있는 건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처음엔 당연히 지브리의 마스코트인 토토로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토토로는 아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보우네즈미 같기도 하고...


 

드디어 도착한 지브리 뮤지엄. 

어릴 적부터 거의 모든 지브리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섭렵해 온 탓에 흔히 하는 말로 "드디어 성지에 도착했다!"는 느낌입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붉은 돼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추억은 방울방울, 귀를 기울이면과 같은 작품들이 소년기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모노노케 히메의 극장 상영 이후로 우리 나라에서도 유명해진 지브리의 작품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고양이의 보은 같은 비교적 최근 작품들은 무뎌진 동심을 다시 살려내는 역할을 했으니까요.


 

매표소 안에는 토토로가 표를 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장식이고, 실제로는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거나 일본 내의 편의점인 '로손'에서 예매를 해야 합니다. 

현장에서도 표를 팔기는 하는데 매진 될 확률이 높아서 미리 예매를 해 놓는 것이 좋은 듯.


 

안타깝게도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된지라 건물 안에서 찍은 사진이 없네요. 

뮤지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단순한 테마파크나 컨셉아트 갤러리가 아니라 그 두가지가 적절히 혼합된 학습형 놀이공원의 느낌입니다. 

이를테면 과학체험관과 비슷한 느낌? 물론 주제는 과학이 아니라 지브리 애니메이션이지만요. 


애니메이션의 제작 원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나 여러가지 작품의 원화는 물론이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소극장도 있습니다. 

실물 크기의 고양이 버스 모형도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 놀 수도 있는데, 문제는 어린이만 입장 가능.  

동심을 되찾으라면서 왜 어른은 차별하는건데! 라는 절규가 절로 흘러나옵니다. 


정규 전시물이 아니라도 뮤지엄 곳곳에 그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소품들이 가득합니다. 화분에 놓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유바바 온천장 모형이라거나, 비행접시 모양의 급수대, 화장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까지 말이죠.


 

옥상 정원에 위치한 로봇 모형의 앞이 그나마 포토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등장하는 로봇인데, 정식 명칭은 없습니다. 팔에 돌기가 나와있는 걸 보니 전투형 로봇이네요. 

이름이 없다보니 그냥 '거신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막상 거신병은 바람계곡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최종병기이고 여기 서 있는 로봇과는 겉보기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사실 지브리 뮤지엄이 유명하기는 해도 막상 다녀온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꽤나 크게 갈리는데 

천공의 성 라퓨타와 바람계곡 나우시카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브리 뮤지엄은 그야말로 천국, 이게 무슨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 싶은 사람이면 지브리 뮤지엄은 그냥 애들이 좋아할만한 놀이터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안그래도 오타쿠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데 그 중에도 오타쿠 문화의 대표격인 애니메이션, 그 중에도 애니메이션의 대표격인 지브리 스튜디오의 박물관이다보니 곳곳에 '아는 사람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나오는 길에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게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돌아봤을 때 "고양이 인형을 창문에 세워놨네"라고 생각하는 것과 "고양이의 보은에 등장하는 고양이 요원들이다! 여기 어딘가에 하루와 바론이 있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몇 번 더 가보고 싶네요. 한 달에 한 번씩 소극장의 상영작이 바뀌는데 총 8개의 작품을 돌아가며 상영한다니 일곱 번만 더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브리 뮤지엄을 나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아키하바라. 


사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초기 극장판 이후로는 카우보이 비밥 정도 본 게 전부이고, 게임도 일본 게임보다는 미국 게임을 주로 했던지라 아키하바라에 오면서도 특별히 살 것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일본 게임, 애니메이션의 총본산 같은 곳이니 뭔가 재미있는 건 없을까 싶어서 나름 기대를 갖고 돌아봅니다.


 

건물 한 층을 전부 채우고 있는 건담 모형을 보고 있으면 절로 뭔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 주고 산 건담이라고는 꼬꼬마때 구입한 SD건담 모형이 전부인데다 아는 거라고는 붉은 색 페인트 칠을 하면 세 배 빨라진다는 것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그 놈이 그 놈 같아보이는 모형들이 알고 보면 다 다른 모형이고 나름대로의 설정과 뒷 이야기를 갖고 있고 그 미세한 차이에 아낌없이 큰 돈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되니까요. 

뭐랄까,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거대한 세계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생각해보면 이런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그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여가 산업이 발달하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예전같았으면 그걸로 밥 벌어먹고 살던 전문가들이나 알 수 있었을 법한 영역도 이제는 어지간한 동호인들에게까지 열려있는 상황. 

자전거 타는 사람은 우주선 소재로 만든 자전거를 들고, 오디오 기기 동호회에는 어지간한 자동차 값은 훌쩍 뛰어넘는 스피커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하며, 모형 총기로 무기고를 차린 밀리터리 매니아들도 가득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자신이 좋아하는 영역에 깊은 우물을 파는 까닭에 같은 우물 파는 사람이 아니면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라는 말도 나온 거겠지만요.


 

음... 하지만 아키하바라를 돌아다니다 보면 뭐랄까... 존중은 하지만 공감은 힘든 물건들도 많이 보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메이드 복장까지는 그렇다쳐도 똑같은 옷이 피규어 의상으로도 나와있는 걸 보면, 그것도 스케일별로 다 있는 걸 보면 

차라리 살색 가득한 성인용 영상물 판매점이 상대적으로 더 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부터 "종년 간통은 누운 소 타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다 1960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개봉된 영화 "하녀"만 보더라도 여성 가사도우미에 대한 인식이 섹스와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메이드의 원조인 영국 역시 추천서가 없으면 취직할 수 없는 점을 악용해서 메이드 강간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고 하니 하녀 복장이 섹스 판타지를 자극하는 데에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성인용품점이 아니라 완구 바로 옆에 대놓고 메이드복을 파는 건 일본이 단순히 성진국이어서일 뿐만 아니라 하녀라는 존재가 갖는 의의가 일본인 (남성)들에게는 더 크고 복잡하기 때문일 겁니다. 

과거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양을 따라하는 붐이 일었는데, 그 당시 상류층은 서양 문물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메이드를 고용하는 것을 유행으로 삼았으니 오늘날의 메이드복이 나름 상류층이 된 듯한 느낌을 주는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장님 비서' 페티쉬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게다가 "영국 집에서 프랑스 요리를 먹으며 일본 여자와 사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는 서양 속담처럼 순종적인 여성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일본 여성들은 남녀평등을 외치며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으니 과거의 고분고분하고 복종 잘하는 여성상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면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이라면 성인용품점의 가죽 채찍 옆에나 걸려 있을 하녀복이 일본에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고 (심지어는 도큐한즈 http://blog.naver.com/40075km/220912242791에서도 봤네요) 

아키하바라 골목에는 메이드 복장의 여자들이 자기네 '메이드 카페'로 오라며 광고지를 돌리는 장면도 흔하게 보입니다. 


이런 걸 보면 가깝지만 먼 나라라는 말이 실감난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