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넘은건 워마드가 아니다

한국남자역겨워201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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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마드는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대신 워마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만이 특수한 의도로 선택되어 사회적 물의로 부각될 뿐이다.

워마드 이용자들의 언어를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는지, 혹은 페미니즘이 아니어도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도를 넘은 것은 아닌지 언제나 과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그중 어느 것도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를 넘은 것처럼 보이는 워마드가 아니라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남성 중심 사회다.
도를 넘었다? 여기서 그 ‘도’는 무엇일까? ‘도’의 기준은 누가 언제 마련했을까? ‘도’를 보편적 차원의 인권으로 정의한다면 문제는 대단히 간단해진다.

 절대불변의 인권을 기준 삼아 행위의 정당성을 판별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개의 문장으로 서술될 뿐인 인권은 인간의 현실에 적용될 경우 그리 간단히 해석되지는 않는다.

서술되는 인권 자체보다, 누가 어떤 의도로 인권을 서술하는지, 그리고 그 서술이 결국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바로 그러한 사회적 맥락이야말로 기계적으로 서술되는 인권보다 더욱 사람들의 인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초로 ‘도’를 넘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그는 아마 약자였을 것이며, 강자들의 질서로 구축된 사회에 순종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장애인이거나, 성소수자거나, 노동자거나, 흑인이거나, 청소년이거나,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맨 처음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말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며, 그의 방식은 당연하게도 철저히 무시당하거나 짓밟혔을 것이다. 

더는 물러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을넘어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나아갔을 것이고 강자들은 그 방식을 ‘폭력’이나 ‘테러’로 규정했을 것이다.

유리창을 깬다. 건물을 부순다. 불을 지른다. 사람을 때린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삶을 망가뜨린다.재미있는 점은 이 명백한 ‘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가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폭력이 될 수도 있고 저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독립운동가들 중 위에 나열한 폭력 행위를저지른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들은 범죄자나테러리스트로 불리지 않는다.

이미 여성들은 아주 오래 전 참정권을 얻어내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남성들이 자다가도 펄쩍 뛸 만큼 요란한 폭력 행위를 저지른 바 있다.

과거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해외 페미니스트들의 거리 시위는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할 뿐인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시위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폭력적이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왜 더 온건한 방법을 택하지 않을까?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길을 막고 서서 구호를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이 대단히 과격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흘에 한 명 꼴로 여성이 데이트폭력으로 죽어 나가고 십여 분마다 한 건씩 성범죄가 벌어지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때려 부수지 않는 거리 시위는 대단히 온건한 것일 수도 있다.

도를 넘었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도’는 어디쯤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누구의 편에서 말하고 있는지, 누구의 권력에 복무하고 있는지, 누구의 삶을 외면할 수 있고 누구의 상처를 망각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기계적으로만 인권에 대한 문장을 읊어 대는 것보다 훨씬 더 누군가의 인권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