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현재 고3입니다 스카이는 아니지만 지방 국립대 최종 합격, 인서울 1차 합격 뜬 상태구요 지금은 면접 준비겸 외국어 공부 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들 의아해 하실 겁니다. 벌써 대학교 최종이 뜨냐. 왜냐면 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6월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을 간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적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에요. 모의고사 풀어보면 언수외 243 나오구요 한국사 1 사탐 한지 세지로 간간히 3찍고 대개 2정도 뜨거든요.
사실 행운인 편에 속하죠. 저 등급에 제가 노리는 과의 인서울 대학은 꿈도 못 꿉니다. 어찌보면 외국인인 부모 운을 잘 타고 태어나 인생 핀 케이스 아닐까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미워요. 미워하다 못해 증오해요. 차라리 남들과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엄마와 이 정도 관계까지는 오지 않았을거에요.
제겐 3살 어린, 즉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대입을 준비하는 제게 고입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동생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또 마음이 든든해지고 자랑스러워져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닌지라 봐줄 과목이 역사나 국어같은 학교 수업 중심의 과목밖에 없고요. 누나로써 많이 미안한 실정이에요.
근데, 가끔씩 이 동생이 미치도록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엄마 때문인데요. 엄마는 첫째인 제게 많은 관심을 쏟지 못했다 생각하시는지 동생에 대한 교육열이 장난아니세요.
우선 처음, 전 중학생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학교 생활 부적응으로 왕따며 따돌림을 당했던 제게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이 사실은 저희 엄마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때 엄마는 제게 큰 기대를 걸지 않으셨어요. 기말고사 때 성적 조금 올랐다. 이러면 잘했다 칭찬 한번 해주고 넘어가셨어요. 호들갑 일체 떨지 않으시고 칭찬 한마디로 끝났죠. 이 때, 전 별로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더 좋은 점수를 못 받아은 탓이려니 넘어갔습니다.
근데 저와 똑같은 나이의 남동생에게는 칭찬을 서슴없이 해주세요. 점수가 아닌 일개 봉사를 간다는 말에도 장하다, 커서 큰 사람이 되겠다, 대학 잘 가겠네, 이런 류의 절 겨냥한 말들이 쏟아져요. 심지어 제 중학교때의 내신이 동생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눈 가리고 아웅하며 동생을 추켜세우기 바빠요. 자식을 처음 키워 아무것도 모르셨던 첫째 시절과 달리 둘째 시절은 절 통해 무엇을 많이 들으셨는지.. 얼마전, 동생 기말고사 가채점 평균 80
넘겼을 땐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공부법까지 알려주시며 칭찬해줬어요
엄마, 저 그 때 수시 인서울 1차 합격날이었어요. 스카이는 아니나
인서울 1차 합격에 기뻐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근데 엄마는 동생 고입에만 신경쓰시고 제 대입에는 아무런 말씀 안하셨어요. 오직 어, 잘했다. 더 열심해. 같은 반응이었고 제 대학 이름을 들으신 아버지께서 잘했네, 이야 성공했네. 라는 말씀을 하자 되려 엄마는 제게 너 그거 뻥이지? 거짓말이지? 다 알아. 라고 하셨어요. 나중이 되서야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기는 했는데.. 엎드려 절받기라 하나요. 쓰린 속 붙잡고 지나갔어요.
두 번째는 동생이 봉사 관련으로 장학금을 타왔을 때 일어났어요. 학교에서 특정한 시간 이상 봉사 이수를 하면 장학금 같은걸 주는 모양이에요. 요새 봉사다 뭐다 바쁘게 살더니만 그걸 뚝딱 타왔네요. 저도 기뻐서 저녁밥 먹을 때 괜시리 축하한다, 수고했네와 같은 말을 했어요. 기분 좋은 식사였죠.
하지만 엄마가 다 망쳐버렸어요. 다 먹고 과일 먹을 때, 엄마가 동생한테 누나가 못 타온 장학금 니가 타오네 라고 말했거든요. 순간 빈정이 확 상한 저는 엄마한테 무심코 심한 말을 해버렸어요.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고, 하다 못해 내 대입보다 동생 고입 신경쓰는거 아니냐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죠.
제가 잘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학비며 생활비 다 부모님이 벌어다 주시는걸로 쓰는데 이런 짓을 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죠. 근데, 왜 그 때 제 속은 후련했을까요. 아무 말 없이 짭짭거리며 과일 먹던 동생이 왜 그리도 얄미워 보였을까요. 울며 방문을 쾅 닫았어요. 정말 서러워서 엉엉 울었어요.
근데 엄마는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요. 니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울어, 내가 언제 니 공부를 신경 안 써줬는데 이러시면서 방문을 홱 열고 절 내려다 보시는데 그 모습이 더 서운했어요. 소리 내어 목 놓고 울자 엄마는 질 세라 더 큰 목소리로 제게 외치더군요.
"내가 너 중국으로 유학까지 보내줬잖아! 뭘 더 바래!"
이러고 문을 쾅 닫았네요.
네, 그 망할놈의 유학 다녀왔습니다. 11살에 8살짜리 동생 데리고 부모없이 단 둘이 외갓댁 가서 일년간 공부했습니다. 엄마는 모르시겠죠. 제게 그 1년은 최악의 1년이었습니다.
외갓댁은 남아선호사상이 강해서 여자인 제게 비교적 관심이 덜했어요. 비교적, 이 말을 쓰는 것도 웃기네요. 아예 없었어요.
그게 어느정도였냐,
설날 같은 큰 명절 때 외갓집은 중국 풍습대로 만두를 지었습니다. 다양한 고기반찬 등 평소에 먹지 못할 화려한 음식들이 즐비했죠. 저도 들떴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타지의 명절에 떨려하며 저녁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막상 저녁 식탁에 앉자 여자인 저는 실망했습니다. 제게 고기반찬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요. 왜 제게 그 자리에 앉으라 했는지, 남자인 동생을 왜 그 자리에 앉혔는지 알 것 같았죠. 맛있는 반찬을 먹으려 손을 멀리 해도 외할아버지는 아는 척도 안 하며 동생에게 고기를 밀어주기 바빴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친척들 사이, 제대로 발음 할줄도 모르는 중국어로 소통해보았자 외가 친척들은 이해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이해했습니다. 전 여자고 동생은 남자였으니까요.
근데, 전 식구가 아닌 누나였나봅니다. 명절 몇 주 전 동생이 크게 아팠습니다. 뭐에 먹다 체했는지 열까지 오르며 끙끙 앓더라고요. 하필, 온 가족들이 장을 보러 외출했을 참이라 전 해 줄게 없었습니다. 막 중국에 도착해, 그 나라 말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 했던 저는 발만 동동 구르며 동생을 간호했죠. 키가 닿지 않는 세면대에 발 끝을 올려가며 수건을 적셨고 나름 최선을 다하여 동생을 보살폈어요. 그렇게 오매불망 현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는데.
제게 돌아온 건 따끔한 혼이었어요. 알아 듣지도 못할 말로 그렇게 혼을 내는데 점차 한자가 익숙해져 갈때 쯤, 이 때 들었던 말을 곰씹어보니 누나가 되어 동생을 이렇게 버려뒀냐. 같은 말들 뿐이더라고요. 제 나이 12살이던 해였습니다.
다행히 8개월 뒤, 엄마가 중국에 오셨어요. 진짜 줫같게도 엄마가 오니 외할아버지가 제게 했던 대우들 싹 다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동생만 데리고 시장을 갔는데 엄마가 오니 저도 데리고 시장에 가더라고요. 비록 전 할아버지 손이 아닌 동생 손을 잡았지만요.
저 역시 엄마가 온게 기뻤어요. 무엇보다 제가 겪은 이 서러움들 엄마한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어요. 하지만, 제 말 믿어주지 않으시더군요. 여태껏 겪어왔던 설움들, 세면대에 동생 팬티 빨아가며 겪었던 그 수모들을 거짓말이라고 농담이라고 치부하시더군요.
그런 뒤에는 또 다시 절 내버려 둔채 엄마는 집을 나갔어요. 알아요.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들, 중학교 동창들, 직장 동료들 반가우시겠죠. 먼 한국까지 온 탓에 잘 보지 못했던 사람들 보느라 엄마도 기쁘셨을거에요. 이해해요. 제가 엄마를 그리워한 것처럼 엄마 또한 엄마 친구분들을 그리워하셨을테니까요.
엄마, 근데 그렇게 매몰차게 나갔어야 했나요. 일주일에 여섯번을 집에 혼자 머물러 있었어요. 난 8개월동안 엄마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는데 엄마는 친구를 더 보고싶어 했나봐요. 난 오직 엄마 뿐이었는데, 엄마 하나만 보고 8개월을 버텼는데. 엄만 그게 아니었나봐요.
나 아직도 기억나요. 엄마 다리 붙잡고 가지말라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을 때, 엄마는 기어코 현관문을 열었었죠. 눈물 뚝뚝 흘리며 창문으로 엄마랑 엄마 친구들 보는데 친구 분중에 한 분이 절 가리키더라고요. 난 다행이구나 싶었어요. 날 데려가나 생각했어요.
엄마는 기어코 눈길 한 번 안줬네요. 기어코. 그 눈길 한번 주지 않았네요.
그 뒷 모습 아직도 기억해요. 바보같지만 지금도 눈 감으면 서련히 떠올라요. 노란색 코트, 검은색 부츠. 동생만큼 얄미웠는데.
어쩌면 엄마 미워하고 증오하는거 이 유학 때문일지도 몰라요. 아니, 이 유학때문에 받았던 상처랑 아픔들 엄마한테 치유받으려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 그러면 안되는거 알아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일테고, 한국이 처음일테고, 아빠가 처음일테고, 내가 처음일테니까요. 내가 매 순간 순간을 처음 겪는 만큼, 엄마 역시 엄마로써의 시간을 처음 걸어가는 것일 테니까요. 서투른거 당연하다 생각해요. 암요, 서툴러야 하는게 맞는걸요.
그래서일까요. 엄마, 핏덩이로 태어난 날 안았을 엄마의 기분은 모르겠지만 난 엄마가 내 엄마라 다행이라 생각해요. 날 낙태시키지 않고, 버리지 않고 거둬 키워준 우리 엄마라 난 고맙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참 밉네요. 굳이 날 여자로 낳았어야 했는지. 왜 여자로 태어나게 만들어 고작 이만큼의 사랑을 안겨주시는지. 엄마는 왜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인지.
정말 죄송해요. 여러분 넋두리가 길었네요. 우유부단한 저는 이 글을 쓰고도 이 놈의 집구석을 벗어나지 못할거에요. 이 집은 지옥이 되어 평생 나를 옭아매겠죠. 괜찮아요, 누나로써. 딸로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엄마를 지키면 언젠가 엄마는 날 바라봐주시겠죠. 노란색 코트를 입고도, 검은색 부츠를 신고도 내 손을 잡아주시는 날이 언젠가 생길거라 믿어요.
엄마가 있는 이 집을 나가고 싶습니다
방탈 우선 죄송해요.. 한 사람이라도 많이 봤으면 해서.
전 현재 고3입니다 스카이는 아니지만 지방 국립대 최종 합격, 인서울 1차 합격 뜬 상태구요 지금은 면접 준비겸 외국어 공부 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들 의아해 하실 겁니다. 벌써 대학교 최종이 뜨냐. 왜냐면 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6월 특별전형을 통해 대학을 간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성적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에요. 모의고사 풀어보면 언수외 243 나오구요 한국사 1 사탐 한지 세지로 간간히 3찍고 대개 2정도 뜨거든요.
사실 행운인 편에 속하죠. 저 등급에 제가 노리는 과의 인서울 대학은 꿈도 못 꿉니다. 어찌보면 외국인인 부모 운을 잘 타고 태어나 인생 핀 케이스 아닐까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제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미워요. 미워하다 못해 증오해요. 차라리 남들과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엄마와 이 정도 관계까지는 오지 않았을거에요.
제겐 3살 어린, 즉 내년에 고등학교 들어가는 남동생이 있습니다. 대입을 준비하는 제게 고입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동생 스스로 책임감을 느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또 마음이 든든해지고 자랑스러워져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닌지라 봐줄 과목이 역사나 국어같은 학교 수업 중심의 과목밖에 없고요. 누나로써 많이 미안한 실정이에요.
근데, 가끔씩 이 동생이 미치도록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엄마 때문인데요. 엄마는 첫째인 제게 많은 관심을 쏟지 못했다 생각하시는지 동생에 대한 교육열이 장난아니세요.
우선 처음, 전 중학생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학교 생활 부적응으로 왕따며 따돌림을 당했던 제게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이 사실은 저희 엄마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때 엄마는 제게 큰 기대를 걸지 않으셨어요. 기말고사 때 성적 조금 올랐다. 이러면 잘했다 칭찬 한번 해주고 넘어가셨어요. 호들갑 일체 떨지 않으시고 칭찬 한마디로 끝났죠. 이 때, 전 별로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더 좋은 점수를 못 받아은 탓이려니 넘어갔습니다.
근데 저와 똑같은 나이의 남동생에게는 칭찬을 서슴없이 해주세요. 점수가 아닌 일개 봉사를 간다는 말에도 장하다, 커서 큰 사람이 되겠다, 대학 잘 가겠네, 이런 류의 절 겨냥한 말들이 쏟아져요. 심지어 제 중학교때의 내신이 동생보다 높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눈 가리고 아웅하며 동생을 추켜세우기 바빠요. 자식을 처음 키워 아무것도 모르셨던 첫째 시절과 달리 둘째 시절은 절 통해 무엇을 많이 들으셨는지.. 얼마전, 동생 기말고사 가채점 평균 80
넘겼을 땐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공부법까지 알려주시며 칭찬해줬어요
엄마, 저 그 때 수시 인서울 1차 합격날이었어요. 스카이는 아니나
인서울 1차 합격에 기뻐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근데 엄마는 동생 고입에만 신경쓰시고 제 대입에는 아무런 말씀 안하셨어요. 오직 어, 잘했다. 더 열심해. 같은 반응이었고 제 대학 이름을 들으신 아버지께서 잘했네, 이야 성공했네. 라는 말씀을 하자 되려 엄마는 제게 너 그거 뻥이지? 거짓말이지? 다 알아. 라고 하셨어요. 나중이 되서야 잘했다라는 칭찬을 받기는 했는데.. 엎드려 절받기라 하나요. 쓰린 속 붙잡고 지나갔어요.
두 번째는 동생이 봉사 관련으로 장학금을 타왔을 때 일어났어요. 학교에서 특정한 시간 이상 봉사 이수를 하면 장학금 같은걸 주는 모양이에요. 요새 봉사다 뭐다 바쁘게 살더니만 그걸 뚝딱 타왔네요. 저도 기뻐서 저녁밥 먹을 때 괜시리 축하한다, 수고했네와 같은 말을 했어요. 기분 좋은 식사였죠.
하지만 엄마가 다 망쳐버렸어요. 다 먹고 과일 먹을 때, 엄마가 동생한테 누나가 못 타온 장학금 니가 타오네 라고 말했거든요. 순간 빈정이 확 상한 저는 엄마한테 무심코 심한 말을 해버렸어요.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냐고, 하다 못해 내 대입보다 동생 고입 신경쓰는거 아니냐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죠.
제가 잘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학비며 생활비 다 부모님이 벌어다 주시는걸로 쓰는데 이런 짓을 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죠. 근데, 왜 그 때 제 속은 후련했을까요. 아무 말 없이 짭짭거리며 과일 먹던 동생이 왜 그리도 얄미워 보였을까요. 울며 방문을 쾅 닫았어요. 정말 서러워서 엉엉 울었어요.
근데 엄마는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요. 니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울어, 내가 언제 니 공부를 신경 안 써줬는데 이러시면서 방문을 홱 열고 절 내려다 보시는데 그 모습이 더 서운했어요. 소리 내어 목 놓고 울자 엄마는 질 세라 더 큰 목소리로 제게 외치더군요.
"내가 너 중국으로 유학까지 보내줬잖아! 뭘 더 바래!"
이러고 문을 쾅 닫았네요.
네, 그 망할놈의 유학 다녀왔습니다. 11살에 8살짜리 동생 데리고 부모없이 단 둘이 외갓댁 가서 일년간 공부했습니다. 엄마는 모르시겠죠. 제게 그 1년은 최악의 1년이었습니다.
외갓댁은 남아선호사상이 강해서 여자인 제게 비교적 관심이 덜했어요. 비교적, 이 말을 쓰는 것도 웃기네요. 아예 없었어요.
그게 어느정도였냐,
설날 같은 큰 명절 때 외갓집은 중국 풍습대로 만두를 지었습니다. 다양한 고기반찬 등 평소에 먹지 못할 화려한 음식들이 즐비했죠. 저도 들떴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타지의 명절에 떨려하며 저녁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막상 저녁 식탁에 앉자 여자인 저는 실망했습니다. 제게 고기반찬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요. 왜 제게 그 자리에 앉으라 했는지, 남자인 동생을 왜 그 자리에 앉혔는지 알 것 같았죠. 맛있는 반찬을 먹으려 손을 멀리 해도 외할아버지는 아는 척도 안 하며 동생에게 고기를 밀어주기 바빴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친척들 사이, 제대로 발음 할줄도 모르는 중국어로 소통해보았자 외가 친척들은 이해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이해했습니다. 전 여자고 동생은 남자였으니까요.
근데, 전 식구가 아닌 누나였나봅니다. 명절 몇 주 전 동생이 크게 아팠습니다. 뭐에 먹다 체했는지 열까지 오르며 끙끙 앓더라고요. 하필, 온 가족들이 장을 보러 외출했을 참이라 전 해 줄게 없었습니다. 막 중국에 도착해, 그 나라 말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 했던 저는 발만 동동 구르며 동생을 간호했죠. 키가 닿지 않는 세면대에 발 끝을 올려가며 수건을 적셨고 나름 최선을 다하여 동생을 보살폈어요. 그렇게 오매불망 현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는데.
제게 돌아온 건 따끔한 혼이었어요. 알아 듣지도 못할 말로 그렇게 혼을 내는데 점차 한자가 익숙해져 갈때 쯤, 이 때 들었던 말을 곰씹어보니 누나가 되어 동생을 이렇게 버려뒀냐. 같은 말들 뿐이더라고요. 제 나이 12살이던 해였습니다.
다행히 8개월 뒤, 엄마가 중국에 오셨어요. 진짜 줫같게도 엄마가 오니 외할아버지가 제게 했던 대우들 싹 다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동생만 데리고 시장을 갔는데 엄마가 오니 저도 데리고 시장에 가더라고요. 비록 전 할아버지 손이 아닌 동생 손을 잡았지만요.
저 역시 엄마가 온게 기뻤어요. 무엇보다 제가 겪은 이 서러움들 엄마한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어요. 하지만, 제 말 믿어주지 않으시더군요. 여태껏 겪어왔던 설움들, 세면대에 동생 팬티 빨아가며 겪었던 그 수모들을 거짓말이라고 농담이라고 치부하시더군요.
그런 뒤에는 또 다시 절 내버려 둔채 엄마는 집을 나갔어요. 알아요.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 동창들, 중학교 동창들, 직장 동료들 반가우시겠죠. 먼 한국까지 온 탓에 잘 보지 못했던 사람들 보느라 엄마도 기쁘셨을거에요. 이해해요. 제가 엄마를 그리워한 것처럼 엄마 또한 엄마 친구분들을 그리워하셨을테니까요.
엄마, 근데 그렇게 매몰차게 나갔어야 했나요. 일주일에 여섯번을 집에 혼자 머물러 있었어요. 난 8개월동안 엄마가 미치도록 보고싶었는데 엄마는 친구를 더 보고싶어 했나봐요. 난 오직 엄마 뿐이었는데, 엄마 하나만 보고 8개월을 버텼는데. 엄만 그게 아니었나봐요.
나 아직도 기억나요. 엄마 다리 붙잡고 가지말라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을 때, 엄마는 기어코 현관문을 열었었죠. 눈물 뚝뚝 흘리며 창문으로 엄마랑 엄마 친구들 보는데 친구 분중에 한 분이 절 가리키더라고요. 난 다행이구나 싶었어요. 날 데려가나 생각했어요.
엄마는 기어코 눈길 한 번 안줬네요. 기어코. 그 눈길 한번 주지 않았네요.
그 뒷 모습 아직도 기억해요. 바보같지만 지금도 눈 감으면 서련히 떠올라요. 노란색 코트, 검은색 부츠. 동생만큼 얄미웠는데.
어쩌면 엄마 미워하고 증오하는거 이 유학 때문일지도 몰라요. 아니, 이 유학때문에 받았던 상처랑 아픔들 엄마한테 치유받으려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 그러면 안되는거 알아요. 엄마도 엄마가 처음일테고, 한국이 처음일테고, 아빠가 처음일테고, 내가 처음일테니까요. 내가 매 순간 순간을 처음 겪는 만큼, 엄마 역시 엄마로써의 시간을 처음 걸어가는 것일 테니까요. 서투른거 당연하다 생각해요. 암요, 서툴러야 하는게 맞는걸요.
그래서일까요. 엄마, 핏덩이로 태어난 날 안았을 엄마의 기분은 모르겠지만 난 엄마가 내 엄마라 다행이라 생각해요. 날 낙태시키지 않고, 버리지 않고 거둬 키워준 우리 엄마라 난 고맙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거랑은 별개로 참 밉네요. 굳이 날 여자로 낳았어야 했는지. 왜 여자로 태어나게 만들어 고작 이만큼의 사랑을 안겨주시는지. 엄마는 왜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인지.
정말 죄송해요. 여러분 넋두리가 길었네요. 우유부단한 저는 이 글을 쓰고도 이 놈의 집구석을 벗어나지 못할거에요. 이 집은 지옥이 되어 평생 나를 옭아매겠죠. 괜찮아요, 누나로써. 딸로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엄마를 지키면 언젠가 엄마는 날 바라봐주시겠죠. 노란색 코트를 입고도, 검은색 부츠를 신고도 내 손을 잡아주시는 날이 언젠가 생길거라 믿어요.
고마워요. 들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