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에 폄하성 단어를 적으면서 좀 망설였는데 짧은 문장에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저렇게 썼습니다. 멸칭의 의도는 없지만 혹시 불쾌하신 분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
안녕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판 보면서 낄낄대고 자랐는데 어느덧 서른 줄을 앞두고 이 곳에 글 쓸 일도 생기네요. 상견례 전에 마음이 심란하여 인생 선배님들께 조언 구하고자 적어 봅니다.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거나 생략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려요.
[본문]
저 이십 대 후반, 남친 삼십 대 중반입니다.
저는 서울 토박이에 외동이고 흔히들 말하는 강남 키드입니다.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랐고 동네 분위기에 휩쓸려 대치동 학원가 전전하며 입시 치른 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나와 대기업에 재직 중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직은 아니니 온갖 유난 떨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평범하게 살고 있는 편이지요. 인생에 별다른 굴곡은 없었음을 알려 드리고자 쓴 내용입니다.
남자친구는 지방 출신이고 (지역은 밝히지 않을게요) 본가도 아직 그 지역에 있습니다. 탑5 의대 중 한 곳에 입학 후 휴학 유급 없이 졸업 후 다이렉트로 인턴 레지던트 마치고 전문의 합격해서 군의관 복무까지 마쳤습니다. 현재는 서울 소재 모 병원에서 펠로우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네, 똑똑하고 참 열심히 바쁘게 산 사람이에요.
제 고등학교 선배의 대학 선배가 지금 남자친구인데 20대 중반까지 줄곧 겉만 번지르르한 ㅆㄹㄱ 전남친들 만나면서 힘들어하다가 술자리를 빙자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남친을 소개 받았고 당시에는 둘 다 바빠서 안부만 종종 묻다가 (중략) 몇 개월 후에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서 없는 시간 쥐어짜느라 늘 애썼고 자주 못 보더라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수더분하고 조용하면서도 꼼꼼해서 왈가닥에 덜렁거리는 저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는데 남자친구는 그런 저의 밝은 모습이 좋다고 했고 저도 제게 부족한 남친의 진중하고 묵묵한 모습에 신뢰가 갔습니다.
그러나 남친은 그런 성격 때문인지 아주 가끔 (몇 년 사귀면서 손에 꼽을 정도) 다투거나 의견 충돌이 생기면 입을 닫고 동굴로 들어가버리곤 했어요. 흥분하며 화를 내는 스타일은 전혀 아닌데 아예 말을 안 하는 거죠. 좋게 말하면 자기 기분과 상관없이 늘 한결같은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워낙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 얘기를 털어놓지 않아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사람이었습니다. 다툼의 끝이라는 게 딱히 없이 본인이 조용히 마음을 삭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빨리 털고 찜찜한 기분을 없애야 하는 성격이라 처음에 정말 답답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었어요. 싸울 일이 거의 없기도 하고.
불같은 연애는 아니었지만 불안함은 없는 편안한 관계였고 자극적(?)이고 화려한 남자들한테 크게 데였던 지난날을 떠올리니 이 바위같은 사람이랑은 더 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했어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본인 얘기를 워낙 하지 않다 보니 가정사에 대해서도 최근에서야 자세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님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누나 셋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서너번 뵌 적 있고 아버님 납골당에도 다녀온 적 있는데 누나들은 셋 다 결혼했다고만 들었고 남친 통해 가볍게 인사 나누는 통화만 한 번씩 했을 뿐 누구도 만난 적 없었는데 남친 통해 가끔 근황 듣는 정도 이상으로 더 궁금해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며칠 전 카페에 나란히 앉아 남친이 누나랑 살뜰하게 카톡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생일 다가오는데 갖고 싶은 것 없냐, 나는 됐다 ㅇㅇ(조카)이나 맛있는 거 사먹여라, 저번에 ㅇㅇ 사야한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다 이미 샀다, 요즘 ㅇㅇ 맛있던데 그것 좀 너희 집으로 부치겠다 이런 식의 대화요. 내용만 이런 게 아니라 말투나 이모티콘도 꼭 일요일 저녁 가족 드라마에 나올 법한 느낌이더라고요.
그걸 보고 외동인 저는, 현실남매 에피소드 같은 거 인터넷에서 많이 봤는데 오빠네는 진짜 다르다, 다들 철 들어서 그런 거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달달할 수 있냐, 누가 보면 친남매 아닌 줄 알겠다 라고 농담을 했는데 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갑자기 친남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띠용.
순간 엄청 놀라서 미안하다 사연을 몰라서 말실수 했다 어버버 거렸습니다.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지나니 자기가 괜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안 괜찮았죠. 왜 몇 년 동안이나 말을 안 했던 걸까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누나 셋은 아버님 첫 번째 부인의 자식들이었고 아버님은 그 분과 사별하신 후에 남친의 어머님과 재혼을 하신 거였습니다. 남자친구는 재혼 후에 태어났고요.
한창 손 많이 가는 나이대의 딸 셋을 아버님 혼자 키우시기 힘들어 재혼 하신 거라는데 사별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고 하신 거라 한참 사춘기였던 누나들이 어머님을 싫어했다고 해요.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는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졌고 성인이 된 후에는 나가 살아서 거의 연 끊고 지내다시피 하다가 그나마 결혼하면서 약간 회복이 됐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매형들이랑 조카들 생기면서 아버님 제사도 다같이 지내게 됐다고 하는 거 보면 그 전에는 제사도 따로 모셨나 봅니다.
그 와중에 특이했던 건 누나들이 남친은 엄청 예뻐해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대신해 물고 빨고 업어 키웠다고 하네요. 남친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누나들이 있었고 예쁨 잔뜩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친누나들이 아닌 줄은 한참 크고 나서야 알았고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전이나 후나 그냥 쭉 친누나들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숨긴 게 아니라 묻는 말에만 대답했던 것뿐이라고도 했고요. 분명 그 말이 맞긴 한데 그럼 제가 유부남 아닌지 애는 없는지 같은 것도 물어봐야 대답할 사안인가 싶고. 제가 더 알아야 할 건 없냐고 하니 없는 것 같대요. 누나들과 어머님 사이에 고생했겠다 가운데서 힘든 건 없느냐 떠봤더니 지.금.은 괜찮다는데 어떤 분위기일지 감 전혀 안 옵니다.
아무튼 그제야 비로소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누나들과의 나이 터울도 납득이 됐고 끼니때마다 늘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식사는 하셨는지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신지 묻는 남친의 일상도 이해가 됐습니다. 본인 이야기 잘 안하는 성격도 그런 환경 속에서 형성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던 원동력이 된 건가 싶어 짠하기도 했어요.
저희 아빠 엄마는 집안 형편 상관없이 저 좋다는 사람이 자기 일 잘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으면 그걸로 됐다고 하는 분들이신데 아직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 기준에 아주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제가 놀랐고 의구심이 든 만큼 부모님도 그러실 것 같아 걱정되네요. 조만간 말씀 드릴 예정입니다. 사실 신혼집도 저희 부모님이 해주실 예정이고 기타 등등 이래저래 남자친구는 몸만 오는 상황이니 더더욱 확실히 아셔야겠죠.
다만 알려 드리는 건 당연한데 저도 최근에서야 안 사실이라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실 경우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아직 입장이 명확하게 서지 않습니다. 어떻게 설득하고 결혼을 진행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과연 이 결혼이 괜찮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바로 수긍하고 헤어지는 게 가능할지, 의외로 부모님은 괜찮다 하신대도 제가 이 결혼에 찜찜함을 갖지 않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게 흔들리는 기분이네요.
상당수의 지인들이 처음부터 집안 차이 너무 나는 결혼은 힘들다고 우려했어도 사람 하나 보고 밀어붙였던 건데 이런 내막까지 알게 되니 참 혼란스럽습니다. 주변에 이런 케이스의 결혼을 한 친구들도 없어서 어디 물어볼 데도 없네요.
<이복 누나들과의 관계는 소원한 연로하신 어머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아들이 내 남편이 될 경우의 후폭풍> ← 이렇게 쓰기만 해도 무거운 주제에 대해 제가 고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친구 하나는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고, 여행을 갈까 말까 할 때는 가야 하는데, 결혼을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안 하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며 카톡을 보냈더라고요.
이 결혼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상견례 전에 엎는 게 맞는걸까요? 결혼했을 때 예상되는 최악의 그림은 어떤 건지, 제가 남자친구 및 그 가정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할 건 무엇일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헙 새벽에 머리 복잡해서 잠 못 들고 쏟아 낸 푸념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네요.
정성스레 조언해 주시고 정신 차리라고 따끔하게 질책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정독하고 있어요.
댓글들을 읽다 보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다 정확한 처방(?)을 받기 위해 몇 가지 내용을 추가합니다.
1) 남친의 ‘의사’ 타이틀을 본 것이다?
**********△ 두 댓글 외에 다른 댓글들에서도 언급됨 △ *********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은 적지 않았었는데 당사자나 그 주변인들은 처음 작성한 글만 보고도 알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저나 부모님은 남친이 가진 의사 타이틀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친가 쪽에서 병원 운영합니다. 아빠도 의사고요. 더 자세한 인증은 신상이 털릴 것 같아 할 수 없지만 일단 가능한 부분만이라도 보여 드립니다.
*************△ 아빠 의사면허증 및 전문의자격증 △*************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의대 못 갔으니 의사 사위라도 얻으시면 뭐 좋으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본인이 의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빠는 의사에 대한 로망 전혀 없으세요. 의사는 ‘되기도 힘들거니와 되고 나서도 힘든 것에 비해 얻는 게 크지 않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힘든 기술 노동자일 뿐이다’를 입에 달고 사십니다. 엄마는 다른 업계 전문직에 종사하는데 항상 아빠 때문에 장기 휴가도 못 간다고 푸념하시고요. 오래 자리를 비우거나 임의로 쉬는 날을 지정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요. 저 역시 주변에서 의사 많이 봐서 별 감흥 없습니다. 물론 다른 직업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제가 꼭 현재 남친을 만나지 않는다 해도 구우우욷이 다른 의사를 만나고자 한다면 알음알음 쉽게 소개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이 맞는 이유는, 부모님이 남친의 성실성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휴학이나 유급 전혀 없이 졸업하고 국가고시와 전문의시험을 모두 한 번에 패스했을 때 11년이 걸립니다(남자의 경우,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로 3년 조금 넘는 복무 기간 추가됨). 아빠 본인이 그러셨기 때문에(79’ 의대 입학 ~ 90’ 전문의 취득) 남자친구가 명문 의대에서 스무 살 때부터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이해하고 그 ‘노력’을 높이 사셨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꾸준함과 성실함이 담보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런 점을 보시고 신혼집이라든가 결혼 준비를 저희 집에서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셨던 거고요.
▶ 정리하면, 저는 그냥 소개받았던 남자의 직업이 의사였던 것 뿐이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빠 엄마 두 분이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기 때문에, 제가 몇 년 동안 만난 남자의 됨됨이를 본인들께서 너무 잘 알고 계신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하셨을 뿐입니다.
2) 면허증 발급년도인 85년 당시에는 ‘보건사회부’였는데?
▶ 의사면허를 85년도에 취득했고 면허증도 그 때 받았었지만, ‘보건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명칭이 바뀐 94년 이후 ‘훼손’을 이유로 재발급 받았기 때문에 보건“복지부”장관 이름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전문의자격증은 90년 보건사회부 시절 당시 발급되었던 것이 맞고요.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3) ‘강남 키드?’
▶ ‘강남 키드’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거북해하신 분도 계셨는데요. 이는 처음 작성했던 글(원문) 서두에서 제목에 대해 언급했던 것과 같이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살아온 전형적인 모습을 한 번에 담아낼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사용했는데 좀 재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랑 제 친구들은 자조적인 맥락에서 자주 써서(ex. “야 우리는 엄마들 치맛바람에 그 난리치면서 학원 뺑뺑이 돌던 강남 키즈인데 의사도 아니고 판검사도 아니고 그냥 월급쟁이잖아. 어렸을 때 진 빼 봤자 다 부질없다.” 이런 식으로요ㅋㅋㅋ) 별 생각없었는데 오해하셨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4) 이복누나도 친누나
▶ 죄송합니다. 누나 셋과 남친 모두 아버지의 친자녀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친누나인데 제가 개념을 계속 착각하고 썼네요. ‘이복 누나’라는 단어에 꽂혀서 ‘친누나’를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남친이랑 대화하면서도 쭉 그렇게 사용했는데, 남친도 제가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같은 (좁은 의미의 일반적) 친남매’와 구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친남매가 아니라고 말한 뜻을 이해하고 저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남친이 직접 ‘친남매는 아니다 혹은 친남매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고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들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씩 입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말씀 주시면 자세히 읽어볼게요.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가) 이복누나 셋 효자 개룡남과의 결혼 고민
---------------------------[원 문]-------------------------------
※ 제목에 폄하성 단어를 적으면서 좀 망설였는데 짧은 문장에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저렇게 썼습니다. 멸칭의 의도는 없지만 혹시 불쾌하신 분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
안녕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판 보면서 낄낄대고 자랐는데 어느덧 서른 줄을 앞두고 이 곳에 글 쓸 일도 생기네요. 상견례 전에 마음이 심란하여 인생 선배님들께 조언 구하고자 적어 봅니다.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거나 생략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양해 부탁드려요.
[본문]
저 이십 대 후반, 남친 삼십 대 중반입니다.
저는 서울 토박이에 외동이고 흔히들 말하는 강남 키드입니다. 항상 부족함 없이 자랐고 동네 분위기에 휩쓸려 대치동 학원가 전전하며 입시 치른 뒤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나와 대기업에 재직 중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직은 아니니 온갖 유난 떨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평범하게 살고 있는 편이지요. 인생에 별다른 굴곡은 없었음을 알려 드리고자 쓴 내용입니다.
남자친구는 지방 출신이고 (지역은 밝히지 않을게요) 본가도 아직 그 지역에 있습니다. 탑5 의대 중 한 곳에 입학 후 휴학 유급 없이 졸업 후 다이렉트로 인턴 레지던트 마치고 전문의 합격해서 군의관 복무까지 마쳤습니다. 현재는 서울 소재 모 병원에서 펠로우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네, 똑똑하고 참 열심히 바쁘게 산 사람이에요.
제 고등학교 선배의 대학 선배가 지금 남자친구인데 20대 중반까지 줄곧 겉만 번지르르한 ㅆㄹㄱ 전남친들 만나면서 힘들어하다가 술자리를 빙자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남친을 소개 받았고 당시에는 둘 다 바빠서 안부만 종종 묻다가 (중략) 몇 개월 후에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서 없는 시간 쥐어짜느라 늘 애썼고 자주 못 보더라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수더분하고 조용하면서도 꼼꼼해서 왈가닥에 덜렁거리는 저와는 성격이 매우 달랐는데 남자친구는 그런 저의 밝은 모습이 좋다고 했고 저도 제게 부족한 남친의 진중하고 묵묵한 모습에 신뢰가 갔습니다.
그러나 남친은 그런 성격 때문인지 아주 가끔 (몇 년 사귀면서 손에 꼽을 정도) 다투거나 의견 충돌이 생기면 입을 닫고 동굴로 들어가버리곤 했어요. 흥분하며 화를 내는 스타일은 전혀 아닌데 아예 말을 안 하는 거죠. 좋게 말하면 자기 기분과 상관없이 늘 한결같은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워낙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 얘기를 털어놓지 않아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를 사람이었습니다. 다툼의 끝이라는 게 딱히 없이 본인이 조용히 마음을 삭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저는 빨리 털고 찜찜한 기분을 없애야 하는 성격이라 처음에 정말 답답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었어요. 싸울 일이 거의 없기도 하고.
불같은 연애는 아니었지만 불안함은 없는 편안한 관계였고 자극적(?)이고 화려한 남자들한테 크게 데였던 지난날을 떠올리니 이 바위같은 사람이랑은 더 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했어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본인 얘기를 워낙 하지 않다 보니 가정사에 대해서도 최근에서야 자세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님 슬하에서 어렵게 자라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과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누나 셋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서너번 뵌 적 있고 아버님 납골당에도 다녀온 적 있는데 누나들은 셋 다 결혼했다고만 들었고 남친 통해 가볍게 인사 나누는 통화만 한 번씩 했을 뿐 누구도 만난 적 없었는데 남친 통해 가끔 근황 듣는 정도 이상으로 더 궁금해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며칠 전 카페에 나란히 앉아 남친이 누나랑 살뜰하게 카톡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생일 다가오는데 갖고 싶은 것 없냐, 나는 됐다 ㅇㅇ(조카)이나 맛있는 거 사먹여라, 저번에 ㅇㅇ 사야한다고 하지 않았냐, 아니다 이미 샀다, 요즘 ㅇㅇ 맛있던데 그것 좀 너희 집으로 부치겠다 이런 식의 대화요. 내용만 이런 게 아니라 말투나 이모티콘도 꼭 일요일 저녁 가족 드라마에 나올 법한 느낌이더라고요.
그걸 보고 외동인 저는, 현실남매 에피소드 같은 거 인터넷에서 많이 봤는데 오빠네는 진짜 다르다, 다들 철 들어서 그런 거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달달할 수 있냐, 누가 보면 친남매 아닌 줄 알겠다 라고 농담을 했는데 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갑자기 친남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띠용.
순간 엄청 놀라서 미안하다 사연을 몰라서 말실수 했다 어버버 거렸습니다.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조금 지나니 자기가 괜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안 괜찮았죠. 왜 몇 년 동안이나 말을 안 했던 걸까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누나 셋은 아버님 첫 번째 부인의 자식들이었고 아버님은 그 분과 사별하신 후에 남친의 어머님과 재혼을 하신 거였습니다. 남자친구는 재혼 후에 태어났고요.
한창 손 많이 가는 나이대의 딸 셋을 아버님 혼자 키우시기 힘들어 재혼 하신 거라는데 사별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고 하신 거라 한참 사춘기였던 누나들이 어머님을 싫어했다고 해요. 아버님 돌아가신 후에는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졌고 성인이 된 후에는 나가 살아서 거의 연 끊고 지내다시피 하다가 그나마 결혼하면서 약간 회복이 됐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매형들이랑 조카들 생기면서 아버님 제사도 다같이 지내게 됐다고 하는 거 보면 그 전에는 제사도 따로 모셨나 봅니다.
그 와중에 특이했던 건 누나들이 남친은 엄청 예뻐해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대신해 물고 빨고 업어 키웠다고 하네요. 남친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누나들이 있었고 예쁨 잔뜩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친누나들이 아닌 줄은 한참 크고 나서야 알았고 그 이야기를 알게 된 전이나 후나 그냥 쭉 친누나들이라고 생각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숨긴 게 아니라 묻는 말에만 대답했던 것뿐이라고도 했고요. 분명 그 말이 맞긴 한데 그럼 제가 유부남 아닌지 애는 없는지 같은 것도 물어봐야 대답할 사안인가 싶고. 제가 더 알아야 할 건 없냐고 하니 없는 것 같대요. 누나들과 어머님 사이에 고생했겠다 가운데서 힘든 건 없느냐 떠봤더니 지.금.은 괜찮다는데 어떤 분위기일지 감 전혀 안 옵니다.
아무튼 그제야 비로소 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누나들과의 나이 터울도 납득이 됐고 끼니때마다 늘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식사는 하셨는지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신지 묻는 남친의 일상도 이해가 됐습니다. 본인 이야기 잘 안하는 성격도 그런 환경 속에서 형성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던 원동력이 된 건가 싶어 짠하기도 했어요.
저희 아빠 엄마는 집안 형편 상관없이 저 좋다는 사람이 자기 일 잘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으면 그걸로 됐다고 하는 분들이신데 아직 말씀 못 드렸습니다. 그 기준에 아주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제가 놀랐고 의구심이 든 만큼 부모님도 그러실 것 같아 걱정되네요. 조만간 말씀 드릴 예정입니다. 사실 신혼집도 저희 부모님이 해주실 예정이고 기타 등등 이래저래 남자친구는 몸만 오는 상황이니 더더욱 확실히 아셔야겠죠.
다만 알려 드리는 건 당연한데 저도 최근에서야 안 사실이라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실 경우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아직 입장이 명확하게 서지 않습니다. 어떻게 설득하고 결혼을 진행할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과연 이 결혼이 괜찮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요.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바로 수긍하고 헤어지는 게 가능할지, 의외로 부모님은 괜찮다 하신대도 제가 이 결혼에 찜찜함을 갖지 않고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게 흔들리는 기분이네요.
상당수의 지인들이 처음부터 집안 차이 너무 나는 결혼은 힘들다고 우려했어도 사람 하나 보고 밀어붙였던 건데 이런 내막까지 알게 되니 참 혼란스럽습니다. 주변에 이런 케이스의 결혼을 한 친구들도 없어서 어디 물어볼 데도 없네요.
<이복 누나들과의 관계는 소원한 연로하신 어머님을 끔찍이 생각하는 아들이 내 남편이 될 경우의 후폭풍> ← 이렇게 쓰기만 해도 무거운 주제에 대해 제가 고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친구 하나는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고, 여행을 갈까 말까 할 때는 가야 하는데, 결혼을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안 하는 거다”라는 말이 있다며 카톡을 보냈더라고요.
이 결혼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상견례 전에 엎는 게 맞는걸까요? 결혼했을 때 예상되는 최악의 그림은 어떤 건지, 제가 남자친구 및 그 가정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할 건 무엇일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잠도 안 옵니다 ㅠㅠ
--------------------------[추가글]-------------------------------
헙 새벽에 머리 복잡해서 잠 못 들고 쏟아 낸 푸념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셨네요.
정성스레 조언해 주시고 정신 차리라고 따끔하게 질책도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정독하고 있어요.
댓글들을 읽다 보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보다 정확한 처방(?)을 받기 위해 몇 가지 내용을 추가합니다.
1) 남친의 ‘의사’ 타이틀을 본 것이다?
**********△ 두 댓글 외에 다른 댓글들에서도 언급됨 △ *********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은 적지 않았었는데 당사자나 그 주변인들은 처음 작성한 글만 보고도 알 것 같아 그냥 쓰겠습니다.
저나 부모님은 남친이 가진 의사 타이틀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친가 쪽에서 병원 운영합니다. 아빠도 의사고요. 더 자세한 인증은 신상이 털릴 것 같아 할 수 없지만 일단 가능한 부분만이라도 보여 드립니다.
*************△ 아빠 의사면허증 및 전문의자격증 △*************
하나밖에 없는 딸이 의대 못 갔으니 의사 사위라도 얻으시면 뭐 좋으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본인이 의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빠는 의사에 대한 로망 전혀 없으세요. 의사는 ‘되기도 힘들거니와 되고 나서도 힘든 것에 비해 얻는 게 크지 않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힘든 기술 노동자일 뿐이다’를 입에 달고 사십니다. 엄마는 다른 업계 전문직에 종사하는데 항상 아빠 때문에 장기 휴가도 못 간다고 푸념하시고요. 오래 자리를 비우거나 임의로 쉬는 날을 지정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서요. 저 역시 주변에서 의사 많이 봐서 별 감흥 없습니다. 물론 다른 직업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제가 꼭 현재 남친을 만나지 않는다 해도 구우우욷이 다른 의사를 만나고자 한다면 알음알음 쉽게 소개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이 맞는 이유는, 부모님이 남친의 성실성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휴학이나 유급 전혀 없이 졸업하고 국가고시와 전문의시험을 모두 한 번에 패스했을 때 11년이 걸립니다(남자의 경우,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로 3년 조금 넘는 복무 기간 추가됨). 아빠 본인이 그러셨기 때문에(79’ 의대 입학 ~ 90’ 전문의 취득) 남자친구가 명문 의대에서 스무 살 때부터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이해하고 그 ‘노력’을 높이 사셨던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꾸준함과 성실함이 담보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런 점을 보시고 신혼집이라든가 결혼 준비를 저희 집에서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셨던 거고요.
▶ 정리하면, 저는 그냥 소개받았던 남자의 직업이 의사였던 것 뿐이고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빠 엄마 두 분이 오랜 연애 끝에 결혼했기 때문에, 제가 몇 년 동안 만난 남자의 됨됨이를 본인들께서 너무 잘 알고 계신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하셨을 뿐입니다.
2) 면허증 발급년도인 85년 당시에는 ‘보건사회부’였는데?
▶ 의사면허를 85년도에 취득했고 면허증도 그 때 받았었지만, ‘보건사회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명칭이 바뀐 94년 이후 ‘훼손’을 이유로 재발급 받았기 때문에 보건“복지부”장관 이름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전문의자격증은 90년 보건사회부 시절 당시 발급되었던 것이 맞고요.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3) ‘강남 키드?’
▶ ‘강남 키드’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 거북해하신 분도 계셨는데요. 이는 처음 작성했던 글(원문) 서두에서 제목에 대해 언급했던 것과 같이 상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살아온 전형적인 모습을 한 번에 담아낼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해서 사용했는데 좀 재수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랑 제 친구들은 자조적인 맥락에서 자주 써서(ex. “야 우리는 엄마들 치맛바람에 그 난리치면서 학원 뺑뺑이 돌던 강남 키즈인데 의사도 아니고 판검사도 아니고 그냥 월급쟁이잖아. 어렸을 때 진 빼 봤자 다 부질없다.” 이런 식으로요ㅋㅋㅋ) 별 생각없었는데 오해하셨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4) 이복누나도 친누나
▶ 죄송합니다. 누나 셋과 남친 모두 아버지의 친자녀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친누나인데 제가 개념을 계속 착각하고 썼네요. ‘이복 누나’라는 단어에 꽂혀서 ‘친누나’를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남친이랑 대화하면서도 쭉 그렇게 사용했는데, 남친도 제가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같은 (좁은 의미의 일반적) 친남매’와 구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친남매가 아니라고 말한 뜻을 이해하고 저렇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남친이 직접 ‘친남매는 아니다 혹은 친남매라고 생각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고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들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씩 입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말씀 주시면 자세히 읽어볼게요. 다시 한 번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