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엔 천리장성이 존재 했다

gkmtv9927222007.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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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 margin: 5px 0px } 아직도 약간의 유적은 남아있습니다. 고구려엔 천리장성이 존재 했다

고구려는 631년에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가 와서 고구려가 지난 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고구려의 당에 대한 경계심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영류왕 14년(631년) 12월부터 보장왕 6년(647년)까지 16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성이다. 북단은 부여성(농안)으로부터 남단은 비사성까지로 연개소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연개소문은 이 성과 축조를 감독하면서 요동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여 정변에 성공,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등장시켜 독재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귀족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며 백제 의자왕과 연합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대당 강경책을 행사하였다.

〈봉천통지 奉天通志〉·〈회덕현지 懷德縣志〉에 기재된 천리장성 유적에 관한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삼황묘(三皇廟)와 동황화전자(東黃花甸子) 일대의 성벽은 그 너비가 6m, 높이가 2~3m 되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은 토축성으로 밝혀졌다. 한편 천리장성에는 성문·각루(角樓)·돈대(墩臺) 등과 같은 시설이 없는 것을 볼 때 일종의 보조시설에 불과한 것으로서 당나라 군대의 동진을 저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천리장성은 고구려 변경선 밖의 방어선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변경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놓은 형태로서 천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랴오허 강[遼河] 동쪽의 기존 성곽들은 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방어거점으로서의 구실을 했다.

즉, 이 천리장성은 기존의 성곽을 연결시켜 각개의 기존 성곽을 독립적인 방어 체계로 구축하였으며, 천리 장성의 핵심부는 요동성이다. 그리고 그 북방의 백암성과 남방의 안시성은 배후 산성으로서 고구려 수비를 책임지는 요충이다. 특히 요동성은 주몽의 사상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이 곳은 피차간에 빼앗길 수 없는 요충지로 여겼다. 예컨대, 612년 수 양제가 이끈 백만 대군의 첫 공격 목표도 요동성이었으며, 살 수 대첩으로 위축된 국력을 당이 사기를 회복하려고 병졸을 재집결시킨 곳도 그 곳이고, 676년에 안동 도호부를 옮긴 곳도 요동성이었다. 고구려의 요동성이 견고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위에 백암성(북쪽)과 안시성(남쪽)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사성의 현존 높이는 3-4m이며, 서쪽은 발해만이 보이고, 동쪽은 대련시가 있다. 고구려엔 천리장성이 존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