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끝나가는 금요일 저녁. 간만에 야근이 없다고 공표된 오늘 갑자기 말수가 없는 조용한 후배가 말을 걸어옵니다.
'선배님. 오늘 혹시 바쁘세요? 저녁에 선배님하고 한 잔 하고 싶은데.'
평소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2차 회식으로 가는 호프집에도 가지 않는 녀석이 밥도 아니고 술을 같이 하자고 하니 선약이 있음에도 녀석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 후배님이 같이 놀자는데 마다할 수야 없지. 먹고 싶은거 있어?'
'탕수육. 탕수육이요.'
'그래. 알았어. 끝나고 회사 앞으로 가자. 내가 맛있는데 알아.'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컴퓨터 전원을 끄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녀석과 중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시작했습니다.
'사장님. 여기 탕수육 중 자랑 이과두주 한 병 주세요.'
저는 살짝 놀랐습니다.
'어? 너가 이런 술도 알아?'
'제가 중식을 좋아합니다. 중식을 먹을때는 술을 한 잔씩 먹어줘야 소화가 잘 돼요.'
평소 가족 걱정에 술 한잔 걸치지 않는 녀석은 음식 때문인지 맘 속의 걱정 때문인지 연신 술 잔을 비워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술잔을 같이 기울인 적도 없고, 사적인 얘기도 많이 하지는 않지만 큰 고민이 있다는 것을요.
술병이 하나 둘 늘어갔지만 녀석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을것이고 먼저 운을 떼지 않으면 녀석이 말을 할것 같지 않아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맘 속에 무슨 고민이 있는지 모르겠어. 말하지 않고 혼자 버텨낼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이야기 하고 싶다면 해봐. 절대 방해하지도 훼방 놓지도 않을테니'
말없이 탕수육을 집어먹으며 향긋하지만 꽤나 독한 이과두주 한잔을 입어 털어넣은 녀석은 그제서야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혼......이혼하고 싶습니다. 요즘'
'응?'
진지한 녀석이 갑작스레 폭탄발언을 하니 당황함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녹여보려 비어있는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뭐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때도 있지.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거야? 아니면 예전부터 그랬던거야?'
술잔의 술을 입에 털어넣어 미간이 구겨진 녀석은 잠시 고민하며 대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사고쳐서 결혼 했습니다. 얼마만에 아이가 생겼는진 모르실거에요. 2개월 입니다. 23살에 만나 연애 2개월 만에 아이가 생겼어요. 처음엔 얼떨떨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결국 서로 결혼을 하게 돼었죠.'
녀석은 과거를 곱씹으며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어색한 일도 둘이 함께 한다면 금새 해쳐나갈거란 생각이 들어서 정말 겁없이 달려왔습니다. 더 잘 해보려고 부던히 노력해서 이직까지 성공했고 실제로 더 잘됐지요.'
말없이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저는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독한 술 때문인지 급작스레 당황스런 질문을 맞이해서인지 녀석을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곧 답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늘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처럼 좋은 직장에서 괜찮은 월급을 못 받았다면 난 아이를 지웠을거야." 남자들도 으레 여자의 얼굴을 따지는 세상인데 이 정도 생각쯤이야 해서 그냥 넘겨왔습니다. 그런데....'
빈 술잔에 직접 술병을 기울이려는 후배를 손짓해서 말리며 술잔을 채워주니, 녀석은 다시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몇일 전 아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아마 4시 쯤 됐을거에요. 다시 재우려 했지만 잠들지 않는 아이는 우리 부부를 억지로 거실로 끌고 왔습니다. 아이가 잘 놀았으면 좋았으련만... 투정을 부리며 훌쩍대더라고요. 저는 아이를 달래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발로 아이를 꽤나 세게 밀어서 넘어뜨리는 겁니다. 저는 정말 크게 놀라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래? 빨리 미안하다 말하고 안아줘"
하지만 아내의 반응에 저는 더 크게 놀랐습니다.
"뭘 잘했다 울어? 평소에도 가끔 이러니까 신경쓰지마. 새벽에 일어나서 염병떠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한테 너무 한거 아니야 평소에도 가끔 아이를 이렇게 발로 밀친다고?"
"아 짜증나게 당신까지 왜 이래?"
아내는 거실에서 밤새 충전된 핸드폰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두 시간 뒤 저의 출근 시간이 가까워 오자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 동안 아이를 달래고 놀아준건 오롯이 저의 몫이었고 방에서 나온 아내는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사과는 없었습니다.'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채워주는 후배를 쳐다보며 잔을 비우고 따라주고 비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몇 번을 반복하기 전에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수도 없었기에 입을 뗐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아이를 잘 돌본다면 그냥 같이 지낼수 있는거야?'
평소 점심간에 탕수육이 나오면 "많이 많이 주세요" 하던 녀석이 탕수육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말했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다시 욕하거나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잘 하고는 있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다시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면 같은 일이 반복 되겠죠. 아니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너져 내려서 우울증이나 다른 문제가 올테죠....'
답없는 상황을 덤덤히 말하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을 표현하는 그 녀석은 생각보다 생각의 폭이 넓었습니다. 녀석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하나 더 했습니다.
'그러면 이혼은 단순히 아이를 격리시키기 위함이 아니란 뜻이지?'
비어버린 이과두주 병을 보며 한 병 더 시킬까 고민하던 녀석은 행동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제가 어떻게 아이와 아내를 억지로 떼어 놓겠어요. 아이는 제가 어떻게든 키울테니 그저 아내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그토록 원망했던 경단녀의 설움을 떨쳐내고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아이가 보고 싶다면 찾아 오고요....'
취기를 순화하기 위해 물잔을 채워 건네며 답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혼한다 치자. 아이는 어떻게 하려고?'
조용히 물잔을 반잔 정도 비운 녀석은 차분하지만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막막하기는 한데 저의 어머니한테 부탁하거나 보모를 써야죠. 그런데 사실...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서 이렇게 해야하나 저렇게 해야하나 끙끙 앓는 중이죠.....'
'그래. 사람은 고민과 생각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 이런 성장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봐. 그런데 현실적인 부분은 고려해 봤어?'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요. 아내의 부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산 집값은 정부정책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고, 지금까지 벌어둔 돈을 반으로 나누자니, 여태껏 은행이자 갚기만도 버거워서 모아둔 돈도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나눠야 할지도... 그렇다고 빚을 제가 다 떠 안는 대신에 돈 없이 보내자니... 모든 짐을 내가 책임질테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찾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정말 답답함 뿐입니다.'
더 이상 취기를 버틸수 없어서 술을 주문하던 것을 멈추던 녀석은 결국 술 한병을 더 시킨 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잘못이나 실수를 혼내기 위함이 아닌, 그저 모두의 행복을 위해 제가 모든걸 책임지고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술잔을 채워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나 괴로워하는 녀석의 마음을 달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거 같아 술잔을 반만 채워주며 질문을 했습니다.
'꽤나 구체적으로 생각했었구나. 아직 제수씨한테 말을 한거 같지는 않은데 제수씨는 어때?'
'사실 이혼이라고 얘기는 안했지만 암시를 주기는 했어요. 아이를 돌보는걸 못 버텨하니 잠시 떨어져 있는건 어떠하냐고요.'
'그래서 뭐라던데?'
'싫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면서요.'
'그러면 된거 아닌가?'
'아내는 늘 저에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나는 아이가 싫어. 주변에만 있어도 내 기운을 다 뺏어가는것 같고. 예전부터 결혼은 해도 아이는 안낳고 살고 싶어."'
'그런 얘기를 언제부터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배에 있을때도 이런 얘기를 스스럼 없이 했죠. 아마 아내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다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만약 에너지가 소진됐는데도 아이를 잘 돌본다면.... 아마 아내가 망가져 갈거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가장 중요한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말야. 제수씨는 널 사랑하니?'
머뭇거리며 입을 떼는 녀석은 확신할수는 없다며 운을 뗐습니다.
'사실 알수는 없죠... 그런데 만약 저를 사랑했다면 "만약 당신이 좋은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라던가 이유없는 감정소모를 하진 않았을거 같아요.'
'이유없는 감정소모?'
'그냥 가끔 기분이 나쁜 날이 있어요. 얼마전 고부갈등을 소재로한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더라고요.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당연히 고부갈등이 있을래야 있을수가 없죠. 그래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우리는 고부갈등도 없고 그런것을 봐봐야 기분만 나빠질테니 그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굉장히 신경질을 내며 "왜 내 말을 다 무시해"라며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저 때문에 기분이 나빴을거 같아 그때는 미안하다며 달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그저 기분이 나빴을뿐이고 저에게 시비를 걸고 싶거나 화를 내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일이 일어난 얼마 뒤에 "여보. 미안해. 그 때는 기분이 날카로워져서 괜히 당신을 괴롭히고 싶었어." 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이런 일은 여러번 반복됐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다시 질문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번 반복됐다고? 그냥 시비 걸고 싶어서 너를 괴롭힌 것이?'
'네.'
한숨과 함께 대답을 하는 녀석을 보니 저 또한 답답함을 느껴 반 만 채워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한 뒤 술을 마셨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술이 독하지 않게 느껴지는것이 사람이건만... 술은 점점 독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수씨는 아이를 사랑할까?'
술에 얼큰하게 취해버렸는지 고개를 과장되게 좌우로 흔들며 녀석은 얘기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잘해주다가도 어떨 때는 발로 밀치거나 욕같은 말을 하거나 소리지르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퇴근을 하면 아이를 잘 돌보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제가 출근을 하면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아이는 유치원에서 거의 7시간을 보내는데도 이런 말을 자주 반복해요
"육아는 너무 지치고 힘들고... 빨리 초등학교에 가서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싶어. 우리 둘이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두번이면 모를까 이런 말을 반복하니 당최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녀석이 술잔을 채웠습니다. 반 잔만 따르게 하려다 그냥 멈추고 녀석이 하는대로 내버려뒀습니다. 술잔이 넘치도록 가득 술을 채우는 녀석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생각마저 들어요. 아내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게 아닐까요? 참을성이 약한 아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수차례 직장을 옮겼습니다. 길면 6개월, 짧으면 2개월.. 말로는 빨리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냥 자신이 없으니 저를 이용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스스로는 일을 꾸준히 못할거 같고 지금까지 아내로서 엄마로서 버텨온 시간이 아까워서 스스로를 속이는것 같다는 말이지?'
'네. 아마도요. "나는 내 남편과 내 아이를 사랑해."라면서요.'
술에 꽤나 많이 취한 녀석은 말릴새도 없이 연거푸 술잔을 석잔 마시더니 고개를 푹 숙인채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위로를 하지도 그렇다고 너의 말이 옳다고 말을 할수도 없었습니다. 녀석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는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선배님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탁상에 엎드려 잠이 든 녀석을 보니 너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장님께 전화를 걸어 내일은 이 녀석이 출근을 못할거 같으니 월차를 부탁한다는 말을 대신해 준 뒤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그 동안 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 식당 사장님께 담배 한 개비를 빌려 밖으로 나와 입에 물고 불을 붙였습니다.
흰색 푸른 담배연기 처럼, 선명함을 가리우는 많은 상황에 녀석의 답답함이 느꼈졌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혼자서 짊어지려는 녀석... 그 녀석을 생각하고 그 녀석이 했던 말을 곱씹으니 금새 담배는 다 타버리고 한 개비를 더 빌려 밖으로 나와 불을 붙이려니 대리기사님이 도착했습니다.
녀석을 대리기사님께 맡기고 대신 돈을 내준 뒤 저도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찾아 밖으로 대로변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택시 정류장에는 택시 여러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사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아까 식당사장님께 빌린 담배가 간절해져 한 대 피우고 이동하자고 하니, 한 기사님이 "내 차에 선루프 있으니 바로 갑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지." 술에 취해 몸이 힘들어지니 기사님의 권유를 이길수 없어 그대로 택시에 올라타 자동차의 시거잭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아름답고도 고독해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녀석을 생각하니 문득 2년 전 여름휴가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올 휴가 어떻게 보내니?'
'아이와 고향 집에 다녀오려고요. 한 4박 5일?
'어? 너희 집에만 오래있으면 제수씨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저랑 아이만 가요. 아내는 육아하느라 힘들테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려고요.'
'흠... 그래? 그럼 남은 기간은 너도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는거야?'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아이와 아내 잠들면 그때 짬내면 돼죠.'
아내를 위해 태어난지 200일도 안된 아이를 데리고 200km 정도의 거리를 여행하는 그 모습은 당시에도 인상적이어서 회사에서 몇 일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담배 불이 거의 타들어가자 눈 앞에 편의점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사님께 잠시 기다려달라 부탁드리고 택시에서 내려 담배불을 비벼끈 뒤 꽁초를 편의점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숙취해소 음료를 사서 다시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마십니다. 힘든 일을 잊기 위해, 더 즐거워지기 위해,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축하하기 위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이든 숙취는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숙취를 떨쳐내기 위해 마시는 숙취해소 음료같은 말을 그 녀석에게 해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마지막에 잠들기 직전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곱씹어 봅니다.
'여자는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아. 나도 나이가 제법있지만 남자들 속에서 잘 살고 있잖아. 때론 남자들 속에서 홀로 여자로 지낸다는 것이 힘들지만, 남에게 큰 도움을 받아야만 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아. 너의 생각 속에 여자들을, 그리고 너의 아내를 가둬두지마.'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이 말을 저의 가슴 속에 묻어두길 잘한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비혼주의자의 삶을 결정하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일찍부터 준비한 저와 그 녀석의 아내가 절대 같을리 없기 때문이죠.
택시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서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내려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몸을 감싸던 허물을 하나씩 벗고, 화장이라는 가면을 지우며 오롯이 나 자신인 시간을 가져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금새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의 유혹을 견딜 수 없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떠보니 해는 하늘 위에 떠 있고, 회사에 지각했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카톡이 왔었습니다.
'선배. 과장님한테는 얘기해뒀어요. 오늘 출근 못하실거 같다고 전달했으니 푹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참. 오늘 토요일인데 제 휴가를 오늘 쓰신다고 하면 어떡해요? 어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밤사이에 입장이 뒤바뀐 저와 그 녀석. 도무지 자기 자신을 돌볼 생각하지 않고 앞만보는 그 녀석.
저는 지금도 제가 아끼는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토요일 늦은 아침에 해장을 마친 뒤 글을 써서 어제 있었던 일을 적어봤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이혼을 하자니 아이의 성장이 걱정이 되고
이혼을 안 하자니 아내의 삶이 걱정이 되서 오도가도 못하는 저의 후배에게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노라고 저를 대신해서 얘기해주시면 안될까요?
이혼을 고민하는 그 녀석
'선배님. 오늘 혹시 바쁘세요? 저녁에 선배님하고 한 잔 하고 싶은데.'
평소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2차 회식으로 가는 호프집에도 가지 않는 녀석이 밥도 아니고 술을 같이 하자고 하니 선약이 있음에도 녀석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 후배님이 같이 놀자는데 마다할 수야 없지. 먹고 싶은거 있어?'
'탕수육. 탕수육이요.'
'그래. 알았어. 끝나고 회사 앞으로 가자. 내가 맛있는데 알아.'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하나 둘 컴퓨터 전원을 끄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녀석과 중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녀석은 배가 고팠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시작했습니다.
'사장님. 여기 탕수육 중 자랑 이과두주 한 병 주세요.'
저는 살짝 놀랐습니다.
'어? 너가 이런 술도 알아?'
'제가 중식을 좋아합니다. 중식을 먹을때는 술을 한 잔씩 먹어줘야 소화가 잘 돼요.'
평소 가족 걱정에 술 한잔 걸치지 않는 녀석은 음식 때문인지 맘 속의 걱정 때문인지 연신 술 잔을 비워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술잔을 같이 기울인 적도 없고, 사적인 얘기도 많이 하지는 않지만 큰 고민이 있다는 것을요.
술병이 하나 둘 늘어갔지만 녀석의 표정이 밝아지지 않을것이고 먼저 운을 떼지 않으면 녀석이 말을 할것 같지 않아 제가 먼저 말했습니다.
'맘 속에 무슨 고민이 있는지 모르겠어. 말하지 않고 혼자 버텨낼수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이야기 하고 싶다면 해봐. 절대 방해하지도 훼방 놓지도 않을테니'
말없이 탕수육을 집어먹으며 향긋하지만 꽤나 독한 이과두주 한잔을 입어 털어넣은 녀석은 그제서야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이혼......이혼하고 싶습니다. 요즘'
'응?'
진지한 녀석이 갑작스레 폭탄발언을 하니 당황함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녹여보려 비어있는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뭐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때도 있지. 그런데 갑자기 이러는 거야? 아니면 예전부터 그랬던거야?'
술잔의 술을 입에 털어넣어 미간이 구겨진 녀석은 잠시 고민하며 대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사고쳐서 결혼 했습니다. 얼마만에 아이가 생겼는진 모르실거에요. 2개월 입니다. 23살에 만나 연애 2개월 만에 아이가 생겼어요. 처음엔 얼떨떨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 결국 서로 결혼을 하게 돼었죠.'
녀석은 과거를 곱씹으며 이야기를 계속 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고 어색한 일도 둘이 함께 한다면 금새 해쳐나갈거란 생각이 들어서 정말 겁없이 달려왔습니다. 더 잘 해보려고 부던히 노력해서 이직까지 성공했고 실제로 더 잘됐지요.'
말없이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저는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야?'
독한 술 때문인지 급작스레 당황스런 질문을 맞이해서인지 녀석을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곧 답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늘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처럼 좋은 직장에서 괜찮은 월급을 못 받았다면 난 아이를 지웠을거야." 남자들도 으레 여자의 얼굴을 따지는 세상인데 이 정도 생각쯤이야 해서 그냥 넘겨왔습니다. 그런데....'
빈 술잔에 직접 술병을 기울이려는 후배를 손짓해서 말리며 술잔을 채워주니, 녀석은 다시 술잔을 비우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몇일 전 아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아마 4시 쯤 됐을거에요. 다시 재우려 했지만 잠들지 않는 아이는 우리 부부를 억지로 거실로 끌고 왔습니다. 아이가 잘 놀았으면 좋았으련만... 투정을 부리며 훌쩍대더라고요. 저는 아이를 달래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발로 아이를 꽤나 세게 밀어서 넘어뜨리는 겁니다. 저는 정말 크게 놀라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이래? 빨리 미안하다 말하고 안아줘"
하지만 아내의 반응에 저는 더 크게 놀랐습니다.
"뭘 잘했다 울어? 평소에도 가끔 이러니까 신경쓰지마. 새벽에 일어나서 염병떠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이한테 너무 한거 아니야 평소에도 가끔 아이를 이렇게 발로 밀친다고?"
"아 짜증나게 당신까지 왜 이래?"
아내는 거실에서 밤새 충전된 핸드폰을 들고 침실로 들어가 두 시간 뒤 저의 출근 시간이 가까워 오자 방에서 나왔습니다. 그 동안 아이를 달래고 놀아준건 오롯이 저의 몫이었고 방에서 나온 아내는 아이에게도 저에게도 사과는 없었습니다.'
앞에 놓인 빈 술잔을 채워주는 후배를 쳐다보며 잔을 비우고 따라주고 비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몇 번을 반복하기 전에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수도 없었기에 입을 뗐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아이를 잘 돌본다면 그냥 같이 지낼수 있는거야?'
평소 점심간에 탕수육이 나오면 "많이 많이 주세요" 하던 녀석이 탕수육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말했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다시 욕하거나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잘 하고는 있는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다시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다 쓰면 같은 일이 반복 되겠죠. 아니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무너져 내려서 우울증이나 다른 문제가 올테죠....'
답없는 상황을 덤덤히 말하지만 마음속의 답답함을 표현하는 그 녀석은 생각보다 생각의 폭이 넓었습니다. 녀석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하나 더 했습니다.
'그러면 이혼은 단순히 아이를 격리시키기 위함이 아니란 뜻이지?'
비어버린 이과두주 병을 보며 한 병 더 시킬까 고민하던 녀석은 행동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제가 어떻게 아이와 아내를 억지로 떼어 놓겠어요. 아이는 제가 어떻게든 키울테니 그저 아내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그토록 원망했던 경단녀의 설움을 떨쳐내고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아이가 보고 싶다면 찾아 오고요....'
취기를 순화하기 위해 물잔을 채워 건네며 답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혼한다 치자. 아이는 어떻게 하려고?'
조용히 물잔을 반잔 정도 비운 녀석은 차분하지만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막막하기는 한데 저의 어머니한테 부탁하거나 보모를 써야죠. 그런데 사실...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서 이렇게 해야하나 저렇게 해야하나 끙끙 앓는 중이죠.....'
'그래. 사람은 고민과 생각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 이런 성장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봐. 그런데 현실적인 부분은 고려해 봤어?'
'솔직히 잘은 모르겠어요. 아내의 부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산 집값은 정부정책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고, 지금까지 벌어둔 돈을 반으로 나누자니, 여태껏 은행이자 갚기만도 버거워서 모아둔 돈도 없는데 어떻게 돈을 나눠야 할지도... 그렇다고 빚을 제가 다 떠 안는 대신에 돈 없이 보내자니... 모든 짐을 내가 책임질테니 당신은 당신의 삶을 찾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정말 답답함 뿐입니다.'
더 이상 취기를 버틸수 없어서 술을 주문하던 것을 멈추던 녀석은 결국 술 한병을 더 시킨 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잘못이나 실수를 혼내기 위함이 아닌, 그저 모두의 행복을 위해 제가 모든걸 책임지고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술잔을 채워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너무나 괴로워하는 녀석의 마음을 달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거 같아 술잔을 반만 채워주며 질문을 했습니다.
'꽤나 구체적으로 생각했었구나. 아직 제수씨한테 말을 한거 같지는 않은데 제수씨는 어때?'
'사실 이혼이라고 얘기는 안했지만 암시를 주기는 했어요. 아이를 돌보는걸 못 버텨하니 잠시 떨어져 있는건 어떠하냐고요.'
'그래서 뭐라던데?'
'싫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면서요.'
'그러면 된거 아닌가?'
'아내는 늘 저에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나는 아이가 싫어. 주변에만 있어도 내 기운을 다 뺏어가는것 같고. 예전부터 결혼은 해도 아이는 안낳고 살고 싶어."'
'그런 얘기를 언제부터 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아이가 배에 있을때도 이런 얘기를 스스럼 없이 했죠. 아마 아내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다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만약 에너지가 소진됐는데도 아이를 잘 돌본다면.... 아마 아내가 망가져 갈거에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가장 중요한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말야. 제수씨는 널 사랑하니?'
머뭇거리며 입을 떼는 녀석은 확신할수는 없다며 운을 뗐습니다.
'사실 알수는 없죠... 그런데 만약 저를 사랑했다면 "만약 당신이 좋은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면..." 이라던가 이유없는 감정소모를 하진 않았을거 같아요.'
'이유없는 감정소모?'
'그냥 가끔 기분이 나쁜 날이 있어요. 얼마전 고부갈등을 소재로한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더라고요.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당연히 고부갈등이 있을래야 있을수가 없죠. 그래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우리는 고부갈등도 없고 그런것을 봐봐야 기분만 나빠질테니 그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굉장히 신경질을 내며 "왜 내 말을 다 무시해"라며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저 때문에 기분이 나빴을거 같아 그때는 미안하다며 달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그저 기분이 나빴을뿐이고 저에게 시비를 걸고 싶거나 화를 내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일이 일어난 얼마 뒤에 "여보. 미안해. 그 때는 기분이 날카로워져서 괜히 당신을 괴롭히고 싶었어." 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이런 일은 여러번 반복됐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며 다시 질문 했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번 반복됐다고? 그냥 시비 걸고 싶어서 너를 괴롭힌 것이?'
'네.'
한숨과 함께 대답을 하는 녀석을 보니 저 또한 답답함을 느껴 반 만 채워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한 뒤 술을 마셨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술이 독하지 않게 느껴지는것이 사람이건만... 술은 점점 독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수씨는 아이를 사랑할까?'
술에 얼큰하게 취해버렸는지 고개를 과장되게 좌우로 흔들며 녀석은 얘기했습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잘해주다가도 어떨 때는 발로 밀치거나 욕같은 말을 하거나 소리지르기도 하고... 그런데 제가 퇴근을 하면 아이를 잘 돌보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으니... 제가 출근을 하면 아이를 어떻게 돌보는지도 전혀 모르겠어요... 아이는 유치원에서 거의 7시간을 보내는데도 이런 말을 자주 반복해요
"육아는 너무 지치고 힘들고... 빨리 초등학교에 가서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싶어. 우리 둘이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두번이면 모를까 이런 말을 반복하니 당최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녀석이 술잔을 채웠습니다. 반 잔만 따르게 하려다 그냥 멈추고 녀석이 하는대로 내버려뒀습니다. 술잔이 넘치도록 가득 술을 채우는 녀석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요즘에는 이런 생각마저 들어요. 아내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게 아닐까요? 참을성이 약한 아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수차례 직장을 옮겼습니다. 길면 6개월, 짧으면 2개월.. 말로는 빨리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냥 자신이 없으니 저를 이용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스스로는 일을 꾸준히 못할거 같고 지금까지 아내로서 엄마로서 버텨온 시간이 아까워서 스스로를 속이는것 같다는 말이지?'
'네. 아마도요. "나는 내 남편과 내 아이를 사랑해."라면서요.'
술에 꽤나 많이 취한 녀석은 말릴새도 없이 연거푸 술잔을 석잔 마시더니 고개를 푹 숙인채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위로를 하지도 그렇다고 너의 말이 옳다고 말을 할수도 없었습니다. 녀석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들썩이는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선배님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끝으로 탁상에 엎드려 잠이 든 녀석을 보니 너무 가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장님께 전화를 걸어 내일은 이 녀석이 출근을 못할거 같으니 월차를 부탁한다는 말을 대신해 준 뒤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그 동안 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 식당 사장님께 담배 한 개비를 빌려 밖으로 나와 입에 물고 불을 붙였습니다.
흰색 푸른 담배연기 처럼, 선명함을 가리우는 많은 상황에 녀석의 답답함이 느꼈졌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혼자서 짊어지려는 녀석... 그 녀석을 생각하고 그 녀석이 했던 말을 곱씹으니 금새 담배는 다 타버리고 한 개비를 더 빌려 밖으로 나와 불을 붙이려니 대리기사님이 도착했습니다.
녀석을 대리기사님께 맡기고 대신 돈을 내준 뒤 저도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찾아 밖으로 대로변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택시 정류장에는 택시 여러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사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아까 식당사장님께 빌린 담배가 간절해져 한 대 피우고 이동하자고 하니, 한 기사님이 "내 차에 선루프 있으니 바로 갑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지." 술에 취해 몸이 힘들어지니 기사님의 권유를 이길수 없어 그대로 택시에 올라타 자동차의 시거잭으로 불을 붙였습니다.
아름답고도 고독해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녀석을 생각하니 문득 2년 전 여름휴가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너는 올 휴가 어떻게 보내니?'
'아이와 고향 집에 다녀오려고요. 한 4박 5일?
'어? 너희 집에만 오래있으면 제수씨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저랑 아이만 가요. 아내는 육아하느라 힘들테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려고요.'
'흠... 그래? 그럼 남은 기간은 너도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갖는거야?'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아이와 아내 잠들면 그때 짬내면 돼죠.'
아내를 위해 태어난지 200일도 안된 아이를 데리고 200km 정도의 거리를 여행하는 그 모습은 당시에도 인상적이어서 회사에서 몇 일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담배 불이 거의 타들어가자 눈 앞에 편의점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사님께 잠시 기다려달라 부탁드리고 택시에서 내려 담배불을 비벼끈 뒤 꽁초를 편의점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숙취해소 음료를 사서 다시 택시에 올라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마십니다. 힘든 일을 잊기 위해, 더 즐거워지기 위해,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축하하기 위해....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이든 숙취는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숙취를 떨쳐내기 위해 마시는 숙취해소 음료같은 말을 그 녀석에게 해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마지막에 잠들기 직전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곱씹어 봅니다.
'여자는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아. 나도 나이가 제법있지만 남자들 속에서 잘 살고 있잖아. 때론 남자들 속에서 홀로 여자로 지낸다는 것이 힘들지만, 남에게 큰 도움을 받아야만 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아. 너의 생각 속에 여자들을, 그리고 너의 아내를 가둬두지마.'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는 이 말을 저의 가슴 속에 묻어두길 잘한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비혼주의자의 삶을 결정하고, 남자들이 주도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일찍부터 준비한 저와 그 녀석의 아내가 절대 같을리 없기 때문이죠.
택시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서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내려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몸을 감싸던 허물을 하나씩 벗고, 화장이라는 가면을 지우며 오롯이 나 자신인 시간을 가져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금새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의 유혹을 견딜 수 없어졌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이 잘 떠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눈을 떠보니 해는 하늘 위에 떠 있고, 회사에 지각했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핸드폰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카톡이 왔었습니다.
'선배. 과장님한테는 얘기해뒀어요. 오늘 출근 못하실거 같다고 전달했으니 푹 쉬시고 월요일에 봬요. 참. 오늘 토요일인데 제 휴가를 오늘 쓰신다고 하면 어떡해요? 어제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밤사이에 입장이 뒤바뀐 저와 그 녀석. 도무지 자기 자신을 돌볼 생각하지 않고 앞만보는 그 녀석.
저는 지금도 제가 아끼는 후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토요일 늦은 아침에 해장을 마친 뒤 글을 써서 어제 있었던 일을 적어봤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이혼을 하자니 아이의 성장이 걱정이 되고
이혼을 안 하자니 아내의 삶이 걱정이 되서 오도가도 못하는 저의 후배에게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노라고 저를 대신해서 얘기해주시면 안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