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아재가 만든 뉴욕 베이글

Nitro201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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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게임을 하다보면 한 가지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전 작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설의 보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범한 철검과 보석이 필요하고, 평범한 철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괴가 필요하고, 철괴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광석이 필요하고... 이런 식이지요.


가끔 냉장고를 열고 직접 만들어 놓은 수제 식품들을 둘러보다 보면 비슷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우유를 가공해서 치즈를 만들고, 돼지고기를 가공해서 햄을 만들고, 과일을 가공해서 잼을 만들고 하다 보면 어느 재료들이 쌓이는데, 이걸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조합을 해서 먹으면 훨씬 더 맛있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얼마 전에 만들었던 크림 치즈(https://blog.naver.com/40075km/221234680558)와 훈제연어(https://blog.naver.com/40075km/221238434056)를 보면 뉴욕 베이글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죠.


베이글은 마트에서 사 와도 되지만 만드는 게 어렵지 않으니 100% 수제를 목표로 한 번 구워봅니다.  


밀가루, 물, 소금, 설탕, 그리고 이스트가 재료의 전부입니다.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설탕을 풀고 이스트를 섞어서 잠시 기다립니다.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며 이스트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소금 섞인 밀가루와 함께 반죽기에서 돌려줍니다.

반죽이 한 덩어리로 뭉치고 찰기가 생기면 둥글게 모양을 잡고 한 시간 동안 발효를 시킵니다.

따뜻한 히팅 보울 위에 물에 적신 키친타월을 놓고 반죽이 두 배 정도 크기로 부풀어 오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반죽이 다 발효되면 8등분으로 나눠서 동그랗게 모양을 잡고 10분 정도 2차 발효를 시킵니다.


 

베이글의 특징이라면 마치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다는 점입니다.

반죽을 길게 밀어서 돌돌 만 다음 양 끝을 이어붙여서 만들거나, 간단하게 가운데에 손가락을 넣고 돌려서 구멍을 늘리는 방법을 써도 됩니다.

이런 독특한 모양의 빵을 만들게 된 기원은 16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얀 소비에스키(Jan Sobieski)가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하자 비엔나의 제빵사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등자(오스트리아어로 beugel) 모양의 빵을 만든데서 베이글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하지요 (Rosten, 1991). 하지만 그 이전에도 베이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 특히 이탈리아의 타랄리(Taralli)처럼 구멍뚫린 빵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유태인들이 전통적으로 만들어서 먹었다는 설도 있구요(Balinska, 2008). 하지만 그 유래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뉴욕에 베이글을 전파한 사람들이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 이민자들이라는 대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겉모습보다 더 중요한 특징은 굽기 전에 끓는 물에 한 번 데친다는 점입니다. 물에 삶으면서 녹말이 젤라틴화 되어서 나중에 구울 때 부풀어 오르고, 그 덕에 껍질은 바삭하면서도 안쪽은 쫄깃쫄깃한 식감의 빵이 만들어 지지요.

커다란 냄비에 물을 가득 채워넣고 끓이는데, 너무 팔팔 끓이면 반죽이 흐물흐물 퍼져버릴 수도 있으니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반죽을 넣는 것이 좋습니다. 한 면을 30초씩 데치는 일반적인 베이글과는 다르게 뉴욕 스타일 베이글은 좀 더 쫄깃한 맛을 내기 위해 한 면을 각각 1분 정도씩 데쳐줍니다.

베이글을 데치는 물에는 베이킹 소다나 설탕을 첨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베이킹 소다는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키고 당분이나 시럽은 캬라멜라이즈 반응을 일으켜서 베이글을 구웠을 때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만들어 줍니다.

다만 베이킹 소다는 원래 프렛첼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베이글이 프렛첼 식감을 갖게 된다는 단점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설탕이나 시럽 등의 당분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는 마침 메이플 시럼이 약간 남았길래 다 부어버렸네요.


 

끓는 물에 데친 반죽은 다시 220도 (화씨 425도) 오븐에서 표면이 갈색을 띌 때까지 10~20분 가량 구워줍니다.

예전에 스콘을 만들면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이런 종류의 빵은 그냥 먹으면 막 맛있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심심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듭니다.

밀가루와 이스트에 소금 약간 넣은 게 전부인 빵이다보니 아무래도 버터나 설탕, 달걀이 듬뿍 들어간 빵과는 또 다른 느낌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서양인들에게는 우리가 밥처럼 먹는 주식이 바로 빵이니 이런 심심한 맛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빵들이 밀가루나 호밀가루에 이스트와 물, 소금 정도만을 재료로 합니다. 버터와 설탕이 들어가는 크로와상이나 풀먼 식빵(샌드위치 식빵)이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고나 할까요. 부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빵들은 Bread가 아니라 Pastry로 구분할 정도니까요.


 

심심한 베이글은 역시 궁합이 잘 맞는 재료와 함께 먹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직접 만든 크림 치즈를 듬뿍 바르고, 그 위에 훈제 연어를 넉넉하게 얹어준 다음, 케이퍼와 양파 슬라이스를 올려서 먹습니다.

이 뉴욕 스타일의 베이글은 19세기 말, 뉴욕에서 크림치즈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러던 것이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래프트사가 크림치즈를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여기에 브로드웨이 코메디 쇼인 "Bagel and Yox"의 관람객들이 휴식 시간에 갓 구운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먹으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일요일 브런치의 대명사인 베이컨과 달걀을 대신하는 선택지로 크림치즈와 연어로 든든하게 속을 채운 뉴욕 베이글이 각광을 받게 되지요.

1960년대에는 베이글 대량 생산 및 유통 체제가 갖추어지고, 각종 잡지와 요리책에서 베이글과 크림치즈, 연어의 조합을 소개하면서 뉴욕 베이글은 도시를 벗어나 전국적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됩니다.


 

한 입 먹어보면 이 단순한 조합이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실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삭한 껍질을 베어물면 와사삭 부서지는 식감과 함께 쫄깃한 베이글 속살이 씹히고, 여기에 크림 치즈와 연어가 짭잘하면서도 고소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양파와 케이퍼가 새콤하면서도 아삭한 포인트를 주니까요.

그러고보면 미국 와서 가장 자주 먹은 음식은 의외로 햄버거가 아니라 뉴욕 스타일 베이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와 함께 먹기에는 햄버거보다는 속을 꽉 채운 베이글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가게에서 사 먹는 커피와 베이글은 왠지 힘겨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충전을 하는 느낌인데 반해, 집에서 느지막히 일어나 직접 만든 뉴욕 스타일 베이글에 갓 내린 커피를 곁들여 먹을 때는 그야말로 여유로운 브런치를 만끽하는 기분입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먹는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서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좋은 예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