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이트 게시판을 즐겨 찾는 네티즌이지만, 시친결 방에 들어와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전 아직 미혼이지만..저희 엄마의 시댁인 저희 할머니댁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독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글들을 주욱 읽다보니까 저 역시 너무 답답해서요.. 엄마를 대신해서 하소연 좀 하렵니다. 할머니는 아주 예전 풍습대로 15살에 민며느리로 할아버지께 시집을 오셨죠. 3년 간은 각방을 쓰시다가 18살이 되는 해에 합방을 하셨다고 해요. (저도 이건 모르던 사실이었는데, 그때의 풍습이 그 동네의 모든 민며느리들이 커다란 집의 한방에 모여 잠을 같이 잤다고 하더라구요. 총각들도 다른 큰 집의 한방에서 모여자구요^-^) 그러고 20살에 저희 큰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그 밑으로 5살 차이나는 저희 아버지, 2살 차이의 작은 아버지, 큰고모, 작은 고모.. 예전으로 치면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5남매를 두시게 되었지요. 엄한 노할머니 밑에서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대요. 유난히 할머니를 좋아했던 제게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해 주시는 중에, 사이사이 할머니께서 겪으셨던 맵디 매운 시집살이 얘기를 해주시더라구요. 부유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노할아버지 덕분에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고, 다행이 첫 자식이 아들인지라 그 맵던 시집살이도 조금은 누그러 졌다구요. 둘째도 역시 아들이라 노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셨는데, 셋째 아들, 즉 지금의 제 작은 아버지를 낳고 얼마 있지 않아 큰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큰 아버지가 9살 때, 얼음을 지치면서 놀다가 그만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날카로운 얼음에 다리가 거의 절단이 되고 만거죠. 여린 아이의 뼈와 살인지라 그러했나 봅니다. 얼마전 오늘의 톡에 오른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할머니 댁은 차 한대 다니지 않는 아주 아주 시골이었습니다.(지금도 그러하구요) 병원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무작정 큰아버지를 들쳐업고, 보자기로 질끈 동여매어 대구의 큰 병원으로 가셨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다리를 절단하여 수술을 하고 다시 봉합하였기 때문에 지금 큰아버지께서는 한 쪽 다리가 다른 쪽에 비하여 10센티 가량 짧으십니다. 엉덩이 부근에도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함몰 흉터가 있으시구요.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노름에 빠지셨답니다. 하나도 아닌 세 아들을 돌보시면서 생계를 책임져야하셨던 할머니의 고생은.. 정말 구구절절하답니다. 게다가 또 고모를 임신하셨기 때문에 그 입들을 다 책임질 수 없으셨던 할머니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실 수 밖에 없었죠. 그건 바로 둘째 아들, 즉 제 아버지를 양자로 보내기로 하신 겁니다. 차마생판 남의 집에 양자로 들일 수가 없어서, 부유했던 큰 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보내셨다구요.. 몸이 불편한 첫째는, 단지 그 이유 뿐만이 아니라 장손이기때문에 당연히 보낼 수 없었고.. 셋째는 너무 어렸다고.. 네 아버지가 정이 안가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제게 변명아닌 변명을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이해를 못했겠습니까.. 제가 할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당연히 둘째를 양자로 보냈을 겁니다.. 다행히 몇년이 흘러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지자, 할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 겪으셨을 무수한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물질은 풍요했을지라도.. 얼마나 많이 숨어서 우셨을지.. 그 많은 일들을 어찌 감당하셨을지.. 아빠의 12살 적 사진을 보면, 남들 다 여름 옷 입었을 때 겨울 옷 입은 아빠의 모습이 눈에 확 띕니다. 옷이 없어도.. 아무리 더워도.. 여름 옷 사달라는 말씀을 못하셨겠지요. 아들이 없는 집에 양자로 보낸 것도 아니고.. 단지 생계유지를 위해 그 드센 사촌들 틈바구니에 밀어넣으신 거니까요. 그 이후로 점차 할아버지께서 노름에서 손을 떼셨고, 할머니와 함께 부지런히 일하셔서 자식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큰 아들이라 대학에 당연히 보내줬고.. 셋째 아들은 운동에 소질이 있었기에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여보내셨습니다. 저희 아빠.. 미술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공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셨고.. 미술대학에 대한 꿈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하지만 내색 없이 고등학교 졸업 직후에 바로 군대를 다녀 오시고, 22살 나이에 방직 공장에 취직하셔서 열심히 일하고, 그 월급 고스란히 할머니 댁에 갖다 드렸다고 해요. 그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특별한 일을 하신 것 아니니까요.. 그 시절에는 누구나 남매 중 한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해야했고, 몸이 불편하신 큰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께서 장남노릇을 해야만 했던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보니, 제 때 결혼을 하시지 못하셨고 할머니께서는 전전긍긍하실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중매로 큰어머니와 만나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느지막히 결혼을 하셨고, 그 때까지 결혼을 미루시던 엄마와 아버지는 일년 쯤 지난 후 식을 올리셨다고 합니다. 손주도 물론.. 큰아버지께서 먼저 자식을 낳아야한다며 저희 부모님께서 피임을 하셨다구요..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사촌오빠가 태어났고, 큰엄마께서는 바로 연년생으로 사촌언니를 낳으셨습니다. 사촌언니가 태어난 후 약 한달 뒤 제가 태어났구요. 이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줄줄이 손자 손녀가 태어나고, 재산도 점점 불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터 저희 엄마가 섭섭하게 여기시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지요. 장사를 하시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여 작은 건어물가게를 성공으로 이끄셨고, 그 결과 지금은 형제 중에 가장 부유하게 살고 계신답니다. 저희 아버지, 평생을 직장 생활 하시고 이제 정년을 바라보는 쉰하나가 되셨구요.. 작은 아버지 역시 수도권에서 직장 생활 하시면 저희보다 더 잘 사십니다. 제일 처음의 문제는 제가 몸이 약하다는 거였습니다. 불과 한달 차이인 사촌언니에게 매일 두들겨 맞고 울고 다녔으니까요. 마음 약한 우리 엄마.. 말은 못하고 애꿎은 저만 혼내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샘 많고, 영악한 사촌 언니에게 매번 무시당하고.. 저도 그런 언니에게 번번히 제대로 한 번 대들지도 못하고 숨어서 울고 그랬지요.. 두번째 문제는 큰어머니의 태도였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명절 때도 오는 둥 마는 둥.. 간혹 오셔서도 "아~ 나 피곤해~ 장사해서 밥 벌어먹고 살기 정말 힘들다~" 이러시면서 부엌 한 가운데 벌렁 드러누우시고.. "둘째가 음식 잘하니까 내가 옆에서 알짱대면 괜히 방해만 되지? 그냥 자네가 알아서 다해~" 이러시고는 코 골면서 주무십니다. 어린 제가 봐도 정말 너무하시다 싶더군요. 밥 다 먹으신 후에도 설거지 한 번 안하시구요.. 다시 주무십니다. 게다가 자신이 건어물가게 하시면서도 그 싸디 싼 멸치 대가리 하나 안 가져 오십니다. 그러고는 엄마가 사오신 갈비가 질기다며 "우리 동네 정육점 중에 고기 연한 곳 있는데.."이러십니다. 세번째 문제는 그런 큰 어머니의 태도를 방관하는 할머니였습니다. 언제나 큰 며느리에게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인 할머니..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들어와도 그냥 대자로 누워 뻗어있는 며느리에게 "너 피곤할테니 그냥 누워쉬어라"는 말씀은.. 그럼 둘째 며느리는.. 다른 형제들을 위해 양자로 가고.. 대학을 포기한.. 진짜 장남 노릇한 둘째 아들의 각시는요.. 안 안쓰러우신 건지.. 언제나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와서 혼자 온갖 음식 다하고, 청소 다하는 둘째 며느리는요.. 4박 5일 동안 그 큰 집안일 혼자 다 하는 둘째 며느리는요.. 안 피곤하다고 여기시는 건지.. "수고했다"는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은 둘째며느리의 마음은 왜 몰라주시는 건지.. 그리고 네번째 문제..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하지만, 우연찮게도 저 역시 미술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께서 교사생활 20년 만에 이런 아이는 처음 보신다며 저희 엄마께 전화까지 주셨지만.. 넉넉치 않은 살림에 제게 미술 공부는 무리였죠.. 선생님께 전화가 온 날 밤.. 아빠께서 술을 드시고 제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의 약한 모습을 본 날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이런 일을 겪는 아빠의 마음도 편치 않다며.. 돈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은 내 자식에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빠의 능력이 이것 밖에 안되니 용서하라고.. 이런 문제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다 아셨지만, 전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더라구요. 물론 아빠 엄마도 결혼해서 수십년이 흘렀는데 이런 문제로 할아버지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아 하셨지만요.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큰 아버지가 자동차를 바꿔야 하신다고 하자 바로 천만원을 내놓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10명이 넘는 손자 손녀를 통틀어 저를 제일 이뻐하시지만, 막상 그런 일이 있자 바로 열외대상이더군요. 그래요.. 둘째 아들의 딸이니까요..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미술반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학원비는 못내주시지만, 재료비 정도는 대 주실 수 있다시며..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셨지요.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한상궁을,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신익필 의관을 꼭 닮으셨더랍니다. 외모도 성격도 가르치시는 스타일도 말이예요. 생판 남도.. 이렇게 제게 도움을 주시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스케치북 한 권 받아본 일이 없답니다. 이 부분이 제가 제일 속상한 부분이기도 하고, 뿌듯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가 교사의 길을 택했으니, 그 분들의 사랑을 저와 같은 다른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니까요.. 아.. 얘기가 샜네요^-^;; 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습니다만.. 엄마는 노친네가 시골에서만 사셔서 센스가 없다고 하시며 그냥 웃고 넘기십니다. 다행히 고모들은 언니 마음 다 안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고모들마저 없었으면 엄마 마음은 정말 삭막해졌을 겁니다. 아, 세째 며느리는 뭐하냐구요. 울 작은 엄마, 그냥 하릴 없이 웃는 게 일입니다. 너무 사람이 좋다고나 할까요. 정말 작은 엄마만큼 낙천적인 사람 처음 봤습니다 ㅎㅎ 저희 엄마가 "셋째야, 고구마 전 좀 부쳐" 라고 하면 "네, 형님" 그러시고는 방글방글 웃으시면서 고구마 씻는데 한시간, 후라이팬 찾아서 닦는데 삼십분, 고구마 써는데 삼십분.. 귀엽습니다. 어리버리 여왕이시지요^-^ 일은 잘 못하시지만, 언제나 열심히 하시려는 모습이 좋아서 엄마가 좋아하신답니다. 쿠훗..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난다는데 ㅡ_ㅡ;; 냄새난다고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도 들어오지 않는 큰 손주.. 제 사촌오빠.. 경북대 다니다가, 적성에 안맞는다고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사경고 두 번 받았구요, 휴학도 밥먹듯이 해서 올해 26인데 이제 간신히 2학년 마쳤습니다. 그런 오빠.. 공무원 시험 책 값 대주신다고 할아버지께서 제게 물으시네요. 그런 곳 학원, 학원비랑 책값이 얼마나 하냐고.. 물론 제가 작년에 임용고시 준비를 해서 잘 알고, 그런 것 오빠한테 직접 묻기 어려우셔서 제게 물어보셨으리라는 거 잘 압니다. 제가 편해서 그러셨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오빠 입학했을 때는 300만원 주시고.. 제가 대학 입학했을 때는 100만원 주시더니(저 역시 도(道)이름 붙은 국립대 출신입니다).. 저 서울로 학원다닐 때에도 시험에 붙어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달라는 말씀 뿐, 차비 만원도 쥐어주시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큰 아들의 아들에게는 학원비를 내어주시겠다네요. 그렇게 해도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안하는 그런 손주에게요.. 엄마는 자신에게 대해지는 그런 차별과 수모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저한테 그러시는 건 정말 싫으시다고.. 너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잘할 필요 없다고.. 속상해서 그러십니다. 재작년에 할머니 위암수술 받으셨을 때, 한달 넘게 모시고 다녔던 둘째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고맙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시면서.. 얼굴 한번 들이밀지 않았던 큰 아들과 큰 며느리에게는 어찌 그리 관대하신건지.. 에휴.. 할머니 댁에 가서 제가 설거지라도 한 번 할라치면 저희 엄마 펄쩍 뛰십니다. 하지 말라고.. 네가 왜 하냐고.. 그거 보시던 큰 엄마, "왜, 쟤도 자취경력 2년 넘으니까 설거지 잘하겠네~ 하라 그래~" 그러시면서 설거지 하고 있는 제 등뒤에 와서는 "거봐 잘하네, 자네 딸 손 거칠어질까봐 안시키려는 거야? 얘, 더 박박해라!" 그런 큰 어머니 딸.. 무슨 패션 쇼 하러 시골집에 옵니까. 있는 팔찌, 없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 다 하고, 반지는 양 손에 세 네개씩 끼고, 길게 기른 손톱에 색색깔 매니큐어 칠해서 설거지 못한답니까. 손톱에 고기 낄까봐 그 쉬운 동그랑땡 하나 못만든답니까. 엄마랑 저 어이없어 웃고 맙니다. 참다 못한 고모가 뒤에서 한마디 하시면, 홱 돌아서서 방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시구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 간간히 속상해하시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정말 효자시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 정도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구.. 그렇게 생색내고 싶으냐구.. 저희 집은 청주, 할아버지 댁은 구미입니다. 한달에 두번 꼭꼭 방문 하시죠. 매번 사골이나 소꼬리, 옥매트, 가스오븐렌지 등등을 사가지고 가시구요. 임파선 부종으로 고생하시는 엄마.. 온몸이 아프니 그렇게 옥매트 하나 장만하자고 석달 넘게 아빠를 졸라댔지만, "아직 너희 엄마는 젊어!" 이 소리로 일축해 버리신답니다. 전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지만, 이 부분 만큼은 아버지가 싫습니다. 부모께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평생 반려자인 내 아내를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왜 "수고했어, 미안해, 우리 부모님한테 잘하는 만큼 내가 더 잘할께" 이 말 한마디를 못하시는 걸까요. 아니, 안 하시는 걸까요. 아빠가 그러신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알아주시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할아버지 할머니께 하는 것 반만 하면..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을텐데 말이예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 결혼이란 걸 하기 싫어졌습니다. 장남한테 시집가도 제 동서들이나 시누이들한테 못할짓 하는 것 같아 싫구요.. 차남한테 시집가면 엄마랑 똑 같을 것 같구요. 제사밥 챙겨주는 첫 손주가 제일이지,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둘째나 셋째 자식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속담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로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설에 할머니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제게 던지시더라구요.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러분, 할머니의 이 말씀, 좋은 의미로 하신 거 아니예요. 쩝.. 입맛에 맞는 손주가 하필이면 딸이니.. 손주 덕 못보신다는 의미랍니다. "저건 시집가면 그만이야.. 잘해 줄 필요 없어" 이런 의미지요. 그래도 세상에 저를 있게해주신 분들이니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습니다. 이런게 핏줄이 땡기는 건지.. 그렇게 미우면서도 아프시다면 걱정부터 덜컥 되고.. ㅎㅎ 저희 엄마가 들으시면 서운하시겠죠. 제가 독신을 선언한 이후부터 엄마께서는 다 자신 탓이라며 속상해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제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부모님이 안계시고, 형제가 없고, 제가 자식을 안낳을 거라는데 동의하면 모를까요.. 여러 님들이 보시기에 지레 겁먹고 결혼 안한다는 제가 철이 없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제 자식이 저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전 정말 죽고 싶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일인지.. 제가 겪은 일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친결방이 저와 같은 얘기가 아닌, 우리 시어머니 너무 좋아요~ 우리 시누이 너무 이쁘지 않아요? 이런 얘기들로 가득해지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전 아직 미혼이지만..이런 일들 때문에 독신주의자가 되었답니다.
안녕하세요^-^
네이트 게시판을 즐겨 찾는 네티즌이지만, 시친결 방에 들어와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랍니다.
전 아직 미혼이지만..저희 엄마의 시댁인 저희 할머니댁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 독신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글들을 주욱 읽다보니까 저 역시 너무 답답해서요..
엄마를 대신해서 하소연 좀 하렵니다.
할머니는 아주 예전 풍습대로 15살에 민며느리로 할아버지께 시집을 오셨죠.
3년 간은 각방을 쓰시다가 18살이 되는 해에 합방을 하셨다고 해요.
(저도 이건 모르던 사실이었는데, 그때의 풍습이 그 동네의 모든 민며느리들이 커다란 집의 한방에 모여 잠을 같이 잤다고 하더라구요. 총각들도 다른 큰 집의 한방에서 모여자구요^-^)
그러고 20살에 저희 큰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그 밑으로 5살 차이나는 저희 아버지, 2살 차이의 작은 아버지, 큰고모, 작은 고모..
예전으로 치면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5남매를 두시게 되었지요.
엄한 노할머니 밑에서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대요.
유난히 할머니를 좋아했던 제게 이런 저런 옛날 얘기를 해 주시는 중에, 사이사이 할머니께서 겪으셨던 맵디 매운 시집살이 얘기를 해주시더라구요.
부유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노할아버지 덕분에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고,
다행이 첫 자식이 아들인지라 그 맵던 시집살이도 조금은 누그러 졌다구요.
둘째도 역시 아들이라 노할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셨는데,
셋째 아들, 즉 지금의 제 작은 아버지를 낳고 얼마 있지 않아 큰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큰 아버지가 9살 때, 얼음을 지치면서 놀다가 그만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날카로운 얼음에 다리가 거의 절단이 되고 만거죠.
여린 아이의 뼈와 살인지라 그러했나 봅니다.
얼마전 오늘의 톡에 오른 제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할머니 댁은 차 한대 다니지 않는 아주 아주 시골이었습니다.(지금도 그러하구요)
병원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래서 무작정 큰아버지를 들쳐업고, 보자기로 질끈 동여매어 대구의 큰 병원으로 가셨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다리를 절단하여 수술을 하고 다시 봉합하였기 때문에 지금 큰아버지께서는 한 쪽 다리가 다른 쪽에 비하여 10센티 가량 짧으십니다.
엉덩이 부근에도 제대로 앉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함몰 흉터가 있으시구요.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노름에 빠지셨답니다.
하나도 아닌 세 아들을 돌보시면서 생계를 책임져야하셨던 할머니의 고생은.. 정말 구구절절하답니다.
게다가 또 고모를 임신하셨기 때문에 그 입들을 다 책임질 수 없으셨던 할머니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실 수 밖에 없었죠.
그건 바로 둘째 아들, 즉 제 아버지를 양자로 보내기로 하신 겁니다.
차마생판 남의 집에 양자로 들일 수가 없어서, 부유했던 큰 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보내셨다구요..
몸이 불편한 첫째는, 단지 그 이유 뿐만이 아니라 장손이기때문에 당연히 보낼 수 없었고..
셋째는 너무 어렸다고.. 네 아버지가 정이 안가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제게 변명아닌 변명을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이해를 못했겠습니까..
제가 할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당연히 둘째를 양자로 보냈을 겁니다..
다행히 몇년이 흘러 집안 형편이 좀 나아지자,
할머니께서는 아버지를 다시 데려오셨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 겪으셨을 무수한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어린 나이에.. 물질은 풍요했을지라도.. 얼마나 많이 숨어서 우셨을지..
그 많은 일들을 어찌 감당하셨을지..
아빠의 12살 적 사진을 보면, 남들 다 여름 옷 입었을 때 겨울 옷 입은 아빠의 모습이 눈에 확 띕니다.
옷이 없어도.. 아무리 더워도.. 여름 옷 사달라는 말씀을 못하셨겠지요.
아들이 없는 집에 양자로 보낸 것도 아니고..
단지 생계유지를 위해 그 드센 사촌들 틈바구니에 밀어넣으신 거니까요.
그 이후로 점차 할아버지께서 노름에서 손을 떼셨고, 할머니와 함께 부지런히 일하셔서 자식들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큰 아들이라 대학에 당연히 보내줬고..
셋째 아들은 운동에 소질이 있었기에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여보내셨습니다.
저희 아빠.. 미술에 엄청난 재능이 있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공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셨고..
미술대학에 대한 꿈은 접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하지만 내색 없이 고등학교 졸업 직후에 바로 군대를 다녀 오시고, 22살 나이에 방직 공장에 취직하셔서 열심히 일하고, 그 월급 고스란히 할머니 댁에 갖다 드렸다고 해요.
그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특별한 일을 하신 것 아니니까요..
그 시절에는 누구나 남매 중 한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해야했고, 몸이 불편하신 큰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께서 장남노릇을 해야만 했던 것이 당연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큰아버지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보니,
제 때 결혼을 하시지 못하셨고 할머니께서는 전전긍긍하실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다 중매로 큰어머니와 만나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느지막히 결혼을 하셨고,
그 때까지 결혼을 미루시던 엄마와 아버지는 일년 쯤 지난 후 식을 올리셨다고 합니다.
손주도 물론.. 큰아버지께서 먼저 자식을 낳아야한다며 저희 부모님께서 피임을 하셨다구요..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사촌오빠가 태어났고, 큰엄마께서는 바로 연년생으로 사촌언니를 낳으셨습니다.
사촌언니가 태어난 후 약 한달 뒤 제가 태어났구요.
이 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줄줄이 손자 손녀가 태어나고, 재산도 점점 불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부터 저희 엄마가 섭섭하게 여기시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지요.
장사를 하시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하여 작은 건어물가게를 성공으로 이끄셨고, 그 결과 지금은 형제 중에 가장 부유하게 살고 계신답니다.
저희 아버지, 평생을 직장 생활 하시고 이제 정년을 바라보는 쉰하나가 되셨구요..
작은 아버지 역시 수도권에서 직장 생활 하시면 저희보다 더 잘 사십니다.
제일 처음의 문제는 제가 몸이 약하다는 거였습니다.
불과 한달 차이인 사촌언니에게 매일 두들겨 맞고 울고 다녔으니까요.
마음 약한 우리 엄마.. 말은 못하고 애꿎은 저만 혼내셨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샘 많고, 영악한 사촌 언니에게 매번 무시당하고.. 저도 그런 언니에게 번번히 제대로 한 번 대들지도 못하고 숨어서 울고 그랬지요..
두번째 문제는 큰어머니의 태도였습니다.
장사한다는 핑계로.. 명절 때도 오는 둥 마는 둥..
간혹 오셔서도 "아~ 나 피곤해~ 장사해서 밥 벌어먹고 살기 정말 힘들다~"
이러시면서 부엌 한 가운데 벌렁 드러누우시고..
"둘째가 음식 잘하니까 내가 옆에서 알짱대면 괜히 방해만 되지? 그냥 자네가 알아서 다해~"
이러시고는 코 골면서 주무십니다.
어린 제가 봐도 정말 너무하시다 싶더군요.
밥 다 먹으신 후에도 설거지 한 번 안하시구요.. 다시 주무십니다.
게다가 자신이 건어물가게 하시면서도 그 싸디 싼 멸치 대가리 하나 안 가져 오십니다.
그러고는 엄마가 사오신 갈비가 질기다며 "우리 동네 정육점 중에 고기 연한 곳 있는데.."이러십니다.
세번째 문제는 그런 큰 어머니의 태도를 방관하는 할머니였습니다.
언제나 큰 며느리에게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인 할머니..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들어와도 그냥 대자로 누워 뻗어있는 며느리에게
"너 피곤할테니 그냥 누워쉬어라"는 말씀은..
그럼 둘째 며느리는.. 다른 형제들을 위해 양자로 가고.. 대학을 포기한.. 진짜 장남 노릇한 둘째 아들의 각시는요..
안 안쓰러우신 건지..
언제나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와서 혼자 온갖 음식 다하고, 청소 다하는 둘째 며느리는요..
4박 5일 동안 그 큰 집안일 혼자 다 하는 둘째 며느리는요..
안 피곤하다고 여기시는 건지..
"수고했다"는 그 말 한마디가 듣고 싶은 둘째며느리의 마음은 왜 몰라주시는 건지..
그리고 네번째 문제..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하지만, 우연찮게도 저 역시 미술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께서 교사생활 20년 만에 이런 아이는 처음 보신다며 저희 엄마께 전화까지 주셨지만..
넉넉치 않은 살림에 제게 미술 공부는 무리였죠..
선생님께 전화가 온 날 밤.. 아빠께서 술을 드시고 제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의 약한 모습을 본 날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이런 일을 겪는 아빠의 마음도 편치 않다며..
돈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일은 내 자식에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빠의 능력이 이것 밖에 안되니 용서하라고..
이런 문제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다 아셨지만,
전혀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더라구요.
물론 아빠 엄마도 결혼해서 수십년이 흘렀는데 이런 문제로 할아버지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아 하셨지만요.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큰 아버지가 자동차를 바꿔야 하신다고 하자
바로 천만원을 내놓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10명이 넘는 손자 손녀를 통틀어 저를 제일 이뻐하시지만,
막상 그런 일이 있자 바로 열외대상이더군요. 그래요.. 둘째 아들의 딸이니까요..
저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내내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미술반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학원비는 못내주시지만, 재료비 정도는 대 주실 수 있다시며..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셨지요.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한상궁을,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신익필 의관을 꼭 닮으셨더랍니다.
외모도 성격도 가르치시는 스타일도 말이예요.
생판 남도.. 이렇게 제게 도움을 주시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께는 스케치북 한 권 받아본 일이 없답니다.
이 부분이 제가 제일 속상한 부분이기도 하고, 뿌듯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 제가 교사의 길을 택했으니, 그 분들의 사랑을 저와 같은 다른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니까요..
아.. 얘기가 샜네요^-^;;
뭐.. 이런 저런 일들이 많습니다만..
엄마는 노친네가 시골에서만 사셔서 센스가 없다고 하시며 그냥 웃고 넘기십니다.
다행히 고모들은 언니 마음 다 안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고모들마저 없었으면 엄마 마음은 정말 삭막해졌을 겁니다.
아, 세째 며느리는 뭐하냐구요.
울 작은 엄마, 그냥 하릴 없이 웃는 게 일입니다.
너무 사람이 좋다고나 할까요. 정말 작은 엄마만큼 낙천적인 사람 처음 봤습니다 ㅎㅎ
저희 엄마가 "셋째야, 고구마 전 좀 부쳐" 라고 하면
"네, 형님" 그러시고는 방글방글 웃으시면서 고구마 씻는데 한시간, 후라이팬 찾아서 닦는데 삼십분, 고구마 써는데 삼십분..
귀엽습니다. 어리버리 여왕이시지요^-^
일은 잘 못하시지만, 언제나 열심히 하시려는 모습이 좋아서 엄마가 좋아하신답니다.
쿠훗..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난다는데 ㅡ_ㅡ;;
냄새난다고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도 들어오지 않는 큰 손주..
제 사촌오빠..
경북대 다니다가, 적성에 안맞는다고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사경고 두 번 받았구요, 휴학도 밥먹듯이 해서 올해 26인데 이제 간신히 2학년 마쳤습니다.
그런 오빠.. 공무원 시험 책 값 대주신다고 할아버지께서 제게 물으시네요.
그런 곳 학원, 학원비랑 책값이 얼마나 하냐고..
물론 제가 작년에 임용고시 준비를 해서 잘 알고,
그런 것 오빠한테 직접 묻기 어려우셔서 제게 물어보셨으리라는 거 잘 압니다.
제가 편해서 그러셨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오빠 입학했을 때는 300만원 주시고..
제가 대학 입학했을 때는 100만원 주시더니(저 역시 도(道)이름 붙은 국립대 출신입니다)..
저 서울로 학원다닐 때에도 시험에 붙어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달라는 말씀 뿐, 차비 만원도 쥐어주시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큰 아들의 아들에게는 학원비를 내어주시겠다네요.
그렇게 해도 감사하다는 인사조차 안하는 그런 손주에게요..
엄마는 자신에게 대해지는 그런 차별과 수모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저한테 그러시는 건 정말 싫으시다고..
너도 할아버지 할머니께 잘할 필요 없다고.. 속상해서 그러십니다.
재작년에 할머니 위암수술 받으셨을 때, 한달 넘게 모시고 다녔던 둘째 아들과 며느리에게는 고맙다는 말씀 한마디 없으시면서..
얼굴 한번 들이밀지 않았던 큰 아들과 큰 며느리에게는 어찌 그리 관대하신건지..
에휴..
할머니 댁에 가서 제가 설거지라도 한 번 할라치면 저희 엄마 펄쩍 뛰십니다.
하지 말라고.. 네가 왜 하냐고..
그거 보시던 큰 엄마,
"왜, 쟤도 자취경력 2년 넘으니까 설거지 잘하겠네~ 하라 그래~"
그러시면서 설거지 하고 있는 제 등뒤에 와서는
"거봐 잘하네, 자네 딸 손 거칠어질까봐 안시키려는 거야? 얘, 더 박박해라!"
그런 큰 어머니 딸..
무슨 패션 쇼 하러 시골집에 옵니까.
있는 팔찌, 없는 팔찌 목걸이 귀걸이 다 하고, 반지는 양 손에 세 네개씩 끼고,
길게 기른 손톱에 색색깔 매니큐어 칠해서 설거지 못한답니까.
손톱에 고기 낄까봐 그 쉬운 동그랑땡 하나 못만든답니까.
엄마랑 저 어이없어 웃고 맙니다.
참다 못한 고모가 뒤에서 한마디 하시면, 홱 돌아서서 방 안으로 쏙 들어가버리시구요.
그리고 저희 아버지..
간간히 속상해하시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정말 효자시거든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그 정도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구.. 그렇게 생색내고 싶으냐구..
저희 집은 청주, 할아버지 댁은 구미입니다.
한달에 두번 꼭꼭 방문 하시죠. 매번 사골이나 소꼬리, 옥매트, 가스오븐렌지 등등을 사가지고 가시구요.
임파선 부종으로 고생하시는 엄마.. 온몸이 아프니 그렇게 옥매트 하나 장만하자고 석달 넘게 아빠를 졸라댔지만,
"아직 너희 엄마는 젊어!" 이 소리로 일축해 버리신답니다.
전 아버지를 정말 존경하지만, 이 부분 만큼은 아버지가 싫습니다.
부모께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평생 반려자인 내 아내를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요.
왜 "수고했어, 미안해, 우리 부모님한테 잘하는 만큼 내가 더 잘할께" 이 말 한마디를 못하시는 걸까요.
아니, 안 하시는 걸까요.
아빠가 그러신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알아주시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할아버지 할머니께 하는 것 반만 하면..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을텐데 말이예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정말 결혼이란 걸 하기 싫어졌습니다.
장남한테 시집가도 제 동서들이나 시누이들한테 못할짓 하는 것 같아 싫구요..
차남한테 시집가면 엄마랑 똑 같을 것 같구요.
제사밥 챙겨주는 첫 손주가 제일이지,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둘째나 셋째 자식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속담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로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설에 할머니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제게 던지시더라구요.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러분, 할머니의 이 말씀, 좋은 의미로 하신 거 아니예요.
쩝.. 입맛에 맞는 손주가 하필이면 딸이니.. 손주 덕 못보신다는 의미랍니다.
"저건 시집가면 그만이야.. 잘해 줄 필요 없어" 이런 의미지요.
그래도 세상에 저를 있게해주신 분들이니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습니다.
이런게 핏줄이 땡기는 건지..
그렇게 미우면서도 아프시다면 걱정부터 덜컥 되고.. ㅎㅎ
저희 엄마가 들으시면 서운하시겠죠.
제가 독신을 선언한 이후부터 엄마께서는 다 자신 탓이라며 속상해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의견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시 제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부모님이 안계시고, 형제가 없고, 제가 자식을 안낳을 거라는데 동의하면 모를까요..
여러 님들이 보시기에 지레 겁먹고 결혼 안한다는 제가 철이 없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만약 제 자식이 저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전 정말 죽고 싶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일인지..
제가 겪은 일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친결방이 저와 같은 얘기가 아닌,
우리 시어머니 너무 좋아요~ 우리 시누이 너무 이쁘지 않아요?
이런 얘기들로 가득해지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