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30살(20)

리드미온200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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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하...그러니까 우리가 그 김연실의 카드로 스키복을 산 거야?"

 

지선은 기가막힌 건지 우스운 건지 분가하기 어려운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런가봐...왜 그땐 그 카드 이름을 못봤는지...."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다만 스키복 외에 다른 것을 사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가지가지다. 선심쓰듯 준 카드도 그 녀석 거가 아니라는 거잖아."

 

"......"

 

모르겠다. 더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마 민준 걔는 그 카드 이름이 김연실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별 고민 안했을 거야. 네가 김미나의 본명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아마 그 때 물어봤어도 엄마 카드라고 하지 않았을까?"

 

일리 있는 얘기다. 민준은 내가 김미나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리라...

이제 나는 민준을 향한 마음은 접어야 하는 건가?

사랑의 실패자가 되는 건가?

 

"난 이혼 후에 가끔 들려오는 전남편 소식에 기분이 좋고 나쁘고 그렇던데...넌 큰 일이다. 평생 그 둘의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하잖아. 유명인과 연애의 단점이다..."

 

역시 지선은 미래지향적이다. 난 지금의 상태에 대해서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겨워하는데 나에게 더 힘든 미래까지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

 

"어차피 견디어야지...뭐....인생이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난 또 애써 초연하려 목소리를 기다듬고 대답했다.

 

"야. 그렇게 강한 척 안해도 돼. 내 앞에서는....살다 보니 잘키운 여자친구 하나 열 남편 안부럽더라..힘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아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민준에게서 직접 무슨 얘기라도 듣고 싶다.

날 사랑하지 않았다던가...정말 상상하기도 싫지만 김미나에게 매수 당했다거나...

제발....진실만 알려줘....

무엇이든 진실이기만 하면 달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안개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에게 실컷 얻어맞고 있는 기분은 정말이지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너네팀...이번에 리츠칼튼 홍보대행 프리젠테이션 들어간다면서? 그걸로 액땜했다고 생각해. 너 그거 잘 되면 내년에 승진을 따놓은 당상이다...나보다 먼저 승진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역시 지선이다. 안개속에서도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잡아 길이 보이는 곳에 데려다 준다.

나는 또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자리로 돌아와서 리츠칼튼 홍보 컨텝에 관한 회의를 다시 시작했다.

 

결국 리츠칼튼의 홍보 컨셉은 '왕자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확정짓게 되었다.

그렇게 반대하던 은수도 조목조목 데이터를 가지고 말하는 김대리에게 설득당했는지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막상 작업이 시작되자 은수는 열심이었다.

마치 마지막 유작을 만드는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애처로웠다.

인생은 늘 양면성이 있는 거다.

겉모습의 은수를 보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속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을 잃고 무너졌다가 일어서려고 고군분투하는 장군이 100명쯤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김대리는 변함 없이 나를 돕거나 대행하는 일에 열심이었고 썰렁한 농담으로 하연과 은수를 웃겨 주었다.

 

문득 김대리처럼 세상을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모든 일이 적당해 보였다.

사랑 때문에 가슴 앓이 같은 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았고, 승진 때문에 아둥바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이 '매너리즘'에 빠진 모습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그 '매너리즘'이 인생을 쉽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우리 팀은 독수리 5형제가 합체한 불사조가 되어 하루하루 다가오는 프리젠테이션 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리젠테이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서 마지막 정리와 실제 프리젠테이션 연습만 남겨둔 때였다.

나는 가끔 민준이 보내는 메일을 교환하며 민준에 대한 의혹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팀장님....저 오늘 단둘이 점심 먹으면 안될까요?'

 

갑자기 튀어 오르는 은수의 메시지였다. 

느낌이 안좋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단 둘이 점심을 먹자는 얘기는 회사를 그만둘 때 들은 말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라면 단 한번의 예외도 없는 '사퇴 의사 표명의 방법'으로 특허라도 등록해두어야 할 것이다.

 

'설마...그만둔다는 말은 아니지?'

 

나는 정말 설마...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프리젠테이션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은수의 사직은 지금까지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곧 점심시간인데 같이 점심 드시면서 얘기해요. 제가 사드릴게요...^^'

 

은수는  팀장님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서 회사 근처의 유명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데려갔다.

아무래도 내 예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은 은수가 회사에 들어온 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파게티를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 무엇을 먹을까 즐겁게 얘기하다가 주문을 하고 나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수는 물 한모금을 마시고 얘기를 꺼냈다.

 

"팀장님한테 죄송해서 어쩌죠?"

 

역시...퇴직 얘기같다.

 

"그만 두려고?"

 

"네......."

 

은수의 움츠러드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정말? 왜?"

 

예감했던 사실이라고 해서 충격이 덜한 것은 아니다.

 

"더 좋은 곳으로 옮기려고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 좋은 곳에 간다고 하면 '축하한다'라고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난 그것보단 이직의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지금 우리 팀에서 문제 있어?"

 

나는 김대리와의 관계를 의식하고 물었다.

 

"아뇨~"

 

은수는 고개까지 저어가며 다소 과장되게 부정했다.

아무래도 김대리와의 일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김대리에게 거절당한 건가?

 

"우리 팀 사람들 너무 좋아요. 팀장님은 적당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이 있고요. 하연씨는 어리지만 싹싹하고요. 또...김대리님은....."

 

"아...알았다. 김대리가 맨날 썰렁한 유머로 얼려버려서 맘에 안들어 그러는구나."

 

"아니에요. 김대리님도 알고 보면 좋은 분이세요. 가끔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것만 빼고는요."

 

김대리와 어찌된 것인지 모르지만 은수에겐 김대리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사랑을 거절당했다고 해서 상대방을 악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요. 팀장님 정말 존경해요. 새해 첫 날 무슨 생각했냐면요. 내가 서른 살에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어요. 앞으로 3년 남았는데...이왕이면 결혼도 했으면 좋겠고 최소한 대리 정도는 되고 싶더라고요. 그러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팀장님처럼 되고 싶었어요."

 

"나처럼?"

 

"네. 비록 결혼은 안했지만, 당당하고 또 일에서도 인정받고 있고....그리고 주변에 좋은 친구도 많으신 것 같고요. 그리고 유행에 앞서는 감각도 갖고 계시고요."

 

이렇게 남이 보는 모습은 틀린 것일까...

내 스스로 아름다운 30살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겉보기라도 화려하다면 그걸로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좀 더 노력하자. 우물밖으로 나가보자...그러면서 좀 더 제 경력을 키울 수 있는 회사를 알아봤어요."

 

"언제부터?"

 

나는 아직도 김대리와 은수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아 무언가 유추해보려고 물었다.

 

"한 달 정도 전부터요."

 

대충 내가 예상한 시간과 맞아 떨어진다.

 

"그때 막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했었는데 거절당하고 일을 열심히 하자... 생각했었어요."

 

은수는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 상대가 김대리라는 것은 정확한 것 같았다.

그랬구나...

 

"팀장님...평소에 저 정말 잘 챙겨주셔서 고마웠어요. 실연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냥 지나가면서 한마디 해주시는게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팀장님은 그냥 한말이시겠지만...."

 

이제 정확히 이유를 알게 되니 더 이상 은수를 잡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은수의 이직을 100%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까워서 어떻게 해...지금까지 프리젠테이션 다 준비해놓고..."

 

"괜찮아요. 저 이번 프로젝트로 얼마나 많이 배웠는데요. 그리고 프리젠테이션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 할거고 마무리는 정확하게 하고 갈게요."

 

나보다 어른스러워 보인다.

실연했다고 해서 바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하는 감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조금 더 자기 발전에 힘쓰는 모습...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것 같았다.

프리젠테이션 첫 회의 때 김대리에게 감정적으로 대한 일이 내가 본 은수가 흔들려 하는 모습의 전부였던 것 같았다.

 

"그거 아세요? 내가 그 날 김대리님과 싸우면서 말하려다가 참은 건데요. 김대리님도 모르는 게 있죠. 보통 여자들에겐 신분을 업그레이드 하려는 신데렐라 컴플렉스가 있지만 일하는 여성에겐 보호받고 싶은 보디가드 컴플렉스가 있대요. 혹시 나중에 비슷한 주제 얘기가 나오면 김대리님에게 꼭 전해주세요. 그 땐 상사이고 해서 더 이상 대들기가 그래서 참았지만...만약 제가 더 배우고 더 높은 자리에서 만나면 꼭 김대리님에게 제 의견을 관철시킬 거에요."

 

그래...김대리를 다시 만나면 보이지 않게 아프도록 때려줘라....

나는 마음 속으로 은수를 응원했다.

 

"그럼 우리 프리젠테이션 성공하면 은수씨 송별회 근사하게 해줄게..."

 

"그럼요. 저 시시하게 송별회 해주시면 다시 입사해서 이번엔 괴롭히기만 할 거에요."

 

사랑스럽다. 그리고 실연으로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과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싶다....

 

은수의 이직에 대해서 부장에게 보고해야겠다 생각하는 중에 민준에게서 메일이 왔다.

민준은 전에 새로 만든 아이디로 이름도 '이영만'이라는 가명으로 보내고 있었다.

 

지우야.

오랫만에 기쁜 소식을 전한다.

이제 드디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리츠칼튼 호텔 1207호로 내일 저녁 8시에 와줄래?

보고 싶다.

 

얼마만의 해후인가?

드디어 민준을 만나게 된다.

이제 1월 1일처럼 우리는 행복한 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내 기다림의 보상....이제 끝이 보이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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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한주가 지나갔네요. 이번 주는 정말 정신 없이 보냈습니다.

         설연휴 후의 한주라 그런지 아주 긴 것 같으면서도 짧은....그런....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도 매번 오후에 업데이트 했고요.

         게다가 추신 1줄 달기도 어려웠네요.

         주5일 근무제이지만, 주 6일제를 하고 계시는 이 땅의 많은 노동자를 위해

         오늘은 아주 일찍^^ 소설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른 주말부터 월요일까지 휴식을 갖고 다음 편에 더 충실할 수 있을 테고요.

         어느 분께서 제 소설을 보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리고보니 저도 마찬가지로 소설을 올리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네요.

         늘 그렇듯 제 주말인사에서 화려한 커플과 돈많고 성격 나쁜 부자는 제외합니다.

         이...리드미온은 이 땅의 노동자와 솔로부대와 함께 합니다. 화이륑!!!!

         1월에 시작한 소설이 어느 새 2월로 접어드네요.

         행복가득 사랑가득 2월이 되시길 바라며...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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