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감리교, 장로교, 캐나다, 호주, 영국, 일본을 통해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한국 교회에 간헐적 수난도 있으므로 뚜렷한 선교 방법과 선교사간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정책 설정을 해야 했다. 1890년 중국 지푸 선교사인 존 네비우스를 초빙하여 한국 선교 원칙을 제공받았다.
(1) 선교사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전도
(2)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모든 신자들이 그들이 선택한 봉급받지 않는 지도자 아래서 전도와 교회 경영
(4) 자립 보급, 모든 교회 건물은 그 교회 교인에 의해 장만하고 교회에서 전도인의 봉급 지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 모든 활동은 성서 중심, 성서 연구는 반드시 여럿이.
(6) 성서의 교훈에 따른 엄격한 생활 훈련과 치리
(7) 다른 교회 기관과 협력 일치의 노력하고 다른 기관과 지역을 분할하여 전도.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할 이후 피차 간섭하지 않을 것
(9) 경제나 이외 문제 폭넓게 피차 돕는 정신.
그런데 이 원칙은 1889년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호주) 미션 연합 공의회’에서 연구되었다. 이 기관은 교회 연합 기관으로 우리나라 최초였는데 1893년에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로 조직되었고 이 공의회는 두가지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선교 지역 분할 정책이다(Comity Arrangements). 여러 선교 기관이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하지 않도록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맡았다. 이런 지역 분할이 한국 교회의 분열의 지방적 배경과 대체로 중복되는 비극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지만 본래는 선의의 분할이었다. 둘째로 이 공의회는 네비우스 방법을 기초로 하면서 핵심적 몇 가지 원칙을 첨가하여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1) 상류 계급보다 근로 계급을 상대로 전도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천 소녀 교육에 힘 쓴다
(3) 시골 초등학교를 경영함으로 기독교 교육 효력을 낸다
(4) 장차 한국인 교역자를 이런 곳에서 배출
(5)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개종시키므로 빨리 안전하고 명석한 성서를 준다
(6) 모든 종교 서적은 순 한국말로 씌어지도록
(7) 선교사의 도움을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개인을 늘린다
(8) 동족의 전도에 의한 대중 신앙화
(9)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친숙하게 지내고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인다
(10) 치료받은 환자가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하여 전도의 문 열리도록.
이 방법은 한국 교회의 발전과 신앙 형태,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 조직에 큰 영향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변동도 동시에 가져왔다. 원래 이 방법의 근원은 영국의 선교사 헨리 벤인데 그는 1860년대 광범위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자립 교회, 자급 교회, 자립 선교의 원칙을 세계 선교 방법으로 채택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19세기 선교사들이 부르주아 시민적 중류 계급의 운동이란 점을 밝히고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을 근대화하고 시민층으로 형성하는 의미에서 육성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선교 정책은 자연히 시민적인 책임과 도덕, 자기 의식 형성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고 저 유명한 자급, 자립, 자립 선교의 3대 원칙으로 귀납시켰다. 한국의 네비우스 전도는 근로 계급과 하류층 여성들을 교육하여 자립하고 공헌하는 개인으로 발전시킴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 의식과 책임의 주체로 나라와 겨레에 관여하는 창조적 인간상을 꾸미게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계층의 상향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중산 시민층을 형성하는 사회적 상향 추진력으로 업적을 남겼다.
12-2 감리교 선교 정책
감리교는 탐색 순회 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평민과 가난한 대중을 위해 전도와 의료 사업을 개항시가 아닌 내지로 확대시켰다. 이런 기동성 넘치는 감리교 선교는 한국 감리교의 정신적 기동성, 진취성을 배양했다. 또 감리교는 장로교보다 교육 분야에 차원 높은 집착을 했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출신 교회로 보내 힘있는 전도자를 양성하는데 반해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하여 그것을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교육의 치중은 서북부 감리교 복음 사업의 부진을 자초했다. 또 다른 한 가지 점은 장로교에 비해 많은 수의 여선교사를 가지고 부녀사업에 남다른 공헌을 남긴 것이다. 또 부녀자를 위한 병원도 먼저 설립했다. 그런데 감리교가 교육과 여성 사업에 근대화의 첩경을 가면서도 네비우스 방법을 채택하지 않은데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對 근대사회 대결 자세가 달랐다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를 둘러싼 장로교와 감리교의 정책 대결이었다.
12-3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 문제의 시작
한국 교회는 국민과 국가 의식 중추로 자처하고 대외적으로 얼을 가꾸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 복음과 경건주의 테두리 안에서 빗나가기를 바라지 않던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의 비정치화를 감행할 책략을 꾸몄다. 당시 알렌은 칼빈주의적 섭리 이론에서 국가와 교회의 본질적 연결을 전제로 하여 한국 내 보수주의 세력과 인연을 맺었다. 이것은 경건주의와 부흥회 타입의 감리교와 거리가 멀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였지만 감리교적 기질이 많았다. 이로 인해 한국 선교사는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의 ‘감리교적’ 선교사들로 분할되었다. 감리교적 선교사들은 알렌이 정치에 매혹되어 궁에 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알렌은 복음 전파를 왕명의 허락 날 때까지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여 선교사들을 광기의 열광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당시 외교관으로 있던 알렌으로 인해 선교사들과 미국 공관과 관계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 의외의 곳으로 흘러갔다. 알렌의 정치적인 태도를 비난했던 선교사들이 1892년 왕실과의 친근화 관계가 된 것이다. 장로교 애니 엘러스와 릴리어스 호튼이 민비의 시의가 되었고 감리교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워싱톤과 헤이그에 잠행하였다. 감리교 존스 목사는 고종 측근으로 통역을 맡았고 언더우드 자신도 고종의 부름을 받고 7주일 동안 입궐하여 숙직하였다. 선교사들과 왕실의 자연스런 접근에 반발을 느낀 사람은 없고 그들은 이를 복음 선교에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적 경건에 일관한 선교사라면 이 사태의 귀추를 관망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하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은 여기에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13. 틀을 잡아간 한국 교회.
13-1. 한말의 비운과 기독교회
1895년 10월 8일 민비가 일본 폭도들에 의해 시해 당함으로 나라의 비분이 절절히 사무치고 백성의 체면이 유린되었다(을미사변). 그런데 기독교의 새 국면이 전개된 것이 이 섭리의 비밀이었다. 고종은 참혹한 시련을 이길 기력이 없어 형편없이 의기소침해 있었고 독살을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때 교회가 솟아 뻗는 충애로 여기에 몸 던져 함께 울고 정의감과 의의 종으로 그 시련에 동참했다. 민비 시해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설명문을 만족스럽게 여기므로 미국 선교사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비애에 허덕이는 백의민족과 와신상담 동행할 것을 다짐했다. 알렌은 민비 시해의 음모가 일본 공사관에서 진행된 것을 워싱턴에 통보하고 공개 규탄했다. 나아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정을 진언했다. 당시 일본과 친근해진 미국은 그의 보고를 묵살했다. 1895년 11월 28일 공포에 떠는 국왕을 궁궐 밖으로 모시려는 구미파 왕실 근신과 서양 선교사들의 범궐모의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 제너럴 다이등을 지목하며 국왕쟁취사건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애비슨은 고종의 식사를 검색하며 함독유무를 살펴왔고 언더우드는 고종의 벗이 되어 고독과 공포를 이겨내게 해주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국왕을 보호하려는 소박한 인정과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한국 프로테스탄티즘의 국민 감정과 반일 의식의 생리가 구형되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15일 을사보호 조약 체결 이틀 전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상실 문제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통령 면회는 거절되었고 한국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처음 일본을 한국 번영의 조력자로 보았던 헐버트는 자책과 울분에 쌓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진출을 지원함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억제하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이권을 시인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워싱턴과 선교사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1903년 250명의 재한 미국 선교사 중 절반이 한국 독립을 위한 열렬한 챔피언들이었다. 워싱턴은 이들을 ‘괴벽한 녀석들’로 비판했다. 기독교 정신과 한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미국의 친일 정책에 맞섰던 알렌은 1905년 공사직에서 해직당했다. 한편 선교사들은 워싱턴의 이념에 정면적으로 맞싸울 정서가 없었다. 그들 역시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일본이 한국에 손을 뻗쳤을 때 상당수 선교사가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인식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취임 때 그의 선정에 기대하는 경향이 압도적이었다. 또 서울에 일본 고위층과 선교사들의 사교적 회합에서 참석하여 샴페인을 마시기도 했다. 경건형의 선교사들과 한국인의 실의에 함께 눈물 흘린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매서운 화살을 퍼부었다.
13-2. 애국과 반일의 민족 교회
19세기 말 한국 교회는 황제에 대한 현저한 충성과 애국의 열정을 그 특징으로 가지기 시작했다. 민비 시해 참변 때 장로교 감리교인들이 함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 예배를 드렸고 아관파천으로 피하였던 고종의 환어를 환영하기 위해 배재 학당 학생들이 도로 연변에 늘어서서 복받치는 충절을 웅변적으로 시위한 일도 있었다. 1896년 고종 탄신 축하일에 교회가 충군애국의 정신을 세계에 시위하기도 했다. 전국민이 뜨겁게 왕실에 충실을 바칠 때 기독교회가 이 심정에 공통의 통로를 찾은 것이다. 민족 일치의 바탕과 의사의 표현을 교회가 맡기 시작한 것이다.
<겨레 교회로서의 정형>
1895년부터 1907년에 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교인수는 530명에서 26057명으로 급증하였다. 이 성장은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했다. 전도 10년 만에 교회 135개 예배처소 185 미안수 교역자 21명 교인 15222명 학교 41개 교사 740명 한해 헌금이 8800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서북 지역 교회의 성장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 전쟁, 노일 전쟁의 참혹한 전운과 피해가 이곳을 집중적으로 강타한 사실이다. 청일 전쟁 후 도시가 폐허가 되고 병마가 덮쳤을 때 사무엘 모펫과 그레이럼 리 두 목사가 거리를 다니며 희생적으로 봉사하여 주민들의 뜨거운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둘째로 본래 평안도와 황해도는 조정에 의해 강압적 처우를 받아 소외되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선교사들은 급격한 교회 증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곧 보호와 힘의 획득인 경우가 많음을 우려하였다. 또한 수효가 적은 선교사들이 그들을 돌보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거나 통탄할 과오로 이끌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라투레트 교수는 한국이 이 기간 경험한 온갖 비운 때문에 받은 정서적 충격이 교회의 급증과 확대를 기록한 것으로 분석한다. 나라의 허약에 대한 대책을 기독교 안에서 찾아 서양의 패턴에 따라 나라를 재조직하고 민심을 결속하려는 촉박감이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원적인 분석을 할 때 당시 종교적 진공성, 곧 재래 종교의 부재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 기독교가 서구화 운동에서 차지해야 할 지도에 대한 갈망이 작용한 것이다. 청일 전쟁에서 청국이 근대화한 일본에 쫓기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서구적 기독교회에의 전향을 결심한 것이다. 다음으로 혼란기에 기댈 곳 없어 교회의 신앙이 베풀 안정감과 그 방향에 대한 모색이 교회로 전향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반일순국의 교회>
을사보호조약이 진행되던 1905년 6월 하와이 동포들이 목사 윤병구와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회하고 일본 침략을 폭로하며 한국 독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기독교인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등이 사수국권을 쓴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게시하고 시민들에게 통렬한 구국연설을 하다 일경의 칼을 받아 부상을 입고 감금되었다. 1907년 고종의 신변이 불안하다는 전언이 평양에 날아들자 교회가 이를 크게 광고하여 학생은 일제히 휴학하고 교인들은 임시 휴업하고 교인들이 매일 기도회를 열고 통곡 기원을 계속했다. 기독교 청년들은 자강회의 동지들과 함께 친일 일진회 기관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대한문에 나가 꿇어 통곡하며 황제의 비운을 목메어 통곡했다. 양주군 예수교 교사 홍태순은 대한문 앞에서 약을 먹고 자결하여 충군 애국의 교회상을 남겼다. 상동 감리교회 엡웟 청년회는 정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시기 항일 운동의 특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의 조직적 항일 운동과 서북도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항일 운동의 대두였다. 일본의 앞잡이 스티븐슨을 살해한 장인환, 이완용 암살 미수의 이재명은 열렬한 신자였고 의병 지휘하던 사람 중 기독교인이 상당수였다. 이처럼 이들은 애국과 신앙의 조화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1907년 일본은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 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항일과 무력 행사에 대한 반발이 놀랍게도 선교사들에게서 모질게 터져나왔다. 게일은 ‘위조 애국의 미친듯한 광란, 자결, 신체 절단, 허황된 맹세, 게릴라 의거, 냉혹 무정의 저항’이라고 범준한 자의 양식을 깎는 언사를 남기고 있다. 감리교 감독 해리스는 감리교의 엡웻 청년회가 교회의 목적을 왜곡하고 정치 목적으로 이용한다 하여 이를 해체시켰다. 구세군 정령 호가드도 1908년 통감부를 찾아가 정치에 불간섭을 선서하고 돌아왔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제3국인인 선교사들이 을사조약의 한일 관계에 개입한다는 것은 미일 관계에서 보아도 불가능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책임 있는 위치의 선교사들은 현실 안에서 한국 교회의 생존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선교사의 불일치는 어느 모로 보든 비극이었다. 우리는 일부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의 친일과 격렬한 항일의 모습이 한국 교회의 생리로 일치되지 못했던 부조리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이 반드시 한 번은 충돌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1907년 대부흥에 내적으로 이런 불행한 대결이 있었다.
13-3 교회와 개화
기독교회의 선교는 한국에서 단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소박하고 단일해서 교회 신앙을 몇줄 안 되는 글로 요약할 수 있었고 인간 내적 생을 한꺼번에 포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다양하고 다변적이어서 생각하고 건드리지 않은 것이 없고 정서 가운데서 자극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고상하고 값진 사업을 찾아 생기를 북돋워주고 깊은 사색과 결단과 신비감으로 일에 대한 가치와 헌신을 현현해 주었다. 한국 교회가 한국의 근대화와 개화에 공헌한 사실은 명백한데 개화라는 말은 정치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개화와 교회>
개화기 한국 기독교의 활력과 지성의 힘은 역사 변혁의 원동력이었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 개화 추진의 앞장에 서 있었다. 독립신문(1897년 12월 23일)에 의하면 기독교만이 근대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개파해서 문명과 부강의 새 시대를 전개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정치적 개화의 특징은 정치 변혁에 앞서 변화된 개인의 도덕적 품격의 구현화에 있다. 내적 변화의 신앙의 견실이 개인에게 성취되면 그것이 외연되어 사회의 정돈, 자유, 부강이 실현된다는 철저한 확신이다. 초대 교회는 사회 구조 전체가 인격 변화에 따라 변혁 개선된다는 신앙의 역동성을 믿었다. 또 다른 특징은 개화 과정의 반과격성인데 독립협회와 기독교와의 관계 과정사가 이를 입증한다. 1896년 7월 2일 독립 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기독교인 서재필, 윤치호, 정기준, 홍정후등이 참여했다. 그런데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에 ‘뜨거운 머리를 가진 청년들의 조심성 없고 건방진’ 과격 행위가 나타났다. 교회와 선교사들은 독립협회의 과격성에 경계를 하였다. 선교사들과 알렌은 서재필에게 ‘혁신의 시기가 상조하니 단념하고 미국에 돌아가라’ 권고했다. 또 선교사들은 독립협회의 과격성 배후에 일본의 후원과 지지가 있다 판단하였다. 선교사들이 독립 협회를 경원한 것은 선교사들의 존왕적 태도(왕을 존경함)때문이었다. 1898년 보부상 황국 협회가 교회당 파괴와 교인 도살을 폭언했을 때 격분한 교도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보부상 두목 체포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는데 이때 고종이 알렌과 아펜젤러에게 교도들을 근신시킬 것을 부탁하였고 아펜젤러는 교도들의 시위 자제를 요구하였다. 게일은 ‘교회는 정치적 조직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날 영적 영향력은 없어지고 만다’고 하였다.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관계자가 구속되었을 때 감리교 선교사 벙커 부부가 입옥 전도하여 이승만, 유성준, 김인,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등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정치 개화의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 기독자들간 이념상 갈등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존왕성과 신앙 내연 선행의 평화스런 개혁 의지가 개화 추진 기독자들의 과격 입현제 개혁과 민주주의 혁신 방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정치적 개화는 한마디로 자주 인권, 천부의 권리, 독립국의 지탱이란 정신적 각성의 함양을 수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야말로 참된 근대 시민 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성서적 가르침에 내놓았던 것이다.
<문화적 개화와 교회의 주도>
1) 교육
기독교는 교육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복음 전수 이전에 서양 철학과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을 시작한 목적은 ‘이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될수록 많이 포섭하여 기독교야말로 인간 생활의 진실하고 가장 완전하고 적절한 지침임을 알게 하여 그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 개진에 대한 교회의 공헌은 실로 한국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한국 정신사에서 종교와 교육의 구분이 수행되지 아니한 점이 선교와 교육의 병행을 쉽게 실현시킨 바탕이 되었다. 기독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위대한 교육자로 환영되었고 한국 교회는 전반적 문화 활동을 동반함으로 한국 근대화의 도관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885년 8월 아펜젤러에 의해 배재 학당이 세워진 것이 근대 교육에서 사립 학교의 시작이다. 1886년 5월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을 창설하였다. 근대식 고등 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 의학교인데 제중원의 의학교육이 1886년 4월 의학부로 개설되었고 1899년 정식으로 의학교가 설립되었다. 1909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 총수가 950여개가 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종교가로서 백성들의 질고를 듣고 무고(無辜)를 구함으로 종교의 전포의 용(用)에 공(供)하고 있던 열의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근대화 작업은 한국 교회 자신의 손에 의해서도 훌륭히 진행되었다. 1895년 새문안 교회에서 영신 학당을 설립하였고 1904년 상동 교회 전덕기가 청년 학원을 설치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에 안창호가 조직한 구국 비밀 단체 신민회의 기관 학교로서 독립사상 고취에 임하였다. 윤치호가 맡아 실업 교육 중심으로 발전시킨 송도의 한영 서원, 도산 안창호의 평양 대성 학교, 이승훈의 정주 오산 학교 등은 일본도 시인하듯 기독교가 금일의 신교육 제도의 연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사학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 민족 의식을 배양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외연으로 현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2)청년운동
한국 청년 운동은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다. 감리교 엡웟 청년회는 1897년 9월 창설되었다. 그러나 장구하고 체계적인 것은 190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였다. 구성원은 상류층 중심의 독립협회계였고 교회가 접촉할 수 없는 층의 청년들을 특유한 방법, 곧 비종교적인 폭넓은 프로그램, 체육과 농촌 사업, 직업 교육등을 통해 한데 합치는 민족적 운동을 전개했다.
3)여성운동
1897년 감리교 여성 운동 단체 조이스 회가 조직되었고 1900년에 보호여회가 설립되어 빈궁한 교우를 도왔다. 북장로교는 여자 선교 의사의 활동으로 부녀 사업을 시작했고 1898년 평양에 ‘부인전도회’를 창설한 것이 우리 나라 부인 전도의 기원이다. 언더우드 부인은 서울 모화관에서 주례 모임을 가지고 성서반을 운영했다. 기독교가 여성을 해방하고 사회적 신분을 신장시킨 추진력은 거대했다. 1897년 정동 감리교회에 남녀가 합석하여 남녀 동등 문제를 토론한 일이 있고 교회 세례 교인 명부에 여인의 성명이 독립된 인격으로 기재되었다. 복음은 남녀의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 존엄성을 설교하고 동등성을 갈파했다. 한국 여성에게 생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 마음과 손에 전에 없었던 책임과 열정을 가득 채워주었다. “부부가 없으면 부자와 군신과 장유와 붕우가 어디로 좇아 나리요?” 나라와 사회 질서의 원칙이 부부라는 단언은 시대를 뒤흔든 선언이었다. 음담패설의 악덕제거, 조혼 타파, 수양 남매 결연 금지, 데릴 사위나 민며느리 금기, 미신 타파등을 시대 개혁의 기치로 추진했다.
4)한글, 문서, 성서, 찬송가.
1889년 10월 몇몇 선교사가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 모여 ‘한국성교서회’를 조직함으로 문서와 문예 활동을 근대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890년 그 헌장을 통과시켜 오늘의 기독교서회의 모체로 탄생했다. 1919년 ‘예수교셔회’로 개칭했고 이 서회는 한글로 허다한 역서를 펴내 민중 교화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1891년 감리교 올링거 선교사가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여 막대한 양의 출판 사업을 추진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로스 번역의 지나친 사투리와 난해성 때문에 1887년 2월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밤낮 없는 수고 끝에 1900년 9월 신약 성서의 개역 수정판이 발간되었다. 여기서 한글과 교회와 관계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관계 서적들은 모두 한글로 출판되었고 용어도 서민층 일상어를 택하여 복음 전도와 민중 교화 속도에 대성과를 거두게 했다. 실로 한글은 기독교의 새로운 활동에서 그 자체의 생명 확장을 보았고 이 나라 민족 문화를 창달하며 유구히 전승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 문법책인 ‘대한문전’을 간행한 최광옥도 기독교 신자요 애국지사였고 장로교 강병주 목사는 한글 운동을 교리 전도와 함께 하여 ‘한글 목사’로 불리웠다. 기독교회는 한글을 민족의식의 각성과 연결시키고 천대받아 온 한글의 인연 곧 부녀자와 서민층을 불러 일으켜 밝아오는 역사의 역군으로 배출했다.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 로스와 로드와일러가 펴낸 ‘찬미가’가 최초였고 장로교는 1894년 언더우드 편집의 ‘찬양가’ 총 154장이었다. 개화기 시초 시가 형태로서 찬송가는 창가 운동과 신문학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잡지는 1889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 인쇄소 차리고 ‘교회’ 월보를 창간한 것이 한국 정기 간행물 효시였다. 신문은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주간 신문으로 ‘독립신문’보다 10개월 늦게 창간되었다.
5)선교사들의 한국학 연구
선교사들은 한국 문화의 창달과 연구, 서양 학문의 한국 도입에 결정적 공헌을 남겼다. 만주의 존로스, 헐버트, 게일, 기포드 선교사들이 한국 역사 연구 서적을 남겼다. 한국어 연구로는 존 로스의 A Korean Premier에 한국말 어법과 음운등을 연구했고 우리말을 일본, 몽고, 중국어 등과 비교 고찰하여 외국인으로 최초의 한국어 연구라는 의의를 가진다. 헐버트는 수많은 논문을 통해 우리말을 남태평양 및 인도 방언과 비교 연구했고 이두를 분석하여 업적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1890년 ‘한영문전’으로 개신교 최초의 사전을 발간했고 게일은 1897년 ‘한영자전’을 냈다. 게일은 1925년 신구약 성서를 사역하여 발행했고 1895년 ‘텬로력졍’을 최초의 영서한역으로 발간하고 ‘춘향전’ ‘구운몽’등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선교사들은 한국학 연구의 초석을 훌륭히 마련했고 이런 학문적 활동을 위해 1900년 왕립 아시아 학회를 창립하였을 때 대거 참여하였다.
역사 왜곡하는 신천지는 이거나 보고 답하시지?
한국기독교회 역사(민경배) -김승원-
12. 외국 선교사의 선교 정책
12-1. 네비우스 방법의 설정과 지역 분할
미국 감리교, 장로교, 캐나다, 호주, 영국, 일본을 통해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몰려들고, 한국 교회에 간헐적 수난도 있으므로 뚜렷한 선교 방법과 선교사간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정책 설정을 해야 했다. 1890년 중국 지푸 선교사인 존 네비우스를 초빙하여 한국 선교 원칙을 제공받았다.
(1) 선교사 하나하나의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전도
(2)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성서를 가르치는 자립 선교
(3) 자립 정치, 모든 신자들이 그들이 선택한 봉급받지 않는 지도자 아래서 전도와 교회 경영
(4) 자립 보급, 모든 교회 건물은 그 교회 교인에 의해 장만하고 교회에서 전도인의 봉급 지급
(5) 체계적인 성서 연구, 모든 활동은 성서 중심, 성서 연구는 반드시 여럿이.
(6) 성서의 교훈에 따른 엄격한 생활 훈련과 치리
(7) 다른 교회 기관과 협력 일치의 노력하고 다른 기관과 지역을 분할하여 전도.
(8) 지역과 프로그램 분할 이후 피차 간섭하지 않을 것
(9) 경제나 이외 문제 폭넓게 피차 돕는 정신.
그런데 이 원칙은 1889년 ‘미국 북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아(호주) 미션 연합 공의회’에서 연구되었다. 이 기관은 교회 연합 기관으로 우리나라 최초였는데 1893년에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로 조직되었고 이 공의회는 두가지 업적을 남겼다. 하나는 선교 지역 분할 정책이다(Comity Arrangements). 여러 선교 기관이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 없는 경쟁하지 않도록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맡았다. 이런 지역 분할이 한국 교회의 분열의 지방적 배경과 대체로 중복되는 비극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지만 본래는 선의의 분할이었다. 둘째로 이 공의회는 네비우스 방법을 기초로 하면서 핵심적 몇 가지 원칙을 첨가하여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1) 상류 계급보다 근로 계급을 상대로 전도
(2)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크리스천 소녀 교육에 힘 쓴다
(3) 시골 초등학교를 경영함으로 기독교 교육 효력을 낸다
(4) 장차 한국인 교역자를 이런 곳에서 배출
(5)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개종시키므로 빨리 안전하고 명석한 성서를 준다
(6) 모든 종교 서적은 순 한국말로 씌어지도록
(7) 선교사의 도움을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공헌하는 개인을 늘린다
(8) 동족의 전도에 의한 대중 신앙화
(9) 의료 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친숙하게 지내고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인다
(10) 치료받은 환자가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하여 전도의 문 열리도록.
이 방법은 한국 교회의 발전과 신앙 형태,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 조직에 큰 영향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변동도 동시에 가져왔다. 원래 이 방법의 근원은 영국의 선교사 헨리 벤인데 그는 1860년대 광범위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자립 교회, 자급 교회, 자립 선교의 원칙을 세계 선교 방법으로 채택할 것을 권고했다. 그는 19세기 선교사들이 부르주아 시민적 중류 계급의 운동이란 점을 밝히고 선교사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을 근대화하고 시민층으로 형성하는 의미에서 육성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선교 정책은 자연히 시민적인 책임과 도덕, 자기 의식 형성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고 저 유명한 자급, 자립, 자립 선교의 3대 원칙으로 귀납시켰다. 한국의 네비우스 전도는 근로 계급과 하류층 여성들을 교육하여 자립하고 공헌하는 개인으로 발전시킴으로 근대적 의미의 시민, 의식과 책임의 주체로 나라와 겨레에 관여하는 창조적 인간상을 꾸미게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계층의 상향 이동을 가능하게 하고 중산 시민층을 형성하는 사회적 상향 추진력으로 업적을 남겼다.
12-2 감리교 선교 정책
감리교는 탐색 순회 전도를 원칙으로 했다. 평민과 가난한 대중을 위해 전도와 의료 사업을 개항시가 아닌 내지로 확대시켰다. 이런 기동성 넘치는 감리교 선교는 한국 감리교의 정신적 기동성, 진취성을 배양했다. 또 감리교는 장로교보다 교육 분야에 차원 높은 집착을 했다. 장로교가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출신 교회로 보내 힘있는 전도자를 양성하는데 반해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하여 그것을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 삼는 폭넓은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교육의 치중은 서북부 감리교 복음 사업의 부진을 자초했다. 또 다른 한 가지 점은 장로교에 비해 많은 수의 여선교사를 가지고 부녀사업에 남다른 공헌을 남긴 것이다. 또 부녀자를 위한 병원도 먼저 설립했다. 그런데 감리교가 교육과 여성 사업에 근대화의 첩경을 가면서도 네비우스 방법을 채택하지 않은데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對 근대사회 대결 자세가 달랐다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를 둘러싼 장로교와 감리교의 정책 대결이었다.
12-3 한국 교회의 비정치화 문제의 시작
한국 교회는 국민과 국가 의식 중추로 자처하고 대외적으로 얼을 가꾸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 복음과 경건주의 테두리 안에서 빗나가기를 바라지 않던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의 비정치화를 감행할 책략을 꾸몄다. 당시 알렌은 칼빈주의적 섭리 이론에서 국가와 교회의 본질적 연결을 전제로 하여 한국 내 보수주의 세력과 인연을 맺었다. 이것은 경건주의와 부흥회 타입의 감리교와 거리가 멀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였지만 감리교적 기질이 많았다. 이로 인해 한국 선교사는 알렌의 장로교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의 ‘감리교적’ 선교사들로 분할되었다. 감리교적 선교사들은 알렌이 정치에 매혹되어 궁에 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알렌은 복음 전파를 왕명의 허락 날 때까지 보류하는 것이 상책이라 판단하여 선교사들을 광기의 열광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당시 외교관으로 있던 알렌으로 인해 선교사들과 미국 공관과 관계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역사가 의외의 곳으로 흘러갔다. 알렌의 정치적인 태도를 비난했던 선교사들이 1892년 왕실과의 친근화 관계가 된 것이다. 장로교 애니 엘러스와 릴리어스 호튼이 민비의 시의가 되었고 감리교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워싱톤과 헤이그에 잠행하였다. 감리교 존스 목사는 고종 측근으로 통역을 맡았고 언더우드 자신도 고종의 부름을 받고 7주일 동안 입궐하여 숙직하였다. 선교사들과 왕실의 자연스런 접근에 반발을 느낀 사람은 없고 그들은 이를 복음 선교에 보탬이 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적 경건에 일관한 선교사라면 이 사태의 귀추를 관망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를 비정치화하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은 여기에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13. 틀을 잡아간 한국 교회.
13-1. 한말의 비운과 기독교회
1895년 10월 8일 민비가 일본 폭도들에 의해 시해 당함으로 나라의 비분이 절절히 사무치고 백성의 체면이 유린되었다(을미사변). 그런데 기독교의 새 국면이 전개된 것이 이 섭리의 비밀이었다. 고종은 참혹한 시련을 이길 기력이 없어 형편없이 의기소침해 있었고 독살을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때 교회가 솟아 뻗는 충애로 여기에 몸 던져 함께 울고 정의감과 의의 종으로 그 시련에 동참했다. 민비 시해 후 미국 정부는 일본의 설명문을 만족스럽게 여기므로 미국 선교사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비애에 허덕이는 백의민족과 와신상담 동행할 것을 다짐했다. 알렌은 민비 시해의 음모가 일본 공사관에서 진행된 것을 워싱턴에 통보하고 공개 규탄했다. 나아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정을 진언했다. 당시 일본과 친근해진 미국은 그의 보고를 묵살했다. 1895년 11월 28일 공포에 떠는 국왕을 궁궐 밖으로 모시려는 구미파 왕실 근신과 서양 선교사들의 범궐모의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 제너럴 다이등을 지목하며 국왕쟁취사건이라고 비난했다. 당시 애비슨은 고종의 식사를 검색하며 함독유무를 살펴왔고 언더우드는 고종의 벗이 되어 고독과 공포를 이겨내게 해주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국왕을 보호하려는 소박한 인정과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한국 프로테스탄티즘의 국민 감정과 반일 의식의 생리가 구형되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15일 을사보호 조약 체결 이틀 전 고종은 헐버트를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상실 문제를 도와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통령 면회는 거절되었고 한국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처음 일본을 한국 번영의 조력자로 보았던 헐버트는 자책과 울분에 쌓였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진출을 지원함으로 러시아의 남진을 억제하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이권을 시인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워싱턴과 선교사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1903년 250명의 재한 미국 선교사 중 절반이 한국 독립을 위한 열렬한 챔피언들이었다. 워싱턴은 이들을 ‘괴벽한 녀석들’로 비판했다. 기독교 정신과 한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미국의 친일 정책에 맞섰던 알렌은 1905년 공사직에서 해직당했다. 한편 선교사들은 워싱턴의 이념에 정면적으로 맞싸울 정서가 없었다. 그들 역시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일본이 한국에 손을 뻗쳤을 때 상당수 선교사가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인식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취임 때 그의 선정에 기대하는 경향이 압도적이었다. 또 서울에 일본 고위층과 선교사들의 사교적 회합에서 참석하여 샴페인을 마시기도 했다. 경건형의 선교사들과 한국인의 실의에 함께 눈물 흘린 선교사들은 이에 대해 매서운 화살을 퍼부었다.
13-2. 애국과 반일의 민족 교회
19세기 말 한국 교회는 황제에 대한 현저한 충성과 애국의 열정을 그 특징으로 가지기 시작했다. 민비 시해 참변 때 장로교 감리교인들이 함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 예배를 드렸고 아관파천으로 피하였던 고종의 환어를 환영하기 위해 배재 학당 학생들이 도로 연변에 늘어서서 복받치는 충절을 웅변적으로 시위한 일도 있었다. 1896년 고종 탄신 축하일에 교회가 충군애국의 정신을 세계에 시위하기도 했다. 전국민이 뜨겁게 왕실에 충실을 바칠 때 기독교회가 이 심정에 공통의 통로를 찾은 것이다. 민족 일치의 바탕과 의사의 표현을 교회가 맡기 시작한 것이다.
<겨레 교회로서의 정형>
1895년부터 1907년에 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교인수는 530명에서 26057명으로 급증하였다. 이 성장은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했다. 전도 10년 만에 교회 135개 예배처소 185 미안수 교역자 21명 교인 15222명 학교 41개 교사 740명 한해 헌금이 8800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서북 지역 교회의 성장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 전쟁, 노일 전쟁의 참혹한 전운과 피해가 이곳을 집중적으로 강타한 사실이다. 청일 전쟁 후 도시가 폐허가 되고 병마가 덮쳤을 때 사무엘 모펫과 그레이럼 리 두 목사가 거리를 다니며 희생적으로 봉사하여 주민들의 뜨거운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둘째로 본래 평안도와 황해도는 조정에 의해 강압적 처우를 받아 소외되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선교사들은 급격한 교회 증가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곧 보호와 힘의 획득인 경우가 많음을 우려하였다. 또한 수효가 적은 선교사들이 그들을 돌보고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거나 통탄할 과오로 이끌 위험성을 경계하였다. 라투레트 교수는 한국이 이 기간 경험한 온갖 비운 때문에 받은 정서적 충격이 교회의 급증과 확대를 기록한 것으로 분석한다. 나라의 허약에 대한 대책을 기독교 안에서 찾아 서양의 패턴에 따라 나라를 재조직하고 민심을 결속하려는 촉박감이 작용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원적인 분석을 할 때 당시 종교적 진공성, 곧 재래 종교의 부재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 기독교가 서구화 운동에서 차지해야 할 지도에 대한 갈망이 작용한 것이다. 청일 전쟁에서 청국이 근대화한 일본에 쫓기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서구적 기독교회에의 전향을 결심한 것이다. 다음으로 혼란기에 기댈 곳 없어 교회의 신앙이 베풀 안정감과 그 방향에 대한 모색이 교회로 전향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반일순국의 교회>
을사보호조약이 진행되던 1905년 6월 하와이 동포들이 목사 윤병구와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회하고 일본 침략을 폭로하며 한국 독립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민영환이 자결하자 기독교인 김하원, 이기범, 차병수등이 사수국권을 쓴 경고문을 종로 네거리에 게시하고 시민들에게 통렬한 구국연설을 하다 일경의 칼을 받아 부상을 입고 감금되었다. 1907년 고종의 신변이 불안하다는 전언이 평양에 날아들자 교회가 이를 크게 광고하여 학생은 일제히 휴학하고 교인들은 임시 휴업하고 교인들이 매일 기도회를 열고 통곡 기원을 계속했다. 기독교 청년들은 자강회의 동지들과 함께 친일 일진회 기관 신문사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대한문에 나가 꿇어 통곡하며 황제의 비운을 목메어 통곡했다. 양주군 예수교 교사 홍태순은 대한문 앞에서 약을 먹고 자결하여 충군 애국의 교회상을 남겼다. 상동 감리교회 엡웟 청년회는 정복을 입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시기 항일 운동의 특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의 조직적 항일 운동과 서북도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항일 운동의 대두였다. 일본의 앞잡이 스티븐슨을 살해한 장인환, 이완용 암살 미수의 이재명은 열렬한 신자였고 의병 지휘하던 사람 중 기독교인이 상당수였다. 이처럼 이들은 애국과 신앙의 조화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1907년 일본은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 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항일과 무력 행사에 대한 반발이 놀랍게도 선교사들에게서 모질게 터져나왔다. 게일은 ‘위조 애국의 미친듯한 광란, 자결, 신체 절단, 허황된 맹세, 게릴라 의거, 냉혹 무정의 저항’이라고 범준한 자의 양식을 깎는 언사를 남기고 있다. 감리교 감독 해리스는 감리교의 엡웻 청년회가 교회의 목적을 왜곡하고 정치 목적으로 이용한다 하여 이를 해체시켰다. 구세군 정령 호가드도 1908년 통감부를 찾아가 정치에 불간섭을 선서하고 돌아왔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제3국인인 선교사들이 을사조약의 한일 관계에 개입한다는 것은 미일 관계에서 보아도 불가능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책임 있는 위치의 선교사들은 현실 안에서 한국 교회의 생존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와 선교사의 불일치는 어느 모로 보든 비극이었다. 우리는 일부의 감리교 장로교 선교사의 친일과 격렬한 항일의 모습이 한국 교회의 생리로 일치되지 못했던 부조리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이 반드시 한 번은 충돌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1907년 대부흥에 내적으로 이런 불행한 대결이 있었다.
13-3 교회와 개화
기독교회의 선교는 한국에서 단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소박하고 단일해서 교회 신앙을 몇줄 안 되는 글로 요약할 수 있었고 인간 내적 생을 한꺼번에 포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다양하고 다변적이어서 생각하고 건드리지 않은 것이 없고 정서 가운데서 자극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고상하고 값진 사업을 찾아 생기를 북돋워주고 깊은 사색과 결단과 신비감으로 일에 대한 가치와 헌신을 현현해 주었다. 한국 교회가 한국의 근대화와 개화에 공헌한 사실은 명백한데 개화라는 말은 정치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분리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개화와 교회>
개화기 한국 기독교의 활력과 지성의 힘은 역사 변혁의 원동력이었다. 기독교는 한국 근대사 개화 추진의 앞장에 서 있었다. 독립신문(1897년 12월 23일)에 의하면 기독교만이 근대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개파해서 문명과 부강의 새 시대를 전개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정치적 개화의 특징은 정치 변혁에 앞서 변화된 개인의 도덕적 품격의 구현화에 있다. 내적 변화의 신앙의 견실이 개인에게 성취되면 그것이 외연되어 사회의 정돈, 자유, 부강이 실현된다는 철저한 확신이다. 초대 교회는 사회 구조 전체가 인격 변화에 따라 변혁 개선된다는 신앙의 역동성을 믿었다. 또 다른 특징은 개화 과정의 반과격성인데 독립협회와 기독교와의 관계 과정사가 이를 입증한다. 1896년 7월 2일 독립 협회가 설립되었을 때 기독교인 서재필, 윤치호, 정기준, 홍정후등이 참여했다. 그런데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에 ‘뜨거운 머리를 가진 청년들의 조심성 없고 건방진’ 과격 행위가 나타났다. 교회와 선교사들은 독립협회의 과격성에 경계를 하였다. 선교사들과 알렌은 서재필에게 ‘혁신의 시기가 상조하니 단념하고 미국에 돌아가라’ 권고했다. 또 선교사들은 독립협회의 과격성 배후에 일본의 후원과 지지가 있다 판단하였다. 선교사들이 독립 협회를 경원한 것은 선교사들의 존왕적 태도(왕을 존경함)때문이었다. 1898년 보부상 황국 협회가 교회당 파괴와 교인 도살을 폭언했을 때 격분한 교도들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보부상 두목 체포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는데 이때 고종이 알렌과 아펜젤러에게 교도들을 근신시킬 것을 부탁하였고 아펜젤러는 교도들의 시위 자제를 요구하였다. 게일은 ‘교회는 정치적 조직체가 아니다. 그렇게 되는 날 영적 영향력은 없어지고 만다’고 하였다.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관계자가 구속되었을 때 감리교 선교사 벙커 부부가 입옥 전도하여 이승만, 유성준, 김인,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등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정치 개화의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 기독자들간 이념상 갈등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존왕성과 신앙 내연 선행의 평화스런 개혁 의지가 개화 추진 기독자들의 과격 입현제 개혁과 민주주의 혁신 방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정치적 개화는 한마디로 자주 인권, 천부의 권리, 독립국의 지탱이란 정신적 각성의 함양을 수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야말로 참된 근대 시민 국가의 이념적 기초를 성서적 가르침에 내놓았던 것이다.
<문화적 개화와 교회의 주도>
1) 교육
기독교는 교육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복음 전수 이전에 서양 철학과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교육 사업을 시작한 목적은 ‘이 교육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될수록 많이 포섭하여 기독교야말로 인간 생활의 진실하고 가장 완전하고 적절한 지침임을 알게 하여 그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교육과 문화 개진에 대한 교회의 공헌은 실로 한국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것이었다. 한국 정신사에서 종교와 교육의 구분이 수행되지 아니한 점이 선교와 교육의 병행을 쉽게 실현시킨 바탕이 되었다. 기독교는 종교로서보다는 위대한 교육자로 환영되었고 한국 교회는 전반적 문화 활동을 동반함으로 한국 근대화의 도관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1885년 8월 아펜젤러에 의해 배재 학당이 세워진 것이 근대 교육에서 사립 학교의 시작이다. 1886년 5월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을 창설하였다. 근대식 고등 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 의학교인데 제중원의 의학교육이 1886년 4월 의학부로 개설되었고 1899년 정식으로 의학교가 설립되었다. 1909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 총수가 950여개가 되었다. 이는 선교사들이 종교가로서 백성들의 질고를 듣고 무고(無辜)를 구함으로 종교의 전포의 용(用)에 공(供)하고 있던 열의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근대화 작업은 한국 교회 자신의 손에 의해서도 훌륭히 진행되었다. 1895년 새문안 교회에서 영신 학당을 설립하였고 1904년 상동 교회 전덕기가 청년 학원을 설치하였는데 이 학교는 후에 안창호가 조직한 구국 비밀 단체 신민회의 기관 학교로서 독립사상 고취에 임하였다. 윤치호가 맡아 실업 교육 중심으로 발전시킨 송도의 한영 서원, 도산 안창호의 평양 대성 학교, 이승훈의 정주 오산 학교 등은 일본도 시인하듯 기독교가 금일의 신교육 제도의 연원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사학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 민족 의식을 배양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외연으로 현존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2)청년운동
한국 청년 운동은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다. 감리교 엡웟 청년회는 1897년 9월 창설되었다. 그러나 장구하고 체계적인 것은 1903년 10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였다. 구성원은 상류층 중심의 독립협회계였고 교회가 접촉할 수 없는 층의 청년들을 특유한 방법, 곧 비종교적인 폭넓은 프로그램, 체육과 농촌 사업, 직업 교육등을 통해 한데 합치는 민족적 운동을 전개했다.
3)여성운동
1897년 감리교 여성 운동 단체 조이스 회가 조직되었고 1900년에 보호여회가 설립되어 빈궁한 교우를 도왔다. 북장로교는 여자 선교 의사의 활동으로 부녀 사업을 시작했고 1898년 평양에 ‘부인전도회’를 창설한 것이 우리 나라 부인 전도의 기원이다. 언더우드 부인은 서울 모화관에서 주례 모임을 가지고 성서반을 운영했다. 기독교가 여성을 해방하고 사회적 신분을 신장시킨 추진력은 거대했다. 1897년 정동 감리교회에 남녀가 합석하여 남녀 동등 문제를 토론한 일이 있고 교회 세례 교인 명부에 여인의 성명이 독립된 인격으로 기재되었다. 복음은 남녀의 창조 질서 안에서 인간 존엄성을 설교하고 동등성을 갈파했다. 한국 여성에게 생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 마음과 손에 전에 없었던 책임과 열정을 가득 채워주었다. “부부가 없으면 부자와 군신과 장유와 붕우가 어디로 좇아 나리요?” 나라와 사회 질서의 원칙이 부부라는 단언은 시대를 뒤흔든 선언이었다. 음담패설의 악덕제거, 조혼 타파, 수양 남매 결연 금지, 데릴 사위나 민며느리 금기, 미신 타파등을 시대 개혁의 기치로 추진했다.
4)한글, 문서, 성서, 찬송가.
1889년 10월 몇몇 선교사가 정동의 언더우드 자택에 모여 ‘한국성교서회’를 조직함으로 문서와 문예 활동을 근대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890년 그 헌장을 통과시켜 오늘의 기독교서회의 모체로 탄생했다. 1919년 ‘예수교셔회’로 개칭했고 이 서회는 한글로 허다한 역서를 펴내 민중 교화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1891년 감리교 올링거 선교사가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여 막대한 양의 출판 사업을 추진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로스 번역의 지나친 사투리와 난해성 때문에 1887년 2월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밤낮 없는 수고 끝에 1900년 9월 신약 성서의 개역 수정판이 발간되었다. 여기서 한글과 교회와 관계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관계 서적들은 모두 한글로 출판되었고 용어도 서민층 일상어를 택하여 복음 전도와 민중 교화 속도에 대성과를 거두게 했다. 실로 한글은 기독교의 새로운 활동에서 그 자체의 생명 확장을 보았고 이 나라 민족 문화를 창달하며 유구히 전승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 문법책인 ‘대한문전’을 간행한 최광옥도 기독교 신자요 애국지사였고 장로교 강병주 목사는 한글 운동을 교리 전도와 함께 하여 ‘한글 목사’로 불리웠다. 기독교회는 한글을 민족의식의 각성과 연결시키고 천대받아 온 한글의 인연 곧 부녀자와 서민층을 불러 일으켜 밝아오는 역사의 역군으로 배출했다.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 로스와 로드와일러가 펴낸 ‘찬미가’가 최초였고 장로교는 1894년 언더우드 편집의 ‘찬양가’ 총 154장이었다. 개화기 시초 시가 형태로서 찬송가는 창가 운동과 신문학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잡지는 1889년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 인쇄소 차리고 ‘교회’ 월보를 창간한 것이 한국 정기 간행물 효시였다. 신문은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주간 신문으로 ‘독립신문’보다 10개월 늦게 창간되었다.
5)선교사들의 한국학 연구
선교사들은 한국 문화의 창달과 연구, 서양 학문의 한국 도입에 결정적 공헌을 남겼다. 만주의 존로스, 헐버트, 게일, 기포드 선교사들이 한국 역사 연구 서적을 남겼다. 한국어 연구로는 존 로스의 A Korean Premier에 한국말 어법과 음운등을 연구했고 우리말을 일본, 몽고, 중국어 등과 비교 고찰하여 외국인으로 최초의 한국어 연구라는 의의를 가진다. 헐버트는 수많은 논문을 통해 우리말을 남태평양 및 인도 방언과 비교 연구했고 이두를 분석하여 업적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1890년 ‘한영문전’으로 개신교 최초의 사전을 발간했고 게일은 1897년 ‘한영자전’을 냈다. 게일은 1925년 신구약 성서를 사역하여 발행했고 1895년 ‘텬로력졍’을 최초의 영서한역으로 발간하고 ‘춘향전’ ‘구운몽’등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선교사들은 한국학 연구의 초석을 훌륭히 마련했고 이런 학문적 활동을 위해 1900년 왕립 아시아 학회를 창립하였을 때 대거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