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 margin: 5px 0px } 우리의 역사서가 오직 삼국사기 하나만 남아 있다는 것이매우 유감이다.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서라도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멀리해야 할 것이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모두 김부식,일연스님이라는영남출신의 고려인들이 작성한 책이다.영남출신답게 신라중심의 사관으로쓴 책이 우리가 가진최고오랜 역사서라니..그 책들을 보면 한마디로 가증스럽게 신라쪽으로 치우친역사가 기술되어있다. 예를들면..고구려가 최강의 강국으로서 그 전성기때나 쇠퇴기때나싸우면 많은 승리를 거두는 나라였거늘, 대 신라전에서는 승리한예가 거의 없게 기술되어져있다.1)난 솔직히 김유신의 낭비성싸움승리(629년)도 믿지못하겠다.그 낭비성이 칠중성이라고 추정되는데, 칠중성은 지금의중부이남에 있던성으로 , 서기550년경 신라전성기때의 영토보다 훨씬 이남에 있다.그러면 고구려가 평원왕이후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때 수당과전쟁을 하면서 , 뒤쪽배후의 신라를 압박하여 그많은 영토(거의 장수왕때의 형세)를 단숨에 회복했단 말인가..따라서 칠중성의 위치로 볼때.. 신라의 대고구려전..낭비성싸움의 승리는.. 역사의 왜곡이 아닐까2)또한 백제멸망후 662년의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시에(이는 연개소문의 패수대첩으로 일컬어지는 고구려의 승리)당나라군을 후원하기위해 .. 전문 쌀배달꾼인 신라군이당군의 군량지원을 위해 황해도쪽으로 진격해왔는데,당군의 방효태와 그 주력부대가 연개소문에 의해 몰살당하자겁먹은 신라군은 그대로 되돌아갔다.이는 확실히 신라군이 자기들 혼자서는 고구려와 싸울엄두를못내니 도망갔다는 반증이다.그렇지만 김부식과 일연은 여기서도 신라찬양을 부른다.즉 당군을 섬멸한 고구려군이 고구려 등뒤쪽으로 쳐들어오던신라군에게 보복하려 나섰는데..김유신의 지휘하에 철군작전을 하던 신라군이 추격해오던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안전하게 철수했다는 것이다.하여튼 이렇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승리를믿지못할만큼 과장하여 나타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없다.이말고도 고구려 백제와 싸우는 족족승리를 거두던 알천,이사부,김흠순,김인문 등등의 기록역시 과장이거나 신라찬양곡에 해당한다는 확신이 있다.고구려멸망시 신라가 그토록 큰 공을 세웠다면보장왕과 고구려유민20만이 , 신라로 끌려와야지당나라에 끌려갈리가 없다.백제역시 의자왕과 태자 풍 등과 귀족 장수등등 1만 3천이 당나라로 끌려갔다.이는 신라가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기록한것처럼용맹하게 주도적으로 승리를 거둔적이 없다는 증거이다.백제멸망시..소정방의 주력군이 이미 백강상륙후 사비성을 휩쓸때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고전하고 막혀있었으며고구려멸망시..신라군은 철저하게 주력이 아닌 조력으로서 쌀이나 배달하는 당군의 지원을맡는 예비대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
대조영,연개소문을 보면서 느낀 이것저것
매우 유감이다.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해서라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멀리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모두 김부식,일연스님이라는
영남출신의 고려인들이 작성한 책이다.
영남출신답게 신라중심의 사관으로쓴 책이 우리가 가진
최고오랜 역사서라니..
그 책들을 보면 한마디로 가증스럽게 신라쪽으로 치우친
역사가 기술되어있다.
예를들면..
고구려가 최강의 강국으로서 그 전성기때나 쇠퇴기때나
싸우면 많은 승리를 거두는 나라였거늘, 대 신라전에서는 승리한
예가 거의 없게 기술되어져있다.
1)난 솔직히 김유신의 낭비성싸움승리(629년)도 믿지못하겠다.
그 낭비성이 칠중성이라고 추정되는데, 칠중성은 지금의
중부이남에 있던성으로 , 서기550년경 신라전성기때의 영토
보다 훨씬 이남에 있다.
그러면 고구려가 평원왕이후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때 수당과
전쟁을 하면서 , 뒤쪽배후의 신라를 압박하여 그많은 영토
(거의 장수왕때의 형세)를 단숨에 회복했단 말인가..
따라서 칠중성의 위치로 볼때.. 신라의 대고구려전..낭비성
싸움의 승리는.. 역사의 왜곡이 아닐까
2)또한 백제멸망후 662년의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시에
(이는 연개소문의 패수대첩으로 일컬어지는 고구려의 승리)
당나라군을 후원하기위해 .. 전문 쌀배달꾼인 신라군이
당군의 군량지원을 위해 황해도쪽으로 진격해왔는데,
당군의 방효태와 그 주력부대가 연개소문에 의해 몰살당하자
겁먹은 신라군은 그대로 되돌아갔다.
이는 확실히 신라군이 자기들 혼자서는 고구려와 싸울엄두를
못내니 도망갔다는 반증이다.
그렇지만 김부식과 일연은 여기서도 신라찬양을 부른다.
즉 당군을 섬멸한 고구려군이 고구려 등뒤쪽으로 쳐들어오던
신라군에게 보복하려 나섰는데..
김유신의 지휘하에 철군작전을 하던 신라군이 추격해오던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안전하게 철수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렇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승리를
믿지못할만큼 과장하여 나타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없다.
이말고도 고구려 백제와 싸우는 족족승리를 거두던
알천,이사부,김흠순,김인문 등등의 기록역시 과장이거나
신라찬양곡에 해당한다는 확신이 있다.
고구려멸망시 신라가 그토록 큰 공을 세웠다면
보장왕과 고구려유민20만이 , 신라로 끌려와야지
당나라에 끌려갈리가 없다.
백제역시 의자왕과 태자 풍 등과 귀족 장수등등 1만 3천
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이는 신라가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기록한것처럼
용맹하게 주도적으로 승리를 거둔적이 없다는 증거이다.
백제멸망시..
소정방의 주력군이 이미 백강상륙후 사비성을 휩쓸때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고전하고 막혀있었으며
고구려멸망시..
신라군은 철저하게 주력이 아닌 조력으로서 쌀이나 배달하는 당군의 지원을
맡는 예비대에 불과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