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권의 경지를 드디어 체험하다 (태극권의 길, 제6화)

윤맨200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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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심은 심판들을 불렀다. 기백의 기술이 과연 유효한 태극권 기술이었는지 합의하기 위해서였다.


“저 선수가 사용한 기술은 유도기술이에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첫째 심판의 말이었다.

“추수대회에서 다리 쓸기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은 규칙에 어긋납니다.” 둘째 심판이었다.

“맞습니다. 그런 기술은 너무 위험해요.” 셋째 심판이었다.


넷째 심판은 기백의 편이었다. “저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우선, 저 선수가 구사한 던지기 기술은 분명 태극권 기술에 포함이 됩니다. 둘째로 박기백 선수는 다리쓸기 기술로 상대방의 발을 공격한 게 아니에요. 단순히 상대방 발의 진로를 막았을 뿐입니다. 셋째 모든 무술시합은 어떤 규칙을 갖든지 항상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네 명의 심판은 제각각의 견해를 내놓으며 갑론을박을 시작하였다. 그때 넷째 심판이 제안하였다. “그러면 오늘 참관 오신 풍 노사의 조언을 구하는 게 어떻습니까?”


넷째 심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풍 노사란 사람은 자그마한 체구에 꼿꼿한 자세로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나이는 칠십 쯤 됐을까? 고된 수련을 거듭한 무술인의 얼굴은 쉽게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첫째 심판은 “아니, 왜 외부인에게 조언을 구하자는 거요? 사람들이 우릴 얼마나 무능력하게 보겠소?”라 하였다. 둘째 심판도 맞장구 쳤다. “맞아요. 이번 시합은 명백한 반칙패입니다.”


그때 미국태극권협회 회장인 필립 탠이 참견했다. “심판 여러분, 풍 노사는 외부인이 아니에요. 존경받는 무술계의 원로란 말입니다. 그런 분의 조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더글라스 씨?”


더글라스는 이번 대회의 주심이었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하였고 대단히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글라스는 미국 태극권협회에서 총교련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존심도 대단히 강했다. 더글라스가 입을 뗐다. “이봐요, 솔직히 기백은 유도선수 출신이에요. 그런 외부인이 우승을 한다는 것은...”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지 맙시다.” 필립이 가로챘다. “무술을 하는 모든 사람은 한 가족이에요. 기백도 과거에는 유도를 했지만 이제는 저희들에게 태극권을 배우러 온 문하생입니다. 우리는 공정하게 심판을 해줘야 합니다. 자, 다들 마음을 넓게 가지고 풍 노사의 견해를 들으러 가십시다.”



풍 노사와의 대면


필립은 주저하는 일행을 이끌고 풍 노사에게 다가갔다.

“풍 노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의 도움 말씀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도움 말씀이라니... 늙은이가 뭘 안다고 그러시오.”

“아닙니다. 풍 노사님과 같은 원로분께 조언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무슨 문제로 그러시오?”

“방금 박기백 선수가 구사한 기술은 태극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필립이 물었다.

“시합규칙에서 던지기 기술을 허용하던가요?”

“네.”

“그럼 분명 태극권 기술이라고 볼 수 있소.”

주심은 여기에 반박했다. “시합규칙은 태극권의 여덟 가지 기술만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덟 가지 힘을 말하는 거로구만. 그러면 방금 기백이 사용한 기술은 상대를 당기는 ‘리’의 힘이 아니던가?”

“아니, 그러면 유도 기술과 태극권 기술이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겉모양은 같아도 내용은 다르지.” 풍 노사가 웃으며 답했다.


더글라스는 발끈하여 더 반박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짧은 지식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만 두었다. 더글라스는 총교련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추수 실력이 중치도 못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맡게 된 그는 자기보다 높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풍 노사도 그의 열등감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 더글라스는 어떻게든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풍 노사에게 망신을 안겨주고 싶었다.


“태극권이 유도를 상대할 수 있습니까?” 더글라스는 교묘한 미소를 띠며 풍 노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레슬링 선수가 진발과 선생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네. 그때 진발과 선생은 이렇게 답했지. ‘태극권사가 어떻게 상대방을 가리겠소?’ 그래서 레슬링을 하는 친구는 진발과 선생에게 덤벼들었는데 레슬링 선수가 아무리 힘을 써도 진발과 선생은 서있는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지.”


“아, 그러시면 풍 노사님도 저희 후학들에게 시범을 좀 보여주실 수 있겠네요.” 더글라스는 즉시 가로챘다.


“허허. 여러 뛰어난 고수 분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미천한 실력을 보이려 들겠소.”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이 젊은 친구는 유도를 했다고 하는데 풍 노사님께서 유도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좀 보여주십시오.” 음흉한 미소를 띠며 더글라스는 기백을 풍 노사 앞으로 떠다밀었다.


“아닐세. 난 그런 실력이 없어.”

“아니, 방금 진발과 노사는 레슬링 선수를 상대로...”

“그건 진발과 노사 얘기지. 내 얘기가 아냐.”


기백은 더글라스를 오늘 처음 접했는데 그리 기분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더글라스가 왜 자꾸 자신을 풍 노사와 겨루게 하려는지도 약간 의아했으나, 기백 입장에서는 태극권의 고수와 붙어보는 것은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 아니던가! 하지만 풍 노사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모르지만 자꾸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이대로 두면 태극권 고수와 맞붙어보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기백이 앞으로 나섰다.


“노사님, 이 후학은 태극권의 오묘한 경지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평생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기백은 정중하게 포권의 예를 갖추며 말하였다. “지금까지 2년이 넘게 태극권을 열심히 수련해왔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너무 많습니다.”


풍 노사는 찬찬히 이 당돌한 젊은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국이라는 이국땅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반가운 동양 얼굴. 기백의 얼굴은 배움에 대한 진지한 의지가 가득했다. 풍 노사는 자기 자신도 젊고 혈기왕성할 때 태극권에 대한 의문으로 얼마나 답답했었는지가 떠올랐다. 더글라스란 녀석이 어떤 꿍꿍이로 자신을 몰아세우는지 진작 간파했던 풍 노사였다. 하지만 정작 젊은 친구가 간절히 배움을 갈구한다면 얘기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런가? 내가 젊은이에게 무슨 오묘한 경지를 보여주진 못하지만 자네 배우려는 자세가 무척 진지하구만.” 풍 노사는 빙긋 웃었다.


“그러면 어디 자네 기술을 맘껏 펼쳐주게.”



너무도 부드러운, 너무도 정교한


얼마를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얼마를 참아왔던 시간인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무술을 찾아 태극권에 이르러 그 동안 쏟은 땀이 얼마이던가. 의문과 의구심이 가득할 때마다 운동으로, 책으로, 궁리와 추측으로 그 해결을 위해 얼마나 고투하였던가!


기백은 흥분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태극권의 고수가 나의 유도기술을 어떻게 받아낼 것인가? 시합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건만 그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풍 노사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풍 노사는 예의 그 미소를 아직도 지우지 않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채 그저 기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 자세로 어떻게 공격을 받아내시려우’ 기백은 약간 의아해하며 일단 첫 공격에 들어갔다. 기백은 두 손으로 풍 노사의 양팔을 잡았다. 풍 노사의 몸을 집어던지기 위해 풍 노사의 팔을 앞뒤로 잡아채보았다. 놀랍게도 풍 노사의 팔에서는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둥을 쓰러뜨리려면 기둥이 앞이든 뒤든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울든지 흔들려야 한다. 하지만 풍 노사의 몸은 마치 대지에 뿌리박은 말뚝 같아서 몸의 중심이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풍 노사의 팔은 마치 고무줄처럼 부드럽게 신축하며 풍 노사의 중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백이 기술을 들어가려 하면 풍 노사는 미세하게 몸을 움직여 그 기술이 들어갈 여지를 봉쇄해버렸다. 때로 풍 노사는 어깨를 움찔하거나, 허리를 비틀거나, 발을 비켜 딛는 것도 같았다. 놀라운 것은 풍 노사의 팔을 잡은 것은 기백인데, 바로 그 잡힘을 이용해서 기백의 손을 통해 그의 균형을 뒤흔드는 것은 풍 노사였다. 기백이 내던진 힘의 새싹은 나무가 되기 전에 잘려나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공격을 시도할 때마다 기백의 몸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허점이 풍 노사의 미세한 진동을 만나면 엄청나게 증폭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정교한 기예였다.


정말 신기했다. 하지만 신기함에 감탄하고 있을 기백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합 속의 임기응변에 능했던 그가 아니던가. ‘힘이 자꾸 차단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백은 번개 같은 순발력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 차단되기 전에 힘을 키워야지!’


지지부진하게 탐색전을 펴는 것, 이리저리 풍 노사의 중심을 시험해보는 것은 그만 두기로 했다. 풍 노사의 정밀한 방어 때문에 그런 시도는 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백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번개 같은 속도와 황소 같은 힘이 동시에 들어가면 풍 노사의 연로한 체구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생각할 것 뭐 있어. 업어치기다!’


“허업!” 낮은 기합을 내지르며 기백의 오른발이 풍 노사의 오른발 앞에 착지했다. 기백의 등은 풍 노사의 몸에 바짝 근접해 들어갔다. 구경하던 관중들은 갑자기 과격해진 기백의 동작을 보고 섬찟하며 노인의 안위를 걱정했다. 어떤 이들은 풍 노사가 신비한 기술을 보여주기 원했다. 더글라스 같은 사람은 풍 노사의 위신이 그의 몸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기를 바라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백의 몸이 풍 노사의 몸에 밀착하고 다리와 허리에 힘을 주며 풍 노사를 힘껏 들어올리려 할 때였다. 풍 노사는 예의 그 미세한 움직임으로 기백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힘을 약간, 아주 약간 더해주었다. 강한 힘과 속도였지만 강했던 만큼 그리고 빨랐던 만큼, 컵 속의 물은 쉽게 넘쳤다. 팽팽하게 균형 잡혀있던 저울의 한끝을 톡! 건드리자 저울이 위태로울만치 휘청거리는 것과 같았다.


균형을 빼앗겼으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힘을 잃었으면 다시 모으면 된다. 하지만 풍 노사는 기백의 몸에 밀착해서 기백의 허물어짐을 따라가면서 아주 철저하게 더욱 더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풍 노사의 몸에 자기 몸을 갖다 붙인 것은 기백이었지만 바로 그 붙음을 철저하게 이용한 것은 오히려 풍 노사였다.


몇 번 땅에 처박히기 전에 힘과 균형의 방향을 전환시키며 몸을 바로 세워보려고 하였으나 이내 기백은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땅바닥에 오체(五體)로 뜨거운 작렬을 선사해주어야 했다.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뻗은 기백은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젊은 친구의 수난에 즐거워했다. 어떤 이들은 풍 노사의 깊은 내력(內力)에 찬사를 보냈다. 어떻게 그런 기교가 가능했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땅바닥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백의 마음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이유극강의 힘을 찾아낸 데 대한 성취감과 안도로 가득차올랐다. 사람들이 웃어도 좋다! 무릎이 깨져 피가 흘러도 좋다! 아, 즐거운 세상이로구나! 풍 노사님, 사부로 모심을 허락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