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THE MASK)-2

바람2004.02.01
조회329

거지소년이 사람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였다.

"살인이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에 사람들은 놀라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살인?"

"누가 죽었나?"

 

사람들은 살인사건이라는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생긴 것이 즐거운 듯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썰물 빠지듯이 거지소년 주위에서 사라져갔다.
방금 있었던 '거지소년 구타사건'은 이미 머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랜 것 같다.

 

"이런. 다 된 밥에 누가 코 빠뜨리는 거야?"

 

거지소년은 자신 손에 쥐어진 몇 푼의 동전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어디 주점에 가서 맛있는 요리라도 먹을 수 있었는데
난데없는 비명소리 덕분에 멋진 연기를 한 보람도 없으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도대체 뭔 일인가? 살인이라니."

 

돈을 못 번건 못 번거고 어차피 틀어진 일.
소년도 방금 들려온 비명소리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살인 사건이라는
것이 어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건가?
평생 운 좋아야(?) 몇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구경거리가 아닌가.

거지소년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는 방향으로 어슬렁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서둘러야 좋은 자리 찾기는 힘들고 상황을 보아서 개구멍 작전을
피울 생각이었다. 

태동로 거리 안쪽에 위치한 태동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그 곳이 사건 현장 같았다.

태동광장은 사거리의 중심지라 수 백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이였다.
그런 곳에 어림잡아도 3백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인간 원형 벽을 만들고 있었으니
사실 살인사건 구경보다 그 모습이 휠 씬 더 장관으로 보였다.

 

"하하. 무슨 사람들이 살인사건 하나에 저렇게 갑자기 많이 모였지?"

거지소년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며 그 곳으로 끼어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 다리 사이로 기어서 들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잘 못하다는
사람들에게 깔려 저승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실행 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구경을 하지...."

거지소년은 인간원형벽을 기웃거리며 빈틈을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광장을 두리번거리던 거지소년은 승룡탑(承龍塔)을 보고 소리쳤다.

 

"옳지. 저기면 되겠다."

 

광장은 거대한 원형으로 공간이 형성되어있고 그 원을 사등분하여
탑이 세 개씩 세워져 있는데 그 것을 사람들은 승룡탑이라 불렀다.

승룡탑은 사방4자 길이의 방형 지대를 세우고 그 위로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탑신을 세윘는데 총 19층에 이른다. 이러한 석탑이 한 곳에 세 개가
삼각형을 그리며 서있고, 삼각형 중심에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의 거대한 용이
기둥 처럼 세워져 있다.
승룡탑(承龍塔)은 그 세밀한 조각과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태동로 사거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 된 것도 승룡탑이 유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지소년은 몇 년은 씻지 않아 때가 낀 시커먼 손과 발을 이용하여 시대의 가장
아름답다는 승룡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로 승천하려는 듯이 땀을 열심히 흘리면서...
얼마나 올랐을까... 사람들 뒤통수가 아닌 머리통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때가
되서야 거지소년의 끈질긴 승천은 멈출 수 있었다.

 

"어라! 이게 뭐야? 별거 없잖아! 이씨"

거지소년은 붉은 피가 광장 바닥에 흘러 넘치는 상상을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가 찾는 피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단, 쓰러져 있는 남자의 이마에 약간의 핏자국이 보일 뿐이었다.

"별것도 아니구만 소란이야. 이씨"

아래를 내려보니 몇 사람이 쓰러져 있는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 명은 의원이라도 되는지 진맥도하고 눈도 뒤집어 보는 것이
그럴 듯 해 보였다. 아마도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원인 듯한 사람이 쓰러진 남자의 몸 몇 군데에
침을 놓자 기적이 일어났다.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난 것이다.

"뭐야? 안죽었어? 저 돌팔이가 신의라도 되나? 돈 많이 벌겠어."

거지소년은 상황이 너무 싱겁게 끝나자 힘들게 올라온 것이 허탈하게
느껴지고 배신감마저 들어 이상하게 화가 났다.

 

"저 새끼는 죽지도 않은 것이 사기는 치고 그래! 에이 퉤!"

 

허탈감에 아래를 내려다 보니 그 기분은 아래에 몰려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같았다. 사람들은 남자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무척이나 섭섭한 듯이
투덜거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보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거지소년은 한 동안 탑 위에 앉아 있다가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 사라진 후에야 내려왔다.

 

사람들은 늘 그렇듯 순식간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다가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자 미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광장은 언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가 싶게 지나다니는 행인 몇 명이 보일 뿐이었다.

광장 가운데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남자가 멍청히 혼자 앉아있었다.
그를 치료하던 의원도 더 이상 볼일이 없는지 아님 남자의 초라한 행색에서
돈을 받을 수 없을 거라 생각되어서 그런지 자신의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서
사람들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거지소년은 힘겹게 탑 아래로 내려와서도 이상하게 화가 가시질 않았다.
마치 자신의 무엇인가를 빼앗긴 것 같기도 하고 무척이나 손해보는 장사를
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지소년은 고개를 흔들어 모든 생각을 지우고 다시 구걸이나 하려고
광장 쪽을 쳐다봤다.

"어쭈. 저 사기꾼 아직도 있네."

멍청히 광장가운데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하자 자연스럽게 발길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사내는 꾀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특히 코가 크고 눈섭이
진한 것이 성격이 활달해 보였다.
옷은 하얀색 무복을 입었는데 곳곳에 핏자국이 여럿인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크게 싸운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팔이나 다리에 난 상처는 괜찮아 보였지만
가슴에 길게 그어진 검상은 치명적인 것 같았다.

 

거지소년은 사내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제길! 사기 치지 말라고 한마디 해 주려 했더니만 완전 사기 친 것은  아니네.
 이거 반송장 아니야!"

거지소년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깊게 감겨져 떠질 것 같지 않던 사내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거지소년은 사내가 눈을 뜨자 자기 딴에는 걱정이 되어서 충고를 했다.

"이봐요! 반송장 아저씨! 여기서 밤새면 정말 송장 될 거요. 어디 객장 이라도
 알아보쇼"

그러나 사내는 거지소년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도
없이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거지소년은 사내의 눈앞에 손을 휘저의며 다시 한번 충고를 했다.

"여봐요! 반송장 아저씨. 좀 있으면 해가 지니 빨리 잘 자리나 알아보라니깐"

그러나 사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청한 표정으로 있자 거지소년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쳇! 뭐야. 반송장이 아니라 바보였잖아."

거지소년이 툴툴거리며 광장을 나오려 할 때였다.

"나를 네 집에 재워주면 안되겠느냐?."

"?"

뒤쪽 사내가 있던 곳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온 것이다.
뒤돌아서 멍청히 앉아있는 사내를 보며 거지소년이 물었다

"반송장 아저씨가 말했수?"

"그래. 객장을 찾아가라고 하지 말고 네가 데려다 재워주면 안되겠느냐?"

분명 멍청하게 있던 사내에게서 나온 음성이었다.
우울한 듯이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거지소년은 황당했다.

"뭐라구? 누굴 재워줘?"

그렇지 않아도 누구 때문에 돈도 못 벌고 생고생을 했는데 잠자리까지
제공해 달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실 사내야 거지소년이 자신 때문에 돈을 못 벌었는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거지소년의 억지일 뿐이지.

"싫어!"

"왜?"

"...?"

사내의 당연한 듯한 물음에 거지소년은 순간 당황했다.

"싫다면 싫은 거지. 반송장 아저씨 마음이야?"

"그래도 재워주면 안되겠느냐?"

사내는 의외로 집요했다.

"안돼! 그렇지 않아도 반송장 아저씨 때문에 손해 많이 봤어."

"얼마나 손해 봤는데?"

거지소년의 머리 속이 갑자기 복잡해 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얼마나 손해 봤냐구? 자기가 손해배상 해 준다는 말인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거지소년이
사내의 물음에서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음. 반송장 아저씨가 손해배상 해 줄 거야?"

"해주마. 그 대신 몇 일만 재워주거라. 숙박비도 줄테니까."

사내의 대답에 거지소년은 머릿속을 더욱 빠르게 굴렸다.

'어라. 저 아저씨가 왜 저래? 하하하 어쨌든 땡 잡았다.'

"흠흠. 뭐 그렇다면 좋아. 그러나 이거 하난 집고 넘어 가야해"

"뭔데?"

"우리 집은 여각처럼 시설이 좋지 못해 괜히 나중에 트집 잡아서 숙박비
 안 주면 안돼. 알았지?"

"그래. 알았다."

사내는 거지소년의 말에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서로간에 협의를 보았다.

"좋아. 그럼 우선 손해 배상 비용으로 자은 2푼만 내. 그리고 하루 숙박비는
 자은 3푼씩이야. 더는 못 깍아줘!"

거지소년은 사내가 깍아 달라는 말도 하기 전에 못을 박아버렸다.
자신도 비싸게 부른 것임을 알기 때문에 괜히 큰 소리로 가격을 흥정 한 것이다.
보통 고급 주루나 여각 같은 곳에서 하루 숙박비가 자은 4푼인 것으로 따지면
상당히 비싼 것이다.

"좋다"

"...좋...아?"

거지소년은 그래도 깍아 달라면 내심 못이기는 척하고 깍아 주려고 했는데
사내가 시원스럽게 나오자 허탈하기까지 했다. 좀 더 올려 부를 것을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 그럼 합의 봤다. 내 이름은 치우(蚩尤)야"

"그래? 좋은 이름이구나! 난 상천제(上天帝) 막개다!"

"그래? 반송장 아저씨도 이름 좋네. 하하하"

거지소년 치우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상천재 막개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