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

스컬리200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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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문화’ 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병두 의원과 우상호 의원에 대한 유감
최근 우리당의 민병두 의원께서 「동남아 한류 견문기」를 통해 “동남아의 한류는 길어야 5년 안에 끝날 수 있다”고 하면서 개선해야 할 문제점으로
▲ 단시간 내에 돈을 벌기 위한 상업적 한탕주의 가격정책 ▲ 현지 한국 드라마 에이전트 부재 ▲한류 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스타 프로모션의 부재를 꼽았다
라고 하더군요.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몇 달 전 역시 우리당의 우상호 의원께서는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성공을 통해 한류열풍을 이어가자”는 취지로 「송승헌 병역연기 탄원서」를 내기도 했죠. 결국 송승헌이 군대 가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있어서인지 “정책 결정자들의 문화적 인식에 한계를 느꼈다”고 얘기하셨더군요.
두 분 다 ‘한류열풍’이 오래 지속되고, 더 널리 퍼져서 우리 대한민국이 더 잘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하신 일들이겠죠. 그분들의 뜻은 이해하나, 다만 아쉬운 점은 문화를, 문화현상을 너무 문화적인 부분만 국한해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은 문화콘텐츠가 우수한 것이 ‘한류열풍’의 첫 번째 이유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류열풍’의 모든 원인을 문화콘텐츠에서만 찾고, 문화콘텐츠만 우수하면 ‘한류열풍’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한 쪽에만 치우친 시각이 아닌가 싶구요.
일반인도 아닌 우리당의 국회의원으로써 우리 대한민국을 리드해 나가야 할 사람으로써는 어딘지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불만에서, 그런 아쉬운 생각에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관객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던 한국영화(그때는 방화라고 불렀죠)가 어떻게 관객의 사랑을 받게 되었나 하는 점에 대한 제 생각을 얘기함으로써, 문화나 문화현상이 결코 문화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 ① - 경쟁의 도입 (사회제도적 측면)
80년대 후반 헐리우드 영화사의 ‘직배체제’가 도입되기 전까지는 국내 영화사가 열심히 한국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한국영화를 만드는 영화사에게만 외국영화의 수입권을 주는 정책을 실시했었습니다. 한국영화 1편 만들면 외국영화 1편 수입 허가해주는 식으로 말이죠. “한국영화 제작한데서 손해본 것을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벌충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좋은 취지이긴 하나, 결과는 ‘한국영화의 질적 저하’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배급할 경우 쉽게 돈 벌 수 있는데, 굳이 무리해서 한국영화 제작에 큰돈을 투입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최소의 제작비로 만들다 보니, 당연히 영화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구요.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그리고, 1988년 「위험한 정사(fatal attraction)」를 시작으로 헐리우드 메이져 영화사가 국내에 영화를 직접 배급하는 ‘직배체제’가 도입됩니다. 직배체제의 도입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고, 당시 국내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직배체제’의 도입에 적극 반대했죠.
「위험한 정사」를 상영 중인 극장에다 뱀을 풀어 놓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리고, 1990년 12월 「사랑과 영혼(the ghost)」의 성공 이후 직배체제는 국내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손쉬운 돈벌이였던 헐리우드 영화의 수입, 배급의 길이 막히게 된 국내 영화사들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영화사업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죠. 그 대안의 하나가 됐던 게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의 홍콩영화 수입이었고, 초기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으나, 결국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국내 영화사들에게 이제 남은 대안은 한국영화를 제대로 만들어서 헐리우드 영화와 한판 승부를 겨뤄 보던지, 아니면 영화사 간판을 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부터 한국영화는 질적으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헐리우드 영화보다 자국 영화의 관객점유율이 더 높은 몇 안되는 나라중 하나의 위치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존폐의 기로에 선 한국영화계는 1990년 「장군의 아들(서울관객 67만 명)」로 가능성을 확인한 이후 93년 「서편제(103만 명)」, 「투캅스(86만 명)」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크게 얻게 되구요.
이후 96년 「은행나무침대(45만 명)」, 97년 「접속(67만 명)」, 98년 「약속(70만 명)」 등 연이은 성공사례를 만들어 내게 되구요. 드디어, 199년 「쉬리(243만 명)」의 서울관객 200만 명 돌파로 한국영화의 ‘블록버스터화’가 가능함을 입증하구요. 이후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251만 명)」, 2001년 「친구(267만 명)」로 기록경신을 계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속한 한국영화는 2004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로 관객 1000만 명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는 찬바람이 부는 광야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계화와 개방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결국 광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무조건 문을 걸어 잠그고 보호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 ② - 생활수준의 향상 (경제적 측면)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생활수준의 향상 때문입니다. 사실은 한국영화 뿐만 아니라 전체 영화산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라고 해야 정확하긴 할텐데요. 어쨌든 국민소득의 증가가 영화산업, 한국영화산업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985년 ~ 1989년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3저 호황 : 달러약세, 유가약세, 낮은 금리)’을 기록하게 됩니다. 임금도 크게 오르게 되구요. 1인당 gdp도 5,000불을 넘기게 됩니다. 이후 1995년 1만 불을 넘기게까지 되구요.
먹고 살기 힘들 때에야 ‘문화’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 먹고 살게끔 되면 그 때부터 ‘삶의 질’에도 관심을 갖게 되구요.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생활을 향유하고자 하게 되죠. 80년대 말부터 삶의 질과 문화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마이카 붐’, ‘피자 등 외식산업의 성장’, ‘해외여행 붐’등이 이때 같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영화시장의 전체규모가 커지고, 영화시장의 전체규모가 커짐과 맞물려 한국영화에 대한 투자도 커질 수 있었고 이것이 한국영화의 질적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이죠.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 ③ - 민주화 (정치적 측면)
한국영화가 사랑받게 된 이유!故 이만희 감독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년)」, 「만추 (66년)」, 「삼포 가는 길 (75년)」 등 한국영화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만희 감독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고통받으신 적이 있는데요. 이만희 감독이 만드신 「7인의 여포로」라는 전쟁영화에 중국군이 붙잡힌 우리 여병사를 강간하려고 할 때, 북한군이 나타나서 구해주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면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잔뜩 얻어맞았다고 하더군요. 전체적인 영화 내용은 반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장면이 북한군을 인간으로 (짐승이 아닌) 묘사했다고 해서 끌려가서 얻어맞는 그러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 「애마부인」, 「무릎과 무릎사이」, 「어우동」, 「매춘」 등의 한국 에로영화가 그나마 성공을 거둡니다. 모든 영화를 사전검열하고, 영화의 장면 하나, 영화의 대사 하나 감시하던 정부에서 그나마 ‘성(性)’에 관련된 검열잣대를 다소 느슨하게 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었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학문과 예술은 무엇보다도 자유롭고 관대한 사회분위기 속에서만 발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였던 이탈리아의 소도시들이 그러했고, 17세기 유럽의 문화강국이었던 네덜란드도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가장 충만했던 나라였습니다.
20세기 헐리우드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의 전통과, 나치, 무솔리니 등의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학자,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라 할 것입니다.
유신독재, 전두환 시대의 억압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장면 하나, 대사 하나까지를 검열 받아야만 하는 속에서 창조적인 생각은 위축되게 마련이고, 그런 속에서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 어쩌면 ‘쓰레기통에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일이었겠죠.
퇴근시간이 되어서 여기서 일단 접어야 되겠군요. 월요일날 얘기를 더 이어서 해야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넓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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