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글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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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를 위해 참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저는
그 불쌍한 아이도 시부모님과 남편의 바람대로 데려와서
제 딸아이와 함께 키워야 하나 하고 생각 했지만
둘째를 가질 엄두조차 낼 수없이 사는 형편에
외도하는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별난 남편과 살면서 그아이를 데려와 함께 산다면 딸아이도 저도, 그아이도 남편도.
결국엔 상처만 받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키워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 아빠라고 찾아올지도 모를
그 아이를 위해서 적금을 하나 들고나니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나중에 당시 시댁에서 저 몰래 그 아이를 데려와 돌보다가
감당이 안되니까 다시 아이엄마에게 보냈다는것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남편은 박봉이던 회사를 사퇴하고
시댁 형제의 도움으로 자영업을 하게 되었고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죽으면 홀로 남겨질 딸아이가 걱정되어 둘째를 가지게 되었고 건강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개념도 남편의 개념도 자식의 개념도 없이 무엇때문에 왜 사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남편은
온 주변 사람들이 다 알도록 외도를 하는것도 모자라
본인의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내연녀의 20대 아들과 개구쟁이인 내아들을 남들에게 비교하며
내아들을 거리낌없이 깎아내리곤 했습니다.
그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봐서라도 자제해달라 말했더니
주변에 외도하며 사는 여자들을 거론하면서
외도 하며 사는게 마치 자랑스러운 일인양 당당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알고 상처받을까봐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건 그때까지 존칭어를 쓰던 남편에게 말을 놓는 것과 (남편에게 처음으로 '나와서 밥먹어' 라고 했을 때의
당황해하던 남편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제 일기장에 남편의 호칭을 '별종' (별난사람의준말로.. )이라고 쓰는것,
그리고 막걸리에 설탕을 타서 아이들 몰래 먹고
머리를 뜯거나 가슴을 치고, 때론 벽에 머리를 찧어가며 나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아들 딸이 클때까지 남편은 상대를 바꾸어가며 외도를 하고
때로는 옷 보따리까지 싸가지고 몇일씩 연락도 없이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이혼 하자는 말을 밥먹듯 하며 나이가 들어갔고 저는 그 와중에도 시댁에 최선을 다하며
59세 내 생일날엔 꼭꼭 이혼하리라 다짐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다행이 수술경과가 좋았습니다.
저는 속아서 시집온 줄도 몰랐던 신혼 때처럼 다시 남편을 '왕' 처럼 모셨습니다.
아이들도 최선을 다해. 아빠기분을 맞추어주려 노력하고 건강식단과 건강식품을 챙겨드렸습니다. 잘 회복하여 직장생활도 다시 하고 있는 남편이
이제는 제가 들어줄수도 없는걸 말하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며
구정 때부터 저는 물론 아이들까지 숨쉬기 힘든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구정에 밥 한끼 마음 편히 먹지못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참고 살아온 긴 세월이 결국 아이들 마음에 상처만 안겨준 무의미한 삶이 되었다는걸
30년이 넘은 지금에야 소리내어 말할수 있게된 사연과
저를 비롯하여 별난 저희 친정 형제들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추가해서 올리겠습니다.
답답한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니까 버틴 30년
엄마 였기에 견딜 수 있었던 30년.
답답한 이야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전 글들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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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를 위해 참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저는
그 불쌍한 아이도 시부모님과 남편의 바람대로 데려와서
제 딸아이와 함께 키워야 하나 하고 생각 했지만
둘째를 가질 엄두조차 낼 수없이 사는 형편에
외도하는걸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별난 남편과 살면서 그아이를 데려와 함께 산다면 딸아이도 저도, 그아이도 남편도.
결국엔 상처만 받게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키워줄 수는 없지만 언젠가 아빠라고 찾아올지도 모를
그 아이를 위해서 적금을 하나 들고나니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나중에 당시 시댁에서 저 몰래 그 아이를 데려와 돌보다가
감당이 안되니까 다시 아이엄마에게 보냈다는것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남편은 박봉이던 회사를 사퇴하고
시댁 형제의 도움으로 자영업을 하게 되었고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가 죽으면 홀로 남겨질 딸아이가 걱정되어 둘째를 가지게 되었고 건강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개념도 남편의 개념도 자식의 개념도 없이 무엇때문에 왜 사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남편은
온 주변 사람들이 다 알도록 외도를 하는것도 모자라
본인의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내연녀의 20대 아들과 개구쟁이인 내아들을 남들에게 비교하며
내아들을 거리낌없이 깎아내리곤 했습니다.
그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아이들을 봐서라도 자제해달라 말했더니
주변에 외도하며 사는 여자들을 거론하면서
외도 하며 사는게 마치 자랑스러운 일인양 당당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알고 상처받을까봐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건 그때까지 존칭어를 쓰던 남편에게 말을 놓는 것과 (남편에게 처음으로 '나와서 밥먹어' 라고 했을 때의
당황해하던 남편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제 일기장에 남편의 호칭을 '별종' (별난사람의준말로.. )이라고 쓰는것,
그리고 막걸리에 설탕을 타서 아이들 몰래 먹고
머리를 뜯거나 가슴을 치고, 때론 벽에 머리를 찧어가며 나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아들 딸이 클때까지 남편은 상대를 바꾸어가며 외도를 하고
때로는 옷 보따리까지 싸가지고 몇일씩 연락도 없이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이혼 하자는 말을 밥먹듯 하며 나이가 들어갔고 저는 그 와중에도 시댁에 최선을 다하며
59세 내 생일날엔 꼭꼭 이혼하리라 다짐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다행이 수술경과가 좋았습니다.
저는 속아서 시집온 줄도 몰랐던 신혼 때처럼 다시 남편을 '왕' 처럼 모셨습니다.
아이들도 최선을 다해. 아빠기분을 맞추어주려 노력하고 건강식단과 건강식품을 챙겨드렸습니다. 잘 회복하여 직장생활도 다시 하고 있는 남편이
이제는 제가 들어줄수도 없는걸 말하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며
구정 때부터 저는 물론 아이들까지 숨쉬기 힘든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구정에 밥 한끼 마음 편히 먹지못하고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참고 살아온 긴 세월이 결국 아이들 마음에 상처만 안겨준 무의미한 삶이 되었다는걸
30년이 넘은 지금에야 소리내어 말할수 있게된 사연과
저를 비롯하여 별난 저희 친정 형제들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추가해서 올리겠습니다.
답답한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