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다.”

구도2019.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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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글감

 

“이것은 당신이 마지막으로 쓰는 글이다.”

 



 

 

노승의 유언장

 

 

제자들은 보거라.

 

내 삶의 촛불은 이제 사그라지고, 날이 갈수록 시들어가고 있단다. 나의 스승이 꿈에 자주 보이는 것이 내게 주어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오늘의 이 글이 내 마지막 가르침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알려줄 세 가르침 중 첫 번째는 바로 용기다.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타고 나는 법이다. 감정의 넓이나 생각의 깊이도 사람마다 다르다고 예전에 이야기 했었지.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갖기 어려운 능력, 그리하여 가장 추구해야 할 덕목을 용기라고 말하고 싶구나.

 

몇몇 제자들은 ‘힘’이 가장 강력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하겠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물질적인 힘과 물리적인 힘으로 좌지우지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용기가 힘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희소한 능력이다. 힘을 가진 사람은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지만 용기를 지닌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

그렇다면 힘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설명할 때 용기를 예로 든 적이 있다. 두려움과 대담함의 중용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지.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는 힘을 추구하고, 누군가는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용기라는 덕목을 추구하지. 하지만 힘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용기는 지금 이 순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단다. 용기는 근육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 그 외에 힘과 용기는 다른 차이점이 있다.

 

힘을 가진 사람은 그 주변을 바꿀 뿐이지만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지. 흑인인권운동, 홍콩우산혁명, 광주민중항쟁 등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역사를 바꾸는 법이다. 그래서 힘을 가진 사람들은 용기를 지닌 사람들을 언제나 두려워한단다.

 

이렇듯 용기는 늘 약자의 편에 서 있으면서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로움을 추구한다. 용기야 말로 참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목인 것이지. 물론 힘이 없으면 용기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용기는 외면적 힘이 아니라 내면적인 힘을 사용한단다.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용기의 참된 능력이지.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는 힘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힘보다 용기가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현대인들은 잘 모른단다. 항상 누군가보다 올라서야만 하는 경쟁사회에서는 힘이 필요하니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힘에 억눌려 살다보면 힘이 대한 갈증만 커져가는 법이거든. 그러나 힘의 맹목적 추구를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나를 바라보듯이 힘을 추구하다보면 점점 괴물이 되어 간단다. 어쩌면, 약자의 용기를 두려워한 강자의 힘들이 시민들에게 용기를 가르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제자들은 힘에 종속되지 말고 용기 있는 이들이 되기를 스승은 간절히 바란다. 아래 시를 남기니 명심하여 용기를 가진 참된 인간이 되도록 꾸준히 정진하여라.

 

올라가기 위해서는 힘이,

내려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져주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복수하기 위해서는 힘이,

용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

 

 

두 번째로 가르칠 것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이라고 하니 의아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단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특성은 호기심’이라고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인간은 ‘왜?’, ‘어떻게?’ 라는 질문과 호기심으로 성장하는 지성체니까 말이야.

 

세상은 호기심을 위험하게 본단다. 이미 정해져 있는 방식을 따라가라고 말하고 있지. ‘이미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그렇게 하냐?’ 고 말이야. 호기심과 질문을 버리고 질서와 안정을 따르라고 말하지.

하지만 인간은 늘 질문하고 호기심을 가져야한다.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겠지? 한번쯤은 들어 봤을 테니 말이야.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죄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상자 이야기.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서 ‘희망’의 존귀함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판도라가 그 상자를 열게 된 ‘호기심’이야 말로 인간다움을 이야기한다고 본단다. 신화에서 판도라는 신의 숨결이 들어가 있는 최초의 인간이거든.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에 호기심이 있다는 말이겠지.

 

물론 그러한 호기심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참상들도 있단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호기심을 아예 배척해서 되겠느냐? 오히려 계속 사용함으로써 호기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세상은 인간에게서 질문과 호기심을 꾸준히 앗아가려고 한단다.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어.

 

호기심이 없는 삶에서 우리는 편안한 안정이 있을 수 있단다. 하지만 호기심이 없다면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여러 요소 중 하나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어. 인간 근원의 요소가 하나 없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재앙 아니겠느냐? 앞서 말했듯 호기심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단다. 하지만 칼을 두려워 칼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칼질이 서툴 수 밖 에 없다. 두려워하는 것일수록 그것을 올바르게 쓸 수 있도록 많이 써야하는 법이야. 무엇을 잘 다루는 방법은 그것을 여러 번 써보는 것이지. 호기심을 더 많이 가지는 것, 그것이 인간 본질에 가까운 것이란다. 제자들은 내 말을 잊지 말거라.

 


마지막으로 가르칠 것은 부드러움이다.

 

나의 스승이었던 분이 임종 전에 내게 알려주신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 분이 열반에 드시기 직전, 나를 부르더니 입을 벌리시곤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나는 울며 대답했지. 이는 다 빠지시고 혀만 남아계시다고 말이야. 그러자 스승은 내게 말했단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고, 나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차이라고 말했단다.

 

그러자 스승은 만족한 듯 웃으며 ‘그렇다. 이는 단단하니 빠진 것이고, 혀는 부드러우니 남아있는 것이란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라고 말씀하셨지.

 

제자들아 내 입안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이는 이미 다 빠져버리고 혀만 남아 있지 않느냐? 단단하고 강한 것이 영원할 것 같지만 커다란 바위도 흐르는 물에 뚫리듯, 강한 것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단다.

 

노자 선생이 말했던 상선약수도 이런 이치 아니겠느냐. 단단한 것은 자연 만물을 품을 수 없지만 부드러움은 자연 만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단다. 부드러운 물이야 말로 최고선의 경지라는 것이지. 이 세상 만물이 다 그렇다면 지혜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정신이 단단해지면 오히려 새로운 지혜가 차오르지 않는다. 깨달음도 계속 깨어지는 정신에 불과하니 그 어떤 깨달음에도 머무르지 말거라. 예전 스승님들이 자주 거처를 옮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 어느 곳에도 집을 짓고 머물면 안 된다. 때가 되면 천막을 걷고 또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집도, 진리도, 깨달음도 훌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얼마 전 나에게 인터뷰를 온 학생에게도 이런 말을 했었다. ‘삶은 모두 한 순간, 빌린 것이니 영원할 거라 착각해선 안 되고, 집착해서도 안 된다’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 부드러운 정신을 지녀야 한다. 정신이 부드러우면 표정도 부드럽고 말도 부드럽고 삶도 부드러워지는 법이란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정신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느껴지는 구나. 삶이란 이렇듯 한 순간이다. 만남이 있으면 떠남이 있는 것이지. 너희들은 나로 인해 배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너희들로 인해 내가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너희들을 만난 것이 내 생에 가장 큰 축복이었다. 너희들도 때가 되면 제자를 맞아들이고 지혜를 전파 하여라. 지혜의 참된 의미는 함께 나누는 것에 있음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會者定離 去者必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