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8. 6. 7. 목요일 퇴원을 했다. 퇴원에 담긴 입원이란 뜻. 다쳤다. 발목이 부러졌고 의사는 수술을 해야만 정상적인 회복이 가능하다고 했다. 발목에 박힌 나사못은 어쩐지 회복에 도움이 될 모양새는 아니지만 도움을 준다니 믿을 수밖에.
수술 당일 내가 수술을 할 것이란 염두가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준비없이 수술실 침대에 누웠다. 척추 마취로 진행하려던 수술은 감춰지지 않는 통증으로 인해 예정에 없던 수면 마취에 이르게 했다. 잠에서 깨었을 땐 바퀴달린 침대에 누워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고 수술을 도왔던 의사의 보조인으로부터 아이코스를 건내 받았다. 담배가 무척 당겼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척추마취로 인해 내것 아닌 내것이 된 하반신 때문이다. 그렇게 자그마치 12시간을 꼼짝달싹 못하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준비하지 않은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런 짐꾸러미가 없었고 핸드폰, 전자담배, 지갑이 전부였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또하나는 금식이었다. 난 수술이후 12시간 동안 한번의 소변을 봤다. 하체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손이 팬티에 닿았을 때 느껴진 축축함, 소변으로 추정했다. 소변을 본 정확한 때는 모르겠지만 난 앞에서 말했듯 12시간을 꼼짝달싹 못했다. 그사이 소변을 봤다. 12시간은 젖은 팬티가 마르기에 충분히 지루하고 갑갑한 시간이었다.
수술전 A형이 와서 병원에 주차된 자가를 이동시켜주고 몇가지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갔지만 그것은 수술전 필요한 것들이었고 정작 중요한 건 수술후였다. 그래서 수술 다음날 새벽 1시 쯤 퇴근을 하는 B에게 부탁을 해 우리 집에 들러 별것 아닌 것들을 가져오게 했다. 팬티와 세면도구. 그리고 그날 오전 A형이 다시와서 수저와 수건, 주사바늘 등등 별것 아닌 몇가지를 더 채워주고 갔다. 정말 별것 아닌 것들이다. 그렇지만 난 이 별것 아닌 것을 B와 A형이 가져다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인터넷 쇼핑을 통해 구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척이나 힘들게 지냈을 거다. 비록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그것들의 쓰임새에 놀랐고 나의 벗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메고 온 행낭의 가격은 감정하기 어려웠다.
수술전 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난 효자가 아니라 부모가 나를 걱정할 것이 걱정돼 알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나 때문에 부모가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와서 간병하는 것이 싫었다. 지루하게 내 옆에 붙어 있을 부모를 생각하니 답답했고 역지사지도 답답했다. 그런데 수술 후에 이 생각의 변함은 없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일단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이 몸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누군가 내 옆에 있어주면 커다란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난 부모를 부르지 않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발목 수술 좀 했다고 부모를 찾는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다.
난 확고한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정말 너무 사랑해서 몇 십년 아껴주고 헌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내 성격이 별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지속된다면 금세 짜증을 부리게 될 것이고 배우자에게 행복이 아닌 불행을 줄 것이다. 난 이 열린 결말을 굳이 그려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정말 비겁하게도 주변 환자들 옆을 지켜주는 배우자들을 보면서 문득 나도 결혼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비열한 생각이었다. 아재들에게 자주 듣던 말, “니가 혼자 사니까 밥을 못 먹고 다니는 거다. 얼른 결혼해라.” 그럴 때마다 난 “그럴거면 파출부를 고용하죠. ㅇㅇ님은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하셨어요?” 라고 답하곤 했는데, 그런 내가 간병인이 필요해서 결혼 생각이 들었다는 게 아닌가. 너무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번 계기로 나의 유연했던 비혼주의는 단단해졌다. 나의 더러운 속내를 보았으므로.
난 그동안 타인의 도움없이 혼자 사는 연습을 해왔고 또 도움없이 살아 왔다고 믿었다. 타인의 도움이 부담스럽고 갚아야 할 빚이 쌓이는 게 싫었다. 그렇지만 온전히 세상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도움을 받고 살되 그 도움을 가슴 깊이 새기기로 했다.
아파서 한 생각
수술 당일 내가 수술을 할 것이란 염두가 없었고 그래서 아무런 준비없이 수술실 침대에 누웠다. 척추 마취로 진행하려던 수술은 감춰지지 않는 통증으로 인해 예정에 없던 수면 마취에 이르게 했다. 잠에서 깨었을 땐 바퀴달린 침대에 누워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고 수술을 도왔던 의사의 보조인으로부터 아이코스를 건내 받았다. 담배가 무척 당겼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척추마취로 인해 내것 아닌 내것이 된 하반신 때문이다. 그렇게 자그마치 12시간을 꼼짝달싹 못하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준비하지 않은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런 짐꾸러미가 없었고 핸드폰, 전자담배, 지갑이 전부였다.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또하나는 금식이었다. 난 수술이후 12시간 동안 한번의 소변을 봤다. 하체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손이 팬티에 닿았을 때 느껴진 축축함, 소변으로 추정했다. 소변을 본 정확한 때는 모르겠지만 난 앞에서 말했듯 12시간을 꼼짝달싹 못했다. 그사이 소변을 봤다. 12시간은 젖은 팬티가 마르기에 충분히 지루하고 갑갑한 시간이었다.
수술전 A형이 와서 병원에 주차된 자가를 이동시켜주고 몇가지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갔지만 그것은 수술전 필요한 것들이었고 정작 중요한 건 수술후였다. 그래서 수술 다음날 새벽 1시 쯤 퇴근을 하는 B에게 부탁을 해 우리 집에 들러 별것 아닌 것들을 가져오게 했다. 팬티와 세면도구. 그리고 그날 오전 A형이 다시와서 수저와 수건, 주사바늘 등등 별것 아닌 몇가지를 더 채워주고 갔다. 정말 별것 아닌 것들이다. 그렇지만 난 이 별것 아닌 것을 B와 A형이 가져다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인터넷 쇼핑을 통해 구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물건이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척이나 힘들게 지냈을 거다. 비록 별것 아닌 것들이지만 그것들의 쓰임새에 놀랐고 나의 벗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메고 온 행낭의 가격은 감정하기 어려웠다.
수술전 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난 효자가 아니라 부모가 나를 걱정할 것이 걱정돼 알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나 때문에 부모가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와서 간병하는 것이 싫었다. 지루하게 내 옆에 붙어 있을 부모를 생각하니 답답했고 역지사지도 답답했다. 그런데 수술 후에 이 생각의 변함은 없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일단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이 몸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누군가 내 옆에 있어주면 커다란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난 부모를 부르지 않았다. 나이 서른이 넘어 발목 수술 좀 했다고 부모를 찾는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다.
난 확고한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는다. 내가 정말 너무 사랑해서 몇 십년 아껴주고 헌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내 성격이 별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난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과의 결혼생활이 지속된다면 금세 짜증을 부리게 될 것이고 배우자에게 행복이 아닌 불행을 줄 것이다. 난 이 열린 결말을 굳이 그려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정말 비겁하게도 주변 환자들 옆을 지켜주는 배우자들을 보면서 문득 나도 결혼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비열한 생각이었다. 아재들에게 자주 듣던 말, “니가 혼자 사니까 밥을 못 먹고 다니는 거다. 얼른 결혼해라.” 그럴 때마다 난 “그럴거면 파출부를 고용하죠. ㅇㅇ님은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하셨어요?” 라고 답하곤 했는데, 그런 내가 간병인이 필요해서 결혼 생각이 들었다는 게 아닌가. 너무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번 계기로 나의 유연했던 비혼주의는 단단해졌다. 나의 더러운 속내를 보았으므로.
난 그동안 타인의 도움없이 혼자 사는 연습을 해왔고 또 도움없이 살아 왔다고 믿었다. 타인의 도움이 부담스럽고 갚아야 할 빚이 쌓이는 게 싫었다. 그렇지만 온전히 세상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정도의 도움을 받고 살되 그 도움을 가슴 깊이 새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