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에 부는 바람, 천무 / 天武 [10]

은하철도 2004.02.04
조회528

 

천봉자와 신오무교



10.


넓은 호수 가운데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섬이 있다.  천봉자와 설선녀가 인연의 보금자리를 튼 곳이다.  천봉자는 흑선비곡에게 오추을의 무공을 전수받아서 한 단계 높은 무공의 경지를 맛볼 수 있었다.  또한 설선녀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아기가 팔딱이고 있었다.  한 쌍의 부부로 지낸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천봉자는 설선녀와 대나무 숲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달빛이 호수에 내려앉은 사방은 고요하였다.  죽림장으로 돌아가려던 천봉자의 눈에 사람의 그림자가 띄었다.  멀리서 일렬로 나르는 사람들은 무척 깊은 내공을 발휘하여 달리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신오무교나 강호의 어느 문파에서도 저런 신형의 경신술을 펼치지 않는다. 


퍼뜩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천봉자는 손바닥을 탁 치면서 전율했다.  바로 일선교다.  일선교만이 생소하며 높은 무공을 펼칠 수 있다.  무당파와 아미파의 비급이 얼마 전에 탈취 당했다는 소문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바로 자혈검이다.  강호의 모든 비급을 탐내는 일선교가 자혈검을 그대로 놔둘 리 만무하다.


천봉자는 설선녀를 죽림장으로 보내고 땅바닥에 붙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천봉자만의 잠행술이었다.  세 명의 흑의인은 신오산을 향하여 날았다.  천봉자는 그들이 펼치는 경신술로 짐작하여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강호에서도 저런 신법을 발휘하는 고수는 별로 없다. 


신오산에 오른 그들은 커다란 바위 아래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바위 뒤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세 명의 흑의인에게 공손한 자세로 읍하였다.  그리고 앞장서서 신오산 정상을 향하였다.  천봉자는 나중에 나타난 사람이 펼치는 신법을 보고 신오무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흠, 일선교 사람들이 신오무교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구나.  자혈검을 탈취하려고 해도 삼대집사와 흑선비곡의 무공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녀석들이군.)


사실 삼대집사의 무공은 대단했다.  흑선비곡은 마음 놓고 신오전으로 들어설 수 있는 동굴입구를 그들에게 맡겼다.  네 사람이 좁은 통로를 통하여 위로 오르자 드디어 삼대집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봉자는 당연히 침입자들을 상대해야 할 삼대집사가 공손한 자세로 흑의인에게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럴 수가...... 믿었던 삼대집사가 일선교의 하수인이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다.)


바위에 바짝 붙어 숨죽이던 천봉자는 의문에 잠겼다.  도란거리는 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석대인님 어서 오십시오.  감히 단청상(段淸常)이 인사 올립니다.”

“그 동안에 수고가 많았다.  지금 흑선비곡을 불러라.  순순히 자혈검을 내놓지 않는다면 피를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갈 길이 멀다.  빨리 불러라.”


천봉자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삼대집사는 흑선비곡을 수호하는 자들인데, 어찌 저들의 하수인이 되었는가,  더구나 신오무교에서 최고의 고수들로 손꼽히는 삼대집사가 아닌가,  흡사 졸개를 다루듯 삼대집사를 대하는 석대인이라고 불리는 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신오전으로 삼대집사는 다가갔다.  그 뒤에는 장검을 등에 맨 흑의인이 소리 없이 따랐다.  어둠을 가르는 침중한 단청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주님, 단청상이옵니다.  잠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더니 흑선비곡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밖에는 살기가 가득한가?  괴이한 일이로다.”


신오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흑선비곡은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얼굴로 삼대집사와 정체모를 흑의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웃한 흑선비곡이 물었다.

“단청상은 정체모를 사람들을 이곳에 들여놓지 말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앞장서서 복면을 한 불청객을 들이는가?”


단청상은 머뭇머뭇 하더니 가슴을 펴며 담대하게 말했다.

“소인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일선교의 수하입니다.  오늘 일선교 교주님의 명을 받든 석대인님께서 자혈검을 인수하러 왔습니다.”

흑선비곡의 안광이 번쩍하며 사방을 훑었다. 

“삼대집사가 일선교의 하수인이었단 말이지?  믿기지 않는 일이로다.”


흑선비곡은 한 손으로는 수염을 쓰다듬고, 또 한 손으로는 철적(鐵笛)을 들고서 성큼성큼 돌계단을 내려와 삼대집사에게 다가갔다.  삼대집사는 옆으로 비켜서며 일제히 흑선비곡을 포위하여 공격할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석대인은 손을 들어 삼대집사를 제지하였다.


“흐흐흐,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일선교 교주님의 명을 받들어 자혈검을 인수할 뿐이니, 피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순순히 검을 내놓으시면 고맙겠습니다.”

가늘고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흑선비곡은 슬쩍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자혈검은 강호에서 불길한 검입니다.  일찍이 초대교주인 오추을께서 소림사의 방장인 경혜선사와 목숨을 건 대결에서 얻은 것입니다.  더구나 경혜선사께서는 자혈검을 잘 보관하여 무림의 화를 막으라고 하셨소이다.  내 검이 아닙니다.  자혈검은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물건입니다.  어서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흑선비곡은 삼대집사를 둘러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나를 속인 죄가 크고,  또한 신오전을 더럽힌 죄가 크다.  스스로 자결하여 편히 눈감도록 하여라.”


석대인은 움찔거리는 삼대집사에게 말했다.

“흐흐, 내가 흑선비곡의 목숨만은 살려 주려고 했는데,  이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일선교를 위하여 무공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날이니, 삼대집사는 흑선비곡을 처치해 버려라.”

그러자 삼대집사의 손에서 일제히 채찍이 뽑혀져 나왔다.  가죽의 끝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붙어있기에 한번만 몸을 스쳐도 살갗이 터져 나간다. 


“그 동안의 정에 비추어 무정하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단청상의 말이었다.  흑선비곡을 둘러싼 세 명의 집사가 허공으로 채찍을 날렸다.  삼대집사가 펼치는 암파수(巖破手)는 살인적인 치열함이 있었다.  단청상이 휘두르는 채찍을 선두로 세 명의 집사의 살수는 줄이어 날아왔다.  휭휭하는 파공음이 어둠을 흔들며 채찍 끝의 쇠붙이가 반짝였다. 


“흐흥, 제법이구나.” 흑선비곡은 코웃음을 쳤다.

머리와 허리, 그리고 발목을 향하여 날아든 채찍을 피하여 허공으로 몸을 솟구친 흑선비곡은 거꾸로 몸을 뒤집어서 장풍을 쏟아내었다.  한꺼번에 날아든 채찍이 요동하며 서로 엉키려는 순간에 삼대집사는 기겁하여 얼른 채찍을 회수했다. 


(으흠, 채찍을 송두리 채 흔들어 버리는구나.  차륜암파수(車輪巖破手)를 써야겠다.)

단청상이 몸을 날리며 채찍을 휘둘러 흑선비곡을 공격하자, 뒤이어 두 명의 집사가 연달아 날아들면서 채찍을 휘두르며 지나갔다.  연속적인 공격을 하여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격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가는 무공이었다.  허점만 보이면 여지없이 채찍은 파고 들 것이다.


뒤로 물러서 있던 세 명의 흑의인은 하등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흑선비곡의 무공에 감탄했다.

(대단하다.  흑선비곡은 역시 오추을의 무공을 계승하여 교주의 자리를 지킬만하도다.)


사방으로 날아드는 채찍을 피하던 흑선비곡의 손에서 삐익 하는 피리소리가 났다.  포물선을 그으며 석장이나 몸을 날린 흑선비곡이 철적으로 집사 한 명의 가슴을 뚫는 순간이었다. 

으악, 하며 집사 한 사람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모두가 경악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흑선비곡의 몸이 뒤로 돌더니 또 다른 집사의 목을 철적으로 후려쳤다.  어흑, 하며 집사 한 사람이 또 목을 움켜잡으며 쿵 쓰러졌다.  단청상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입술을 깨물더니 채찍을 힘껏 휘두르며 흑선비곡을 감아왔다. 


“흥, 가소로운 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구나.”

흑선비곡의 비웃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날아오는 채찍을 철적으로 후려치며 감아버렸다.  당황하며 채찍을 당기는 단청상의 눈에 검은 그림자가 덮쳤다.  어느새 획 다가온 흑선비곡의 철적에서 나는 피리소리와 단청상의 비명소리가 함께 들렸다.  머리가 으깨어진 단청상은 스르르 무릎을 꿇듯 주저앉아 버렸다. 


(참으로 무서운 흑선비곡의 철적대공(鐵笛大功)이다.  피리소리는 죽음의 소리로다.)

천봉자는 나무 뒤에 숨어 있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진즉에 나서서 흑선비곡을 도우려 했지만, 천봉자는 신오전 뒤에서 엎드려 있는 정체모를 또 하나의 그림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의 광경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자는 천봉자를 알아챈 듯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신오전까지 접근한 저 자는 누구일까,  귀신같은 솜씨다.)

천봉자도 미동하지 않고 그림자를 응시했다. 


삼대집사를 처치한 흑선비곡은 석대인 앞에 우뚝 섰다.

“배신자의 마땅한 길로 내가 애지중지하던 삼대집사를 보냈다.  그대는 감히 신오전까지 침범하여 자혈검을 노리니, 좀도둑이 아니라면 마땅히 너의 얼굴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저승으로 사람을 보낸다 해도 누구인지나 알고 보내야 마땅한 일이다.  안 그런가?”

활활 타는 눈으로 세 명의 흑의인 앞에 선 흑선비곡은 흡사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던 오추을의 모습이었다.  굶주린 호랑이의 숨결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흐흐흐, 참으로 훌륭한 무공이다.  그러나 네 손에 내가 죽을 일은 없겠지. 오랜만에 내 검에 피를 묻힐 기회로다.”

석대인이 등에서 장검을 빼들자 옆에 있던 두 명의 흑의인도 같이 번쩍이는 장검을 빼들었다.  흑선비곡을 둘러싸며 앞으로 내민 장검이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걸음과 함께 주위를 맴돌았다.


(흠, 검에서 풍기는 내공이 무척 강하다.  검의 위치나 움직이는 보법이 기괴하구나.  도대체 일선교란 무엇이기에 이렇듯 생소하며 높은 무공을 갖추었을까?)

사방에서 틈을 노리는 검을 읽으며 흑선비곡은 의문에 잠겼다.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는 흑선비곡은 눈을 반쯤 감고 선수를 칠 기회를 보고 있었다.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흑의인들의 허를 찌르려 했다. 


앞에서 노리는 장검을 슬쩍 쳐다본 흑선비곡의 몸이 별안간 뒤로 휙 꺾이며 철적이 뒤에 있던 흑의인의 이마를 향해 날았다.  실로 번개처럼 빠른 신법이었다.  억,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장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바로세우며 삼장이나 미끄러지듯 다른 한 명의 흑의인에게 접근한 흑선비곡의 철적이 옆으로 쭉 내밀어졌다.  또 한 명의 흑의인이 가슴을 안고 비명도 못 지른 채 쓰러졌다. 


순간, 앞에 있던 석대인의 칼날이 흑선비곡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손을 들어 날아온 칼날을 손가락 사이로 꽉 낀 흑선비곡은 내공을 힘껏 석대인의 장검에 실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석대인은 검을 놓쳤다.  격물타공(擊物打功)이었다.  요동치는 흑선비곡의 내공이 손가락에 낀 장검을 타고 석대인의 내공에 부딪쳤다.  실로 중후한 흑선비곡의 내공이었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서 있는 석대인은 팔이 찌르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흑선비곡의 눈이 커지면서 석대인의 머리를 철적으로 내려치려는 순간에 우당탕하며 신오전의 문이 부셔지는 소리가 났다.  흑선비곡은 아차 했다.  다른 자가 신오전을 침입하여 자혈검을 탈취한 것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신오전에서 뛰쳐나오며 마당을 가로 질로 동굴입구로 달렸다.  흑선비곡이 그림자를 쳐다보는 찰라, 천봉자가 나무 뒤에서 전광석화처럼 달려 나와 그림자를 향하여 날았다.  그림자는 경신술을 펼치며 날아오는 천봉자에게 손을 들어 벽공장을 뿜었다.  실로 감당키 어려운 힘이었다.  허공에서 몸을 휙 뒤집으며 벽공장을 피하여 떨어진 천봉자는 흠칫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음울한 기운의 벽공장이었다. 


흑선비곡은 당황하였다.  그림자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그 때에 동굴 안에서 두 명의 흑의인이 또 나타나더니 휙휙 움직이며 흑선비곡에게 달려들었다.  철척에서 나는 피리소리와 장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쨍쨍거리며 어둠을 흔들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자혈검을 탈취한 그림자는 동굴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흑선비곡의 손에 두 명의 흑의인이 쓰러지는 사이에 석대인의 그림자가 동굴을 향하여 달렸다.  그러나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에 날아온 천봉자는 한꺼번에 석대인의 혈도를 세 군데나 찔러서 꼼짝 못하게 했다.  이미 자혈검은 탈취당한 것이다.  흑선비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석대인을 잡아서 나무에 매달은 흑선비곡은 손가락으로 신도혈(神道穴)을 내리찍었다.  다섯 번째 척추마디인 신도혈을 제압당하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으흑, 하며 석대인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말하라.  일선교의 모든 것을......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지경에서 뼈만 앙상한 채로 남아서 고통당할 것이니,  미치광이가 될 것이다.  어서 모두 말하라.  자혈검을 어디로 가지고 갔는가?”

흑선비곡의 성난 손가락이 또 석대인의 합곡혈(合谷穴)에 떨어졌다.  그러자 석대인은 손을 파르르 떨며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렸다.  흑선비곡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