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결혼까지 생각하는 현 남친의 어린시절

답답201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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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는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검소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주변에 적이 없고 어른들께 예의도 발라요.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참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라

 

가끔씩 그때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올라와서 힘들어할때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얘기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주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남자친구 가정에 또 일이 좀 있어서 남자친구가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동안 제가 해 왔던 대로 옆에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저에게 털어놓는 것 만으로 부족한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씁니다.

 

 

여러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 만으로도

가슴에 답답하게 맺힌 게 좀 풀어질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그런걸 잘 못 쓰겠다길래,

 

오빠가 겪으며 살아온 일들을 제가 대신 오빠 입장에서 적어보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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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임신한 상태에서 엄마와 아빠는 이미 이혼을 결정하였다.

나를 낳자마자 엄마는 떠났다.

 

아빠는 갓 태어난 나를 데리고 친할머니를 찾아갔다.

그 때 아빠는 28살이었다.

 

 

 

어릴 적 집의 재정상태는 입에 풀칠도 못 할 만큼 궁핍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땅에 집을 지어 세를 주었고 아빠는 공무원이었다.

 

 

 

 

 

 

 

-네 살-

 

 

 

 

아빠가 만나는 여자를 집에 데려왔다.

아빠, 그 여자, 나, 할머니 이렇게 4명이 함께 살게되었다.

 

그 여자는 옥상으로 나를 자주 끌고 갔었다.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지만 좋은 기억이 아닌건 확실하다.

 

 

그 여자는 나에게 '사리돈'이라고 불렸던 진통제를 자주 먹였다고 한다.

 

 

옆 집 할머니가 몇 번 목격하시고 우리 할머니에게 이야기 해주셔서

그 여자와 할머니가 엄청 크게 싸웠었다.

 

 

어른이 되어서, 어느날 문득 생각이 떠올라 알아보니

사리돈은 15세 이상만 복용하게 되어 있었던 진통제였다.

 

 

그래도 그 여자는 계속 같이 살았다. 아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마 후,

 

그 여자와 아빠는 노름을 하다가 사채빚이 불어나 집을 날려먹었다.

그 일과 함께 그 여자는 떠났고 우리는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여덟 살-

 

 

 

 

 

아빠가 둘째 고모 이름으로 몰래 돈을 빌렸다.

고모는 그 사실을 알고 아빠 직장인 구청에 찾아가서 난리를 쳤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아빠는 쪽팔려서 못 다닌다며

할머니께 공무원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건 안 된다며 말렸고 

어느 날 할머니와 아빠가 그 일로 또 싸우던 도중에

 

아빠는 아빠 방 이불에 불을 질렀다.

 

 

할머니가 졌다.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건데 아빠는 처음 건축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퇴직한 이후에도 노름을 끊지 못해서

할머니랑 아빠는 주기적으로 일주일에 2-3 번씩 심하게 싸웠는데 그 때마다 집안은 난리가 났다.

 

 

세 식구가 사는 그 작은 집에서 엄청난 고성이 오고갔고 할머니는 우셨다.

 

나도 밤마다 이불 속에서 울기 일쑤였다.

 

 

아빠는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욱하는 다혈질인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드라마 보며 드라마 내용을 욕하시는 것에도 화를 내고

내가 3학년 때 공부를 안 한다는 이유에도 화를 내며 나를 때렸다.

 

 

어느 날은 아빠가 할머니랑 싸우다가 내 앞에서 농약을 마셨다.

 

119가 와서 아빠는 실려갔다.

 

아빠는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다 낫지도 않은 채로 몰래 도망을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빠 사업은 망했다.

 

카드빚으로 인해 열 두살 때 즈음 압류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런 것들은 막내 고모가 아빠 대신 해결했다.

 

 

 

 

망하고 난 뒤에 아빠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일본의 호텔에서 일했다.

아빠는 1년 반 정도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었다.

 

 

 

 

할머니랑 단 둘이 지내던 그 시기는 내 어린 인생에 얼마 안 되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중학교 시절-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와 원자력발전소 건설장에서 월급제 노가다로 돈을 벌었다.

 

할머니는 아빠가 보내주는 돈을 꼬박꼬박 모으셨다.

 

 

IMF로 발전소 건설일을 못하게 되자

 

아빠는 그간 할머니가 모아 둔 천만원을 가지고 영덕대게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곧 망했다.

 

아빠는 다시 정체불명의 사업을 시작하며 사무실도 내고 하였지만

 

 

그 이후 고등학교 시절 내내 집에 보내온 생활비는 없었다.

 

무슨 돈으로 사업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빠는 계속 주변에서 돈을 빌렸던 것 같다.

 

 

 

다행히 나와 할머니는 

 

동에 있는 장학회에서 주는 장학금, 학교에서 주는 복지 상품권 등과

 

주변으로부터 생활비를 꾸어가며 근근히 생활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할머니는 주변에 생활비를 꾸러 다니셨지만

 

이 때는 그 어느때 보다도 정말 돈이 없어서 아빠와 할머니는 더 많이 싸우셨다.

 

 

빌려간 생활비를 안 갚는다는 문제로

우리 할머니는 옆집 할머니와 머리끄댕이 잡고 싸우기도 하셨다.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내 멘탈도 나가기 시작한 것 같다.

 

독서실에서 호흡이 가빠지고 불안한 생각에 잠시도 앉아있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3년 내내 불면증과 우울증 등의 정서불안 장애로 시달렸다.

 

 

공부를 거의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반에서 4~5 등은 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다.

 

 

 

학교 선생님들은 나에게 '하면 잘하는 놈이 대체 왜 공부를 안하냐.'고 하셨다.

 

 

 

 

 

 

 

 

-수능날-

 

 

 

 

난 참 운도 없었던 놈인 것이, 

 

 

 

수능날 교문 앞에서 따뜻한 녹차를 나눠줬다.

 

아주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건데 녹차를 마시면 불안을 줄여준다던 말이 떠올라

그 자리에서 녹차를 막 마셨다. 한 500ml는 마신 것 같다.

 

 

 

 

그리고 첫 시간, 

 

언어영역을 푸는데 소변이 너무 급했다.

 

시험 시간에 화장실을 갈 수는 없으니 참고 풀다가

평소 1등급 당연히 받던 언어영역 점수를 50점이나 깎아먹었다.

 

 

 

 

최종 성적은 전국 상위 18%였다.

 

 

 

이 성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학은 갈 수가 없었다.

 

 

 

집안 환경 탓인지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기 때문에

 

 

가장 원했던 것은 취업이 안정적인 교대였으며

돈이라도 잘 버는 한의대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재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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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너무 기네요.. 편을 나누어서 써야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