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주품이2018.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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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 ~ 11
주품이 큐티 ^ ^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원어
벳바게:Bhqfaghv(967, 베드파게) 벳바게(지)
(a) 베드파게는 '어린 무화과의 집'을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벳바게'라고 음역했다. 벳바게는 베다니 근처에 있었으며,그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베다니:Bhqaniva(963, 베다니아) 베다니 Bethany.
베다니아는 베트 아니야(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 아나냐의 집)를 의미하며, 한글 개역 성경에서 "베다니"라고 번역했다.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날에도 베다니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으며, 그 주민은 약 1,000명 정도이다. '엘-이지리예'(el-Aziriyeh), 즉 나사로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 1절, 벳바게는 어린 무화과나무를 뜻하니 하나님의 영광, 열매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부활의 큰 영광보다도 믿음이 아직은 미흡할지라도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는 앞으로 주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구원의 환성이 들려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의 기득권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베다니의 뜻같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에게도 복음이 전달되어지는 기쁨입니다. 그 열매는 나사로와 마리아를 통해서도 다 아실 것입니다.

이 본문은 겸손의 왕 어린 나귀를 타시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그런데 원어를 살펴보니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느껴집니다.주님께서 얻으신 나귀는 베다니 즉 나사로의 고향이며 그 뜻은 가난으로 고통 받는 마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른 교훈을 주십니다. 그 가난 중에서도 어린 나귀를 주님께 드리기를 바라는 헌신입니다. 부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인기 속에서도 굳이 가난으로 고통 받는 곳에서 어린 나귀를 빌리시는 이유가 뭐일까요

우리 주님은 생명보다 귀한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 궁핍과 고통 중에서도 네가 정녕 나를 사랑하시냐는 사랑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드릴 때도 그러 하였습니다. 독자 이삭을 나에게 드릴 수 있느냐 그 외아들을 낳으러 큰 고통 중에서도 귀하게 얻은 아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그것 없이도 주님은 돌을 만들어 멋진 백마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항상 보시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님께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에 실족하여 주님을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헌금강요가 비록 사이비도 있지만 그 외의 예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짜 싸인도 있습니다. 너희는 포도주와 젖을 값없이 사라 모든 것이 공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보시기 위해 그를 살펴보시고 그 통과 뒤에 그 헌신에 갑절로 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인데 인터넷을 보면 십일조 내면 저주 받는 다는 내용까지 가지각색으로 비난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삶에서도 그 십일조의 헌신이 헛되지 않고 갑절로 금생에서까지 돌려 받음을 믿습니다.

2절,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치 십일조와 같이 쓰고 남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닌 제일 먼저 첫 것을 드리는 십일조의 정신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의 제일 첫 우선 순위는 주님이 먼저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나귀같은 우리의 인생은 인간이 먼저 주인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오직 주님만이 먼저 주인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셔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심은 겸손한 심령 속에 주님은 함께 하심을 의미할 것입니다.

슥9 9 ~ 12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이 구절은 구약에 비추어 무엇을 의미할 가요 스가랴서는 안볼 수가 없죠 구약은 천년왕국을 뜻하는 순간인 것을 봅니다. 오늘 마가복음은 마치 복선과 같은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그 영광의 천년왕국을 위해 미리 주님께서 꾸며 놓으신 일입니다. 그 날에도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통치하려 지상재림을 할 시 많은 백성들이 환호하는 영광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은 가난한자와 부자 모두를 포함 할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는 인간 세상의 미련한 대통령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3절, 주님의 사역은 이미 편만하게 세례요한과 제자들과 소문소문을 통하여 전달이 되어 졌을 것입니다. 즉시 그는 행동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머뭇머뭇하는 히스테리 신앙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 확인이 되면 그 즉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믿다의 뜻이 순종하다 피스튜오라 하였듯이 피가 튀듯 생명을 다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이지요

4절, 제자들은 가서 보아야만이 확인을 하나 주님이 미리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압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의 신성을 또 한번 보게 됩니다. 인간은 5초 뒤를 알지 못하고 순간순간 후의 일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지요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누구를 의지하여야 할까요 미래를 모두 아시는 주님께 날마다 아뢰고 평안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5절, 우리 사회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죠 와서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나귀를 풀어 버리네요 늘 읽던 말씀인데 이렇게 구절구절 강해하니 놀랍네요 당시에는 농사나 짐을 옮기기 위해 번번히 나귀들이 쓰이기에 또는 단일 민족으로 배타감이 강하지 않기에 같은 이스라엘 형제가 짐이나 농사를 위해 빌려가나 보다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서 있는 사람이기에 방에 들어가 안보이는 사람이거나 무방비한 사람이 아니고 서 있는 사람이기에 서 있는 사람에게 강도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서로 태연히 대화하는 이유일 거 같습니다.

6절, 나귀 주인은 데려가는 이가 주님이라 하셨기에 믿음에 따라 허락을 하는 거 같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헌물은 절대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름이 성경에 기억이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드러내기 위해 쓰임을 받는 인물입니다. 주님의 생명책에 믿음에 따라 헌신함에 따라 그의 이름과 상급이 기록이 되어 졌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라 한번 더 대접해 주지는 않았는지 부족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7절, 나귀는 그래도 짐승이기에 제자들은 나귀 위에 옷을 덮습니다. 참으로 제자들의 귀한 겸손을 봅니다. 나는 없고 주님이 높아지길 원하는 겸손입니다. 더러운 나귀등 위해 주님의 성결을 위해 힘을 쓰는 겸손이요 주님의 몸이 승차하실 때 마찰을 줄이려 편안함을 위한 섬김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시는 길 위해 주님의 뜻을 이룸을 위해 나를 비우며 살아가고는 있나요 주님의 길에 내가 더 드러나는지는 않는 지요

8절, 길에서 주님을 맞는 백성들은 더 놀랍네요 아예 길에 옷을 펴고 들에 있는 것을 길에 놓습니다. 아마 꽃은 길 위에 가지는 주님의 좌우에 놓여 주님 가시는 길이 더욱 돋 보이기 위함일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믿음의 백성들의 옷은 나는 주님이 즈려 밟고 가소서 분토만도 못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존재들입니다 와 같이 백성들의 지극한 겸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백성들에 의해서만 가장 극에 달한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부활의 영광보다는 작기는 하지요

10절, 그들의 외침은 참 다양한 뉘앙스를 줍니다. 어떤이는 자신들의 가난에서 구할 자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하는 자도 있고 로마의 압제에서 우리를 구하소서를 외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다윗의 무력을 회복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마카비 왕조는 이전에 그리스로부터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며 회복을 한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무리는 예수님을 시기하기에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카비와 같이 그리스를 전복하였듯이 예수님이 로마를 전복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으로 정치적 꼼수를 준비하는 계기 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먼 훗날 재림을 위한 준비일 것이며 또한 마카비와는 다른 겸손의 나귀이기에 무력이 아닌 겸손을 통한 섬김의 입성이신 것입니다. 스가랴서에는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놓임을 받는 다 합니다. 백성들의 죄를 위한 놓임의 입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 영광의 대속의 입성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이 임할 때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외로움의 십자가의 길을 이 영광의 순간에도 거닐고 계십니다.

11절, 주님이 둘러보신 예루살렘은 많은 믿음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헤롯왕이 축조한 곳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숨결이 서려 있는 곳이니 그 곳을 느끼시려 더 둘러 보시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거처할 곳이 없습니다. 자리를 마련하여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통치하는 마카비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신 곳이 어디입니까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의 집입니다. 다시 주님은 정치적인 곳으로 변질이 된 예루살렘이 아닌 섬김이 있는 돌아보올 곳이 있는 자들을 위해 내려오십니다. 우리의 길은 세상의 영광을 위해 우리 목표를 삼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안주하지는 않는 지요 그곳은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주님과 이웃을 위한 섬김의 자리가 우리의 정체성이요 우리의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높아질 때에 건강을 잃다가 다시 이웃을 돌아보며 회복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서 떠나 우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일을 하다 화를 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 세상일이 아니라 그 일 가운데 이웃이 복음이 없어 죽어가는 것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삶이 자주 주객이 바뀌는 일 비일비재합니다. 내가 일하는 그 현장에서 우리는 복음으로 이웃을 섬기고 있는지요 다만 일을 위한 일에만 몰입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세상 사람같이 모아모아 부만을 축재하지는 않았는지요 우리는 모두 모든일에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혼란의 세상 속에 살아가며 죄악의 혼동 속에 살아갑니다. 살아 갈수록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껴가며 살아갑니다. 오늘 주님의 입성하시는 영광을 재림의 주님의 왕국을 연상하게 합니다. 죄악이 없고 모든 악령들이 묵여져 무저갱에서 갇히어 지내는 절대 죄악과 전쟁과 무지의 혼동이 없는 새로운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또 이후 새하늘과 새땅의 날을 믿습니다. 호산나 높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시고 죄악의 세상 속에 갇히고 무력화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놓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날을 위해 이미 오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 드리오며 지체하지 아니하고 오시옵소서 마라나타를 외치옵고 이미 고달픈 우리의 삶에서도 역사하시사 감당치 못한 시험으로 우리가 실족하지 아니하도록 지극한 은혜로 동행하여 주옵소서 나는 없고 주님만 높이는 예루살렘의 메시아 주께서 우리 삶에서 영광 받으옵소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