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 우리가 이혼할 수 있을까

전쟁과사랑2018.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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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시작되자 제주도에는 어김없이 폭설이 내렸다.

딱 작년 이맘때도 그랬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금요일 퇴근길에 제주도로 떠났던 남편은
매서운 바람을 피해 뜨끈한 고기국수를 먹고 인천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방을 잡고는
꼼짝없이 숙소에 갇혀있게 생겼다고, 방에서 바다만 실컷 보고 가겠다고
아쉬운 푸념과 사진들을 늘어놓으며 다음엔 꼭 같이 오자 약속했다.   

 

짠하고 안타까웠던 그 여행이 사실은 상간녀와의 100일 여행이었음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3개월 후, 바로 작년 5월이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답답했을 때, 판에다 주절 주절 글을 썼었는데 (얼마되지 않아 삭제했지만)
이혼을 망설이고 있는 내게

 

바람도 중독이다,
한번도 안 피는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피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
아이를 방패막이 삼아 이혼을 망설이는건 비겁하다
등등의 따끔한 일침이 달린 것을 기억한다.

 

"이혼하는게 고민되요"라고 말하는 것 부터가 아이러니하게도
"당장은 이혼할 생각이 없으니 제발 내가 내린 판단이 옳다고 공감해줘요"라는 답정너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건..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보려는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첫번째고
혹시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이혼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느니
이 글의 링크를 보내는게 빠르지 않을까 싶어서가 두번째 이유다.

 

 

 

외도를 알게 된 날로부터 9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남편과 한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연을 판에서 읽었다면 이거 주작 아니냐고, 어떻게 같이 사냐고,

나 같으면 당장 이혼하겠다고 댓글을 달았겠지만

막상 내 일이 되고 나니 내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래 세상 사는게 다 내 뜻대로 안 되지.
아이가 어리다고 해서 내 맘대로 아빠와의 관계를 끊으면 안 되지.
죽이고 싶은 남편이지만 아이한테 좋은 아빠면 한번은 눈감아 줄 수 있어.

...

 

 

상간녀가 준 피해보상의 일부를 남편이 보태준 것도 알고 있고 
회식 중이라 했지만 택시를 타고 상간녀가 사는 동네에 갔었다는 것도 알고
아이가 구내염에 걸려 친정에 가있는 동안 모텔에 갔던 것도 안다.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상간녀 집에서 관계를 갖고 퇴근 후에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와주는..
힘이 남아도는 이 시대의 진정한 슈퍼대디...

 

 

계절 지난 옷을 정리하다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그 여자 얼굴이 큼직하게 박힌 포토티켓을 발견하게 된건

지극히 '우연'이었지만
"증거만이 살길이다"라며 미친년 처럼 컴퓨터 폴더 속에, 폴더 속에, 폴더까지 탐색해서

기어코 사진과 동영상을 찾아낸건 내 '노력'이었다.
그렇게 매달 충격적인 이벤트를 겪다보니 어느새 해가 바뀌어있었다.

 


작년 일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얽매이진 말자고 다시금 마음을 잡았지만
한달 전 남편 생일 0시가 되자마자 1등으로 축하메세지를 보낸 익숙한 카톡 프로필을 보니

또 한번 마음이 무너졌다.

 

작년 여름, 홧병에 시달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센터를 찾았을 때 원장은

내게 자살 방지 서약서를 쓸 것을 권유했다. 
'아내는 평생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 남편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상담 때 마다 말했지만
내가 눈물젖은 서약서를 쓰던 원장이 떠들던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나보다.


그래서인지 이번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정말 끝이라고, 이혼하자는 말이 나왔었다.
퇴근하자마자 끓여둔 미역국을 싱크대에 버리려고 하니 남편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며

'진짜.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이번에도 달라지는 모습이 안 보이면 그때 소송을 하든, 하고 싶은거 다 하라고

그럴 일 안 만들 자신 있다고 큰 소리를 뻥뻥친다.

 


개과천선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부부상담을 해보니 남편은 유년기부터 아주 문제가 많은 케이스였다)
이렇게 쓰레기 같은 인간이 소각되기 전에 재활용이라도 된다면

어쩌면 당분간은 조금 더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백업해둔 증거들이 든든하게 내 편이 되어줄 것임을 알기에

까짓것 또 한번 속는셈 치고 남편이 원하는 마지막 기회를 줘본다.

 

 

 

 

이혼하기 참 어렵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내 결정에 따른 책임감 역시 무겁다.

 

 

이혼을 결정할 때 '해야하는 일을 안 하는 사람'이면 참고 살아도
'안 해야하는 일을 하는 사람(예를 들면 외도 도박 폭력 등)'이라면 고민하랬는데....

 

때마침 오늘 상간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단다.
아무래도 본인한테 불리한 내용을 말하진 않을테니

남편 험담을 하거나 '나도 피해자에요' 코스프레를 하려나?
이번주 토요일, 정작 같이 사는 나는 모르는 남편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하러 갈거다.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시시한 얘기 일지, 뜻밖에 새로운 증거를 얻게 될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또 휘몰아칠까. 착잡한 마음에 주절주절 글을 남긴다.

 

 

 


아직 결말도 모르는 이 긴 글을 읽고
'그래서 이혼한다는거야 뭐야. 에휴 이런 호구가 다 있냐. 이렇게 사는 쓰니보단 내가 낫네' 하며 
누군가는 나의 불행을 딛고 위로를 얻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