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럽이2006.11.15
조회13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최승헌

신림동에 와서 이 가을이 깊다고 말하기엔
너무 성급한 것을 깨닫는다
한 계절이 옷을 벗고 이곳까지 오기에는
돌아와야 할 길이 너무 많다
생선 한 마리, 소주 한 병도 웃돈을 얹어줘야 사는
굽고 허약한 길에 의지할 건 사지육신 멀쩡한 몸이겠지만
이 동네에서 가을은
허파에 도둑처럼 숨어 들어와 잠을 싹쓸이 해버린
엉큼한 바람이거나
좁은 골목 촘촘히 박혀서 종일 고시생들의 밥만 해대는
밥집에 대기 중인 불린 쌀처럼
덜 여물은 몸을 붙들고 두 눈 시퍼렇게 뜨는 일이다
가끔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인사동 화랑에서나 보던
그림 같은 가을이 잠깐씩 목을 내밀기도 하고
여느 골목처럼 주차 시비로
고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오래 입지 않은 옷의 습기처럼 눅눅한 새벽이 열리면
누구보다 바쁘게 산동네를 내려가는 사람들
저들에게 희망이란 도시 곳곳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재빨리 사람들의 입맛을 바꾸어 놓은 프랜차이즈 체인점에서
뜯어먹는 치킨 맛에 비유가 되기나 할까
가난이 지지리도 못난 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삶이 강력 본드에 붙은 파리처럼 움직일 수 없는 땅에
오래 뿌리를 박아야 될 일임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