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티비를 보고 있는데 밥은 먹어 배는 부르지, 등은 따뜻하지. 눈이 스르르 감겨 오는 거야.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몸은 천근만근 나가기 싫은데도 어쩌겠니 나가야지. 그래서 비척걸음으로 대문까지 걸어 나가. 그런데 막상 나가보면 길에는 아무도 없고 휑한 거야.”
둘째 언니는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똑똑 문만 두드리고 도망가는 나쁜 놈들 때문에 머리숱도 없는 노처녀가 되어버렸다고.
그 표현이 너무 근사해보여서 자신의 처지를 멋지게 표현만 할 수 있다면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도 좋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언니의 푸념을 오랜 시간 듣고 있었다.
그 때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 바로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언니에게는 몇 명의 나쁜 놈들이 더 있었는지 밤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식구들의 늘상 있는 일이라는 반응 속에 잊혀져 갔다.
“나 결혼 할래!”
고스톱을 치고 있는 늙은 세 처녀들을 향해 말했다.
“아자, 쓸이야. 쓸. 자, 자 한 장씩 내놓으시고.”
“뭐야? 너 다 먹어라.”
“올해는 운이 좋을려나. 하하하.”
나의 폭탄선언은 셋째 언니의 싹슬이보다도 주목받지 못한 채 웃음소리에 묻혀지는 듯 했다.
하긴 이런 말 한 것이 처음도 아니니 예상은 했지.
그래도 말을 듣고도 화투장을 목숨인양 꼭 쥐고 있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말을 뱉었는데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을 때의 기분. 오늘은 그 기분이 주눅이 아니라 오기와 닮아 있었다. 만약 그녀들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오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쯤에서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늘어진 츄리닝처럼 허벅지도 늘어져버린 큰 언니, 비싼 돈을 들이고도 눈가의 주름을 막아내지 못한 둘째 언니, 지수원 머리를 흉내냈다가 완전 아줌마가 되어버린 셋째 언니. 누가 봐도 만만하게 보았으리라.
그러기에 소리 한 번 더 쳐보자 마음을 먹었다.
“나 결혼한다구!”
“자, 큰 언니는 천 팔백원, 작은 언니는 피박이니까 팔이 십육, 삼천 육백원.”
“야, 그만하자. 쟤 얘기할 거 있나본데 그거 듣자.”
돈을 제일 많이 잃고 있던 작은 언니가 관심을 살짝 보이며 몸을 틀었다가 이내 셋째 언니에게 팔뚝을 잡히고 다시 패를 떼고 있었다.
‘때를 잘못 맞췄구나.’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시집가란 사람들의 말을 피해 친척집에 발을 끊은 지 5년째인 그녀들에게는 셋이 옹기종기 모여 치는 고스톱이 명절의 유일한 낙이자 이벤트였던 것이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배신이라는 룰을 암묵적으로 만들어 서로를 위안 삼고 있던 그녀들에게는 고스톱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사명감을 부여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언니들은 내게 같이 게임을 할 것을 권하지 않았고, 나도 그 무리에 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나도 집에서 그냥 처량하게 명절을 보낸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런 그녀들에게 결혼이란 단어는 들려도 들어서는 안 되는 단어였기에 나의 말에 무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구나하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단어를 바뀌서 말을 해볼까 생각을 하며 적절한 단어를 찾아 조합을 하는 중에 큰 언니가
“키위야! 커피 좀 타와.”
라고 대뜸 한 마디 뱉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져 버려 털래털래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 나만 키위 같은가? 자기들도 다 키위 같으면서.’
어렸을 때는 그 별명이 지독히도 싫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나에게도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도 커지고.
언니들이 많았기에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거울 속의 내 모습에 놀라 ‘악’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
식구들은 놀라 화장실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는 식구들에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놀란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돌려보낸 후에 문을 잠그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코밑에 거뭇거뭇 거리는 것이 수염이었다.
그 후 한참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며 보낸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그냥 솜털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 거겠지하고 말았지만.
비록 가족이었지만 터울이 있는 언니들에게 속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터라 고민을 숨기고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를 했으나 예리한 노처녀들의 눈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머, 쟤 수염 났어.”
제일 먼저 발견한 큰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 키위였다. 물론 깍지 않은 털 난 키위 같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 동생을 두게 되었다며 즐거워한 언니들도 서로 모르게 했을 뿐 모두 수염이 나 있었다.
항의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키위라는 어감이 나쁘지 않게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별명을 버린 후에 생길 다른 별명이 두렵기도 했다.
부엌에서 커피를 타고 쟁반에 담아 걸어오면서 본 그녀들의 모습은 작년보다도 더 슬퍼보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는 지워지고 슬픈 음악이 나오는 흑백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
35, 34, 31이 숫자에 불과하다고 넘어가기에는 의미가 특별한 그녀들의 나이였다.
프림 두 스푼의 커피는 큰 언니꺼, 블랙 커피는 작은 언니꺼, 설탕 세 개짜리는 셋째 언니꺼 그렇게 커피 잔을 언니들 앞에 내려놓고 있는데 커피를 홀짝 거리던 큰언니의
“남자 있으면 부모님 없을 때 일단 데려와봐. 언니가 봐줄게. 우리 생각하지 말고 갈 수 있으면 먼저 가.”
라는 말에 셋째 언니가,
“언니는 얘 이런 게 벌써 세번째야. 또 속아주는 거야? 난 이제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에는 안 믿을래.”
라고 응수했다.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야. 내일 만나서 데리고 올게.”
“그 남자가 결혼하재?”
둘째 언니가 조금 관심을 갖고 물었다.
“그럼.”
아직 현상 오빠에게는 결혼이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내일은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모든 준비도 완벽했다. 만약을 위해 결혼 보증서도 작성해 놓은 것이다. 결혼 후 일년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조건 없이 이혼을 해준다. 누구라도 솔깃해 할 제안이지 생각하며 언니들 몰래 웃음을 짓고 있었다.
kiwi (키위) - 01. "나 결혼 할래!!!"
1
“혼자 티비를 보고 있는데 밥은 먹어 배는 부르지, 등은 따뜻하지. 눈이 스르르 감겨 오는 거야.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누른다. 몸은 천근만근 나가기 싫은데도 어쩌겠니 나가야지. 그래서 비척걸음으로 대문까지 걸어 나가. 그런데 막상 나가보면 길에는 아무도 없고 휑한 거야.”
둘째 언니는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똑똑 문만 두드리고 도망가는 나쁜 놈들 때문에 머리숱도 없는 노처녀가 되어버렸다고.
그 표현이 너무 근사해보여서 자신의 처지를 멋지게 표현만 할 수 있다면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도 좋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언니의 푸념을 오랜 시간 듣고 있었다.
그 때가 내가 고등학교 졸업 바로 전의 일이었다.
그 뒤로 언니에게는 몇 명의 나쁜 놈들이 더 있었는지 밤늦게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식구들의 늘상 있는 일이라는 반응 속에 잊혀져 갔다.
“나 결혼 할래!”
고스톱을 치고 있는 늙은 세 처녀들을 향해 말했다.
“아자, 쓸이야. 쓸. 자, 자 한 장씩 내놓으시고.”
“뭐야? 너 다 먹어라.”
“올해는 운이 좋을려나. 하하하.”
나의 폭탄선언은 셋째 언니의 싹슬이보다도 주목받지 못한 채 웃음소리에 묻혀지는 듯 했다.
하긴 이런 말 한 것이 처음도 아니니 예상은 했지.
그래도 말을 듣고도 화투장을 목숨인양 꼭 쥐고 있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말을 뱉었는데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을 때의 기분. 오늘은 그 기분이 주눅이 아니라 오기와 닮아 있었다. 만약 그녀들이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오기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쯤에서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늘어진 츄리닝처럼 허벅지도 늘어져버린 큰 언니, 비싼 돈을 들이고도 눈가의 주름을 막아내지 못한 둘째 언니, 지수원 머리를 흉내냈다가 완전 아줌마가 되어버린 셋째 언니. 누가 봐도 만만하게 보았으리라.
그러기에 소리 한 번 더 쳐보자 마음을 먹었다.
“나 결혼한다구!”
“자, 큰 언니는 천 팔백원, 작은 언니는 피박이니까 팔이 십육, 삼천 육백원.”
“야, 그만하자. 쟤 얘기할 거 있나본데 그거 듣자.”
돈을 제일 많이 잃고 있던 작은 언니가 관심을 살짝 보이며 몸을 틀었다가 이내 셋째 언니에게 팔뚝을 잡히고 다시 패를 떼고 있었다.
‘때를 잘못 맞췄구나.’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시집가란 사람들의 말을 피해 친척집에 발을 끊은 지 5년째인 그녀들에게는 셋이 옹기종기 모여 치는 고스톱이 명절의 유일한 낙이자 이벤트였던 것이다. 한 명이라도 빠지면 배신이라는 룰을 암묵적으로 만들어 서로를 위안 삼고 있던 그녀들에게는 고스톱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사명감을 부여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언니들은 내게 같이 게임을 할 것을 권하지 않았고, 나도 그 무리에 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나도 집에서 그냥 처량하게 명절을 보낸다고 해도.
처음부터 그런 그녀들에게 결혼이란 단어는 들려도 들어서는 안 되는 단어였기에 나의 말에 무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구나하고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단어를 바뀌서 말을 해볼까 생각을 하며 적절한 단어를 찾아 조합을 하는 중에 큰 언니가
“키위야! 커피 좀 타와.”
라고 대뜸 한 마디 뱉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져 버려 털래털래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 나만 키위 같은가? 자기들도 다 키위 같으면서.’
어렸을 때는 그 별명이 지독히도 싫었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나에게도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슴이 봉긋해지고, 엉덩이도 커지고.
언니들이 많았기에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는데 어느 날은 거울 속의 내 모습에 놀라 ‘악’소리를 낸 적이 있었다.
식구들은 놀라 화장실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왔는데 왜 그러느냐고 묻는 식구들에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놀란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돌려보낸 후에 문을 잠그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코밑에 거뭇거뭇 거리는 것이 수염이었다.
그 후 한참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며 보낸 기억이 있다.
나중에는 그냥 솜털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 거겠지하고 말았지만.
비록 가족이었지만 터울이 있는 언니들에게 속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터라 고민을 숨기고 매우 조심스럽게 처리를 했으나 예리한 노처녀들의 눈은 피할 수가 없었다.
“어머, 쟤 수염 났어.”
제일 먼저 발견한 큰 언니가 붙여준 별명이 키위였다. 물론 깍지 않은 털 난 키위 같다는 뜻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 동생을 두게 되었다며 즐거워한 언니들도 서로 모르게 했을 뿐 모두 수염이 나 있었다.
항의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키위라는 어감이 나쁘지 않게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별명을 버린 후에 생길 다른 별명이 두렵기도 했다.
부엌에서 커피를 타고 쟁반에 담아 걸어오면서 본 그녀들의 모습은 작년보다도 더 슬퍼보였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는 지워지고 슬픈 음악이 나오는 흑백 영화를 보는듯한 기분.
35, 34, 31이 숫자에 불과하다고 넘어가기에는 의미가 특별한 그녀들의 나이였다.
프림 두 스푼의 커피는 큰 언니꺼, 블랙 커피는 작은 언니꺼, 설탕 세 개짜리는 셋째 언니꺼 그렇게 커피 잔을 언니들 앞에 내려놓고 있는데 커피를 홀짝 거리던 큰언니의
“남자 있으면 부모님 없을 때 일단 데려와봐. 언니가 봐줄게. 우리 생각하지 말고 갈 수 있으면 먼저 가.”
라는 말에 셋째 언니가,
“언니는 얘 이런 게 벌써 세번째야. 또 속아주는 거야? 난 이제 결혼식장 들어가기 전에는 안 믿을래.”
라고 응수했다.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야. 내일 만나서 데리고 올게.”
“그 남자가 결혼하재?”
둘째 언니가 조금 관심을 갖고 물었다.
“그럼.”
아직 현상 오빠에게는 결혼이란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내일은 일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모든 준비도 완벽했다. 만약을 위해 결혼 보증서도 작성해 놓은 것이다. 결혼 후 일년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조건 없이 이혼을 해준다. 누구라도 솔깃해 할 제안이지 생각하며 언니들 몰래 웃음을 짓고 있었다.
- 키위 2편 보러 가기 -