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아이는 아픈 어른이 된다

쯧쯧201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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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동료에게 말했다
“딸 거는 뺏고 싶은데 아들한테는 주고 싶다고. 그래서 딸이 서운하다고 전에 그랬는데도 본인은 아들에게 다 주고 싶다고. 그게 엄마 마음이라고. “
물건 계산을 하려 기다리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버림을 느꼈다. 그 아주머니에게서 내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젊어서 시집오신 어머니는 어린 나에게 항상 그랬다. 너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거라고. 너만 없었어도 이런 집구석 버리고 나가 산다고.
어린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사라져 버릴까 걱정되어 더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였고, 점점 더 소심해졌다. 그것 역시 이 사람의 눈에는 미워보였으리라.

첫째가 딸로 태어나서 시댁의 구박을 엄청 받았다며. 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안살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3살 차이 나는 동생이 남자로 태어나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때 내 나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는 미술이 참 배우고 싶었다. 동생이 태권도 학원에 다니듯이, 나 역시 조르면 미술학원에 보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항상 나에게만 돈이 없다 말하던 엄마가, 학원에 가자며 손을 잡고 밖을 나왔을 때 굉장히 기대하고 기뻤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피아노학원. 당시 내가 살던 집은 방 두칸짜리 아궁이가 부엌이라고 있던 주택의 세들어 사는 곳이었고.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씻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엌에서 찬물로 씻는 수밖에. 그러한 상황이니 당연히 우리집은 피아노를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때 아버지는 경상도 지역의 대기업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정말 싫었다. 너네 집엔 피아노 없지? 라며 무시하는 원장선생님의 말도 싫었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혼자 한시간 연습해라 하는 것도 싫었고. 결국 내가 학원을 가지 않으면서 피아노 학원을 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것만을 교묘하게 잘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다시는 비싼 학원 보내달라 말하지 못하도록.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안 형편은 조금 나아졌다. 5층짜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서 살았고, 화장실이 내부에 있어서 씻는 것이 편해져서 좋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우리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으리라.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지역으로 이사와서 참 힘들었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 하여도 내 부모는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른으로서의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항상 나에게는 “니가 알아서 해” 그 말만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나는 더이상 부모에게 내 생각을 말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안좋은 소리를 들어도 그냥 흘려 듣고 상처를 줘도 상처받지 않고 퉁명스러워지는 법을 배웠다.
그런 내 모습이 쿨해보였는지 나를 동경하는 친구들이 생겨났고, 그나마 친한 친구들 덕분에 나는 죽을 생각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집을 놀러가면 티비에서만 보던 행복한 가족이 있어서 따뜻함을 대리만족했던 나날들이었다. 물론 집으로 돌아오면 내 현실을 깨닫고. 나는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 까. 다 내 탓이다 생각했지만 말이다.

중학교 때였나. 애지중지하던 남동생이 공부를 참 못했다. 그러자 엄마는 남동생에게
“ 누나를 보라고. 머리는 멍청한데 열심히 하니까 공부 잘 하지 않냐고. 너는 머리는 좋은데 왜 그러냐고.”
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머리가 멍청하구나. 깨달았다. 아 나는 멍청해서 남들보다 더 노력을 해야하는 거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입학 당시 내 성적은 전교 11등이었다. 과외한번 안받으면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멍청하다는 그 어머니의 말은 잊혀지지 않고 내 기억속에 반복되며, 살면서 나를 좌절시켰다. 취업, 이직에 실패할 때마다 내가 멍청해서 그렇다고 내가 나를 비난 했으니까.

고등학교 때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학원을 다니며 미대 준비를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이야기 하였다. 그때 부모님은 미대 나와서 어떻게 밥벌어먹고 살겠냐며 학원비를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하긴. 자랄 때마다 나에게만 돈 없어서 안된다는 말을 하셨으니. 후에 공부를 못하는 동생이 미술을 하고 싶다 하니 지원을 해주셨고, 중간에 요리쪽으로 나가고 싶다 하여 요리 학원에 지원을 해주셨다. 이덕에 동생은 양식, 한식, 칵테일 등 여러 가지 요리 자격증을 취득하고 2년재 전문대를 갔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시험때만 닥쳐서 공부하고.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뭘 하든 멍청한 나는 못할테니까. 학교 수업만 충실히 들었다. 그것말고는 내가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으니까. 당시에는 선생님에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업시간 만큼은 집중했었다. 그렇게 대충 공부해도 지방 국립대 정도는 장학금+ 용돈을 받고 들어갔다. 부모님은 교대를 가길 원하셨지만.. 내가 싫었다. 그 지긋지긋한 학교에서 평생 있으라니. 감옥에 있는 삶같다고 느껴졌다. 아니. 사실 부모가 원했기에 더 싫었으리라.
당시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도 합격하였으나, 돈이 없다는 부모의 말에 속아 집 근처 대학에 갔다. 그 당시는 학벌이라던지 그런 것에대한 조언을 해 줄 어른이 내게는 없었으니까. 다 니가 알아서해 라는 말을 하는 부모밖에 없었으니까.

학교 졸업식때마다 나에게는 꽃을 들고 찾아와 사진을 찍어주는 가족은 없었다. 반 전체가 책상위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담임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 내 책상만 덩그라니 비어있었고, 그걸 본 친구들은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나눠주었다. 친구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던 어린시절이었다.

내 부모는 학벌이 짧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중학교 혹은 초등학교까지가 끝이었으리라. 그래서 내 대학교 졸업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사진을 찍는 것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동생 졸업식만 가고 내 졸업식에 안 온 것에대한 복수로 난 내 대학교 졸업식을 가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여자를 잘 뽑지않는 직종이었다. 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어린 시절부터 불만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어머니에게 이쁨받고 자랐을텐데.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 일을 더 하고 싶어하였는지도 모른다. 가고 싶었던 곳은 대략 4년간 떨어졌으리라. 그 4년간 조그마한 업체에서 경력을 쌓고 이직하며 공부하는.. 참 치열하게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29살에 드디어 메이저 중 한 곳에 합격했다. 그 회사의 그 분야의 첫 여직원이었다.

이제 지역에서 돈을 잘 벌고, 직업이 든든해지니 부모라는 사람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과거 서울에서 취업과 이직과 공부로 힘들었던 내 20대에 나는 엄마에게 인연을 끊자는 말을 들었다. 공무원공부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것을 원한다고. 그때가 설이었나... 고모부는 내게 인생은 하얀 스케치북이 아니라고. 학벌도 안좋고 빽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포기하라 하였고, 엄마는 옆에서 그에 동조했다. 자괴감과 분노가 가득하여 가방을 들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현관문을 나섰다. 이때 엄마란 사람은 나에게 인연을 끊자 하였다. 지금 나가면 인연 끊는거라고. 난... 엄마가 나서서 나와 가족의 인연을 끊는 것이 싫었다. 끊더라도 내가 끊어야 한다 생각했다.
괜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시집이나 가라고. 고모가 20대였던 나에게 40대 돈많은 아저씨를 아는데 소개받으라고 할 때 조차, 엄마라는 사람은 웃으며 한번 만나봐라 라고 하였지.

그런 과거가 있었는데도 바보같이. 좋은 직장으로 부모가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좋았다. 우리딸이라고 처음으로 불리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입사 몇개월만에 명품 가방을 갖고 싶다던 엄마에게 수습기간이라 월급은 작지만 그걸 모아 구x 천 가방을 사주었다. 아웃렛에서 백만원 정도의 가방이었지만, 당시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서울에서 중소업체에 다닐 때 내 월급은 84만원, 이직 후 134만원 정도였으니까. 세네번의 이직 후에 드디어 원하던 곳에 취직했더라도.. 수습기간의 월급은 적었다. 하지만 명품가방을 받은 엄마의 반응은 이랬다. 천가방이라 별로란다. 그 후에 높아진 월급을 모아 나도 없던 명품가방을 샀다. 이번엔 루이비x 가죽가방으로. 그랬는데 엄마는 그 가방을 며칠동안이나 거실에 그대로 놔두었다. 왜 여기에 계속 두냐 했더니 아버지 보라고 그런 거라 하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무 크기가 크다고 싫다는 말도 들었지. 내가 사 준 가방보다, 동생이 나중에 돈벌면 더 좋은 가방 사주겠다는 말이 엄마는 더 좋으셨던 것 같다.

두 번째 인연을 끊자는 말을 들었던 것은 내가 부모님께 맡겨두었던 적금통장을 들고 왔던 때였던지, 아니면 어머니가 아는 분께 운전자 보험 드는 것을 거부했을 때였는 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오래되서. 이미 내 마음 속은 어머니라는 사람과 인연을 끊었기에. 그나마 가지 않던 집도 추석이나 설에도 근무 핑계를 대며 안가기 시작했고. 가봐야 일년에 한번 많으면 두번. 전화는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면 난 다시 힘들어졌으니까. 방치된 아이는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옛 생각에 아팠다.

“딸은 키워봤자 소용없어, 아들이 최고지. 딸은 시집가면 땡이야. 너는 니가 벌어서 시집가.”

어릴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었기에 그다지 상처도 되지 않았지. 이때문이었을까. 결혼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5분에 한번씩 싸우는 부모의 모습과, 시댁 혹은 남편에게 불만이 생길 때마다 내게 화풀이하던 당신의 모습으로 결혼이라는 것은 지옥생활이구나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버렸으니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네 집에서 결혼을 추진하며 멋대로 사주를 보고 왔을 때,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서 사랑을 줄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그댁에서 결혼을 반대한다며 말했을 때. 그때 내가 든 생각은 ‘와... 그 점쟁이 나랑 만난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점 잘보네.’ 였다.

결혼하고 싶으면 내가 살고 있지 않은 지역에 신혼집을 해 줄테니, 5천만원어치 혼수를 해오라며 상대방집안에서 통보했을 때. 상견례도 안했으면서 자기들 멋대로 결혼하라 했다 반대한다 했다 하는 집안이 좀 우스웠다. 그때 어쩌면 시누이가 될 뻔한 사람도 나를 싫어한다는 말에, 내가 결혼한다 말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생각했었지.

그때 결심했다. 빚을 지더라도 내 명의의 집을 사기로. 나중에 혹시나 결혼하게 되더라도 여태껏 내가 모은 재산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오래된 아파트긴 했지만 24평에 내가 원하던 뷰가 좋은 집으로. 계약하러 갈 때 따라왔던 엄마는 화를 내며 사지말라 하였고, 나중엔 눈물까지 흘렸지. 보태줄 수도 없는게 미안해서라던가. 그 눈물이 나는 악어의 눈물로 보였다. 살면서 부모가 나를 위해 도움을 주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난 그날 집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 업자에게 공사 날짜까지 잡았다. 집을 사거나 결혼을 할 때, 부모님이 도와줄거란 생각은 전혀 안했었으니까. 부모님 말대로. 나는 알아서 잘 하니까 말이다. 뭐 내가 집사기 일년전쯔음에 동생이 결혼할 때 내 부모는 5천만원 정도 전세자금에 보태라며 동생에게 줬기에... 나에게 줄 돈은 없었겠지. 설사 있더라도 주려생각하지 않았겠지. 그 보다 더 몇년 전에 동생 명의로 지금은 할머니가 사시는 시골집을 사 준 것도... 그들에겐 아들이니까. 지금 있는 원룸건물도 나중에 아들한테 물려줄 거니까.
그들에게 나는 시집가면 땡인 딸이니까. 알아서 잘 하는 안아픈 아니, 신경 안쓰는 손가락이니까 말이야.

지금은 직장에서 근무 연차도 쌓이고. 내명의 집과 차도 있고. 연애도 잘 하고 있고. 여전히 결혼 생각은 없지만. 집에오면 나만 바라보는 고양이들도 있고. 아쉬울 게 없는 인생이야. 내 부모는 동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들이라 내 집에 잘 오지 않아. 다행이야.

잘 지내다가 가끔은 울컥해. 내 어린 시절이 너무 불쌍해서. 과거로 돌아가 어린 나를 안아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좀 고생은 하겠지만 결국엔 행복해 질거라고. 너를 괴롭히는 우울증과 니 자존감을 갉아먹는 그들에게 지지말라고. 그렇게 의지가 되는 말, 따뜻한 말 한마디쯤 해 줄 수 있는 어른도 세상엔 존재한다고. 어린 니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방치된 아이는 아픈 어른으로 자라났다. 하지만 매일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또다른 나인 너도 말이야... 괜찮아 질거야. 행복해질거라구. 나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과 몇십권의 심리상담책. 그리고 친구들의 정으로 이겨냈어. 너도 행복해질거야. 내가 보장할게. 운이 없어서 좋은 가족을 만나지 못한 거 뿐이야. 그냥 인생의 출발선부터... 넘어져서 진흙이 무릎에 묻은 상태로 출발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털고 너의 인생을 살아줘. 마음 단단히 여미고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